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정치인 다음으로 신뢰 받지 못하고 악플의 공격을 받는 직업이 있다면 기자 혹은 비평가 정도가 아닐까. 많은 사람들은 비평가를 쓸데없이 어려운 표현이나 쓰는 족속, 혹은 능력이 없어 남의 작품이나 ‘까며’ 소일하는 족속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어떤 텍스트에 대한 평론이든지 가장 많이 달리는 악플은 ‘그렇게 잘났으면 네가 만들어’다. 하지만 적어도 ‘성실히’ 비평의 펜을 휘두른 비평가라면 억울함을 호소할 것이다. 어떤 예술작품이 위대해질 수 있는 건 예술품 자체의 빛나는 후광 때문이 아닌, 사람들이 그 예술품을 위대하게 받아들이는 감상 덕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든, 시든, 그림이든 그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오브제일 뿐이다. 그것들은 누군가의 해석을 통해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물론 비평가의 해석이 특권적 지위를 누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몇몇 비평가들의 성실한 선례 덕에 일반인들이 작품을 보고 의미를 파악하는 해석의 지평이 넓고 깊어진 건 사실이다.

3월 12일부터 일민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비평의 지평 The Scene of Criticism’展은 그런 면에서 주목할 만한 전시다. 이 전시에선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반이정, 스타일리시한 글로 유명한 임근준(aka 이정우), 박수근의 ‘빨래터’ 위작의혹 제기로 더 유명한 류병학 등 한국에서 가장 ‘핫’한 미술 비평가들이 자신의 일상이나 학문적 토대, 혹은 자신이 직접 작업한 작품을 공개해 전시제목 그대로 자신들이 쓰는 비평의 지평을 드러낸다. 자신의 블로그나 <씨네21> 등에 기고하던 글처럼 위트 있는 반이정의 공간 작업부터 전시를 위해 다시 활자화된 길고 아카데믹한 비평을 제시한 강수미의 텍스트 작업까지 이들 비평가들의 전시는 그 자체로 개성 넘치는 예술작업이지만, 이 전시가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작품의 의미가 해석을 통한 것이라면 해석 자체도 작품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가령 정성일의 비평이 임권택 작품의 탁월함을 이해하게 하는 중요하거나 필수적인 필터라면 그 필터는 자체로 탁월한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쉽게 낼 순 없겠지만 분명한 건 비평가들이 그저 예술가들에 기생하며 잘난 척 하는 족속만은 아니란 것이다.

<자명한 이치>
2001년│코니 팔멘 지음

문학과 철학을 전공한 저자의 소설답게 화자인 여주인공 역시 철학과 학생이다. 그러니 여러 남자를 만나며 풀어나가는 연애론도 현란하고 현학적이다. 뛰어난 분석력과 화려한 수사로 자신이 경험하는 세상을 글로 풀어내는 그녀가 점성술사, 간질환자, 신부, 물리학자 등의 남자들을 거친 후 가장 열렬한 사랑에 빠지는 대상이 예술가라는 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비평가가 예술가보다 격이 떨어지는 존재라고는 말할 수 없을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글 솜씨로 찬양할 어떤 대상을 찾고, 예술은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존재인 게 사실이다. 소설 속 예술가가 여주인공에게 한 말은 그래서 흥미롭다. ‘이따금 당신 말은 신탁처럼 들려, 마리. 당신이 옳고, 나한테도 맞는 말이란 것은 느끼겠는데, 실은 단 한마디도 이해할 수 없어.’

<비평의 해부>
2000년│노스럽 프라이 지음

심오한 제목에 두께도 만만찮다. 그렇다, 살아가며 한 번도 만나지 않아도 좋을 정통 문학 이론서다. 읽을 생각을 하면 한숨부터 나오고, 책장을 피면 편두통이 시작되는 책이지만 ‘비평가를 기생충으로 혹은 되다 만 예술가로 보는 생각’에 대한 저자의 반론은 제법 흥미로운 편이다. ‘물리학은 자연에 관한 지식의 조직체이지만, 물리학도는 물리학을 배울 뿐 자연을 배우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자연과 똑같이 예술도 그 체계적 연구, 즉 비평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문학을 배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문학에 관해서 배우지만, 우리가 ‘배우다’라는 타동사와 목적어로서 배우는 것은 문학비평인 것이다.’ 쉽게 말해 천문학을 알아야 우주를 이해하듯, 비평이 있어야 예술이란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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