MBC <내조의 여왕>이 종영한지 1주일이 지났다. 지난 10주 동안 퀸즈푸드 식구들은 우리 가족, 이웃처럼 정들었지만 백수 남편 온달수(오지호)를 취업시키기 위한 천지애의 고군분투 못지않게 <내조의 여왕>은 온갖 어려움과 함께 만들어진 드라마였다. SBS <칼잡이 오수정>에 이어 두 번째 미니시리즈를 준비하던 박지은 작가는 처음에 이 작품을 장교와 사병의 가족들이 모여 살고 엄격한 위계질서가 지배하는 군인 아파트 이야기로 기획했지만 민감한 소재와 현실적인 한계로 배경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이미 결혼한 세 부부의 이야기가 미니시리즈에 어울리겠냐는 의문이나, ‘착하지 않은’ 여주인공을 과연 누가 하려 하겠냐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박지은 작가는 “재미있으면 되지 않느냐”와 “그래도 (천지애가) 밉진 않지 않느냐” 라며 버텨 <내조의 여왕>을 완성해 냈다.

“누구나 헤어진 첫사랑이 잘 나가는 거 보면 배 아파 하고 ‘저 남자와 결혼할 걸 그랬다’며 후회하는데 그게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니잖아요. 남자들이 길에서 예쁜 여자 보면 눈 돌아가는 것처럼 여자들도 그래요. (웃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복잡한 건데,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 매여 살아가다 보니 그 선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뿐이죠.” 세 부부의 얽히고설킨 관계가 자칫 ‘막장’으로 치닫지 않고 각자의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던 작가의 내공은 이어진 한 마디에서 그 바탕을 짐작하게 한다. “저도 그렇고 주변 친구들도 그렇고 우리 애 유아원 엄마들도 그렇거든요.” 가냘픈 외모와는 달리 그는 벌써 다섯 살짜리 딸을 둔 엄마다.

어릴 때부터 드라마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앉은뱅이 밥상에서 밥을 먹다가 TV에 빠져서 상을 엎는 바람에 마당으로 쫓겨나 손들고 벌을 섰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MBC <파일럿> 마지막 회를 보기 위해 5교시부터 꾀병을 부려 기어코 야간자율학습을 빠지고 집에 돌아왔던” 소녀의 꿈은 물론 아주 오래 전부터 방송작가였다. ‘당연하게’ 국문과에 들어가고 졸업 전부터 교양 프로그램 구성작가로 방송 일을 시작한 뒤 10여 년 동안 시트콤과 단막극을 거친 끝에 올 상반기 가장 인상적이었던 드라마를 탄생시킨 박지은 작가가 특별히 꼽은 세 편의 드라마는 다음과 같다.

MBC <사랑이 뭐길래>
1991년, 극본 김수현, 연출 박철
“어릴 때도 재밌게 봤는데 마침 하희라 씨가 연기한 주인공 이름이 ‘박지은’이어서 더 기억이 나요. 얼마 전 도서관에 갔다가 <사랑이 뭐길래> 대본집이 있어서 잠깐 집어 들었는데 놓을 수가 없더라구요. 제가 작가가 되어 보니 대사 한 줄 쓰는 게 어렵고, 시간 안에 끝내는 것조차 어려운데 이 작품은 방송극 대본이 그 자체로 문학처럼 읽힐 수 있고 감동을 준다는 걸 새삼 느꼈어요. 그리고 그렇게 오래된 작품인데 극 중에서 김혜자 씨가 연기한 엄마가 자식들에게 ‘애 안 봐주겠다’고 선언하는 내용이 있어요. 그 때만 해도 친정 엄마가 아이 봐 주는 게 당연한 거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익숙한 가족극 안에서도 그렇게 한 발짝씩 앞서 가는 생각이 낡지 않은 이야기로 시청자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日 <하늘에서 내리는 1억 개의 별> 후지 TV
2002년

“연애나 일이나 취미나, 뭔가에 한 번 빠지면 정말 푸욱 빠지는 성격이에요. <하늘에서 내리는 1억 개의 별>을 보기 전까지는 사실 기무라 타쿠야가 왜 그렇게 인기 있는지 몰랐는데 이걸 보고 완전히 풍덩 빠져서 그 뒤로 두 달 동안 그의 모든 출연작을 다 봤어요. (웃음) 기무라 타쿠야가 연기한 주인공은 악인인데도 너무 매력 있어서 어느 순간 이 ‘나쁜 남자’에게 동화되고 있는 나 자신을 느끼게 됐죠. 비극적인 엔딩도 잊을 수 없어요. 기본적으로는 코미디를 좋아하는데 이 작품이나 KBS <미안하다 사랑한다>나 SBS <발리에서 생긴 일>처럼 처절한 비극으로 끝나는 드라마들은 유독 마음에 남아요.”

MBC <옥탑방 고양이>
2003년, 극본 민효정 구선경, 연출 김사현

“당시 한창 연애를 하던 남자와 헤어진 상황이었는데 그래서 더 가슴에 와 닿았던 것 같아요. 요즘에는 청춘물이 별로 없는데 <옥탑방 고양이>는 칙칙하지 않으면서도 요즘 세상과 현실에 발 딛은 청춘물이랄까, ‘동거’라는 아이템이 화제가 되었지만 그보다는 두 주인공의 캐릭터나 맑고 담백한 감정들이 느껴지는 디테일이 좋았어요. 얼마나 좋아했냐면 방송 한 시간 전부터 대기하고 기다리다가 봤고, 최근에도 한 번 다시 봤어요. 아, 그리고 그 때 헤어졌던 애인과는 두 달 뒤에 다시 만나서 그 다음 해에 결혼했어요. (웃음)”

“오여사가 매준 붉은 색 넥타이, 방송되지 못해서 아쉬워요”

“다행히 고동선 감독이 드라마의 기조와 코드를 너무나 잘 이해해줬고 연기자들도 정말 최고의 모습을 보여줘서 매번 내가 썼던 것 이상으로 재미있게 나왔다”고 이번 작업을 즐겁게 회상하는 박지은 작가는 <내조의 여왕>으로 가장 주목받는 드라마 작가의 대열에 들어섰지만 그의 일상은 크게 변한 게 없다. “어떤 작가들은 작품 끝나면 멋있게 세계 여행도 가고 그런다는데, 저희 애가 밤에 저 없으면 잠을 못자서요. 유치원도 보내야 되고. (웃음)” 달수가 회사에서 자리를 잡고 나서도 자신이 디자인한 가방을 팔러 다니고 장을 보던 천지애와 흡사한 일상이다.

그리고 마지막 회, 평생 몸 담았던 회사에서 나오게 되며 자살을 생각하던 김 이사(김창완)와 오여사(나영희) 부부의 비하인드 스토리, 분량이 넘쳐 편집된 장면에 대해 그가 살짝 귀띔했다. “다음날 아침,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김 이사에게 오여사가 화려한 붉은 색 넥타이를 매줘요. 밤새 울고 난 얼굴인데 웃으면서, 당신이 30년간 출근했던 직장에 나가는 마지막 날인데 레드카펫은 못 깔아줄 망정 이런 넥타이를 못 맬 이유가 뭐가 있냐고 말하는 장면이 시간 관계로 아쉽게 방송되지 못했어요. 현장에서도 정말 반응이 좋았다던데, 무삭제판 DVD가 나온다면 그런 장면들을 꼭 다시 넣고 싶어요.”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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