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와 배경이 반드시 드라마의 성격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불륜이 등장하지만 선정적이지 않고, 전쟁을 배경으로 하지만 밝고 명랑한 드라마 <경숙이, 경숙아버지>의 제작 발표회가 1월 15일 KBS 국제회의실에서 있었다. 이 자리에는 한철경 책임프로듀서와 홍석구 감독, 김혜정 작가 등 제작진을 비롯해 출연한 배우 정보석, 심은경, 홍충민, 정성화, 채민희가 참석했다.

풍류는 알지만 가정은 모르는 아버지

<경숙이, 경숙아버지>는 2006년 연극으로 상영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희곡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경숙이라는 소녀를 중심으로 전쟁 통의 궁핍한 생활과 그 와중에서도 피어나는 사랑과 인간미를 그린 원작의 매력을 담기 위해 당초 16부작으로 기획되었던 드라마는 “연극과 달리 긴 분량의 드라마를 끌고 갈 수 있는 장치들이 부족하다”는 제작진의 판단에 따라 4부작으로 줄었다. 그러나 김혜정 작가는 “막상 인물들을 재정비하고, 자료 조사를 통해 디테일을 첨가하다 보니 주어진 시간이 부족했다”고 속내를 털어 놓았다. 그렇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고르고 골라 만든 드라마는 설 연휴 동안 4일에 걸쳐 방송된 예정이었으나 후속 드라마의 제작 문제로 <바람의 나라>가 끝난 후 일주일에 두 번씩, 미니시리즈가 방송되는 시간에 편성되었다. 공들여 만든 제작진은 속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의 장점들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봐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밝혔다. 특히 홍석구 감독은 고성오광대놀이를 재연하거나, 당시 요정의 놀이 문화를 보여주는 장면에 대해 자부심을 나타냈다. 작가와 함께 당시 활동했던 악사를 직접 만나 취재를 할 정도로 자료 조사에 열의를 보였기 때문에 가능한 태도다. 가을부터 시작된 촬영은 4개월여에 걸쳐 경남 합천 등지에서 진행되었으며, 현재 전체 촬영이 마무리된 상태다.

역마살의 화신이자 한량의 표본 재수. 정보석

정보석은 연극 공연으로 바쁜 와중에도 조재수를 연기하기 위해 틈틈이 장구를 배웠다. 그만큼 재수는 장구에 출중한 인물. 그러나 장구와 풍류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 그는 온통 자격미달인 사람이다. 특히 가끔씩 찾아 들어가는 집에서 그는 무책임하고 뻔뻔한 태도로 온 가족의 원망을 듣는 인물이다. 심지어 자신이 없는 사이에 다른 남자가 집에 들어와 가족들을 부양하고 있어도 화를 내기는커녕 책임을 덜어서 내심 기뻐할 정도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보란 듯이 기생을 함께 데리고 들어온다. “나쁜 남자로 보이겠지만, 사실 당시 아버지들의 모습을 충실히 재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 전체에 미운 사람이 없다. 결국 재수도 마지막에는 철이 든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경숙이의 이해와 용서를 받는다.”

속 깊은 천방지축 말괄량이 경숙. 심은경

홍석구 감독은 “OK 사인이 나더라도 꼭 재촬영을 요구하는 집요한 배우”라고 심은경을 칭찬했다. 경숙의 천진한 모습을 위해 더 어린 배우를 원했지만 단막이 아닌 4부작을 이끌어 나가는 주인공으로서 심은경의 연기력을 높이 사 캐스팅을 결정 했다고. 김혜정 작가 또한 “키는 크지만 눈에 철들지 않은 순수함이 드러난다. 아역의 관건은 덩치가 아니라 순수함”이라는 이유로 역시 심은경에게 경숙 역을 낙점했다. 바깥으로만 도는 아버지와 억척스러운 어머니, 불평이 많은 할머니 사이에서 알아서 자라고 철이 드는 경숙은 객식구로 들어온 남식의 따뜻함에 그가 진짜 아버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미워하는 아버지를 정작 외면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갈등을 하기도 한다. “사투리로 연기를 한다기에 꼭 하고 싶었던 작품이다. 새로운 연기에 도전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다음에 하고 싶은 역할은 무술을 하는 사극이다.”

과묵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진 남자 남식. 정성화

신의주 출신의 남식은 혈혈단신 부산으로 피난을 간다. 우연히 만난 재수와 실랑이를 벌이던 그는 재수와 함께 전장에 끌려가는 신세가 된다. 그 와중에 재수는 남식이 모아둔 돈을 들고 도망을 가고, 남식은 하는 수 없이 재수의 집을 찾아가 돈을 요구한다. 그러나 재수의 생사조차 모르는 가족들은 오히려 남식의 도움이 필요할 지경이고, 무뚝뚝하지만 누구보다 착한 남자 남식은 재수의 가족들을 먹여 살리며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한다. 그리고 운명처럼, 그는 재수의 아내와 사랑에 빠진다. “아마 드라마가 방송되고 나면 내 인기가 아주 많이 올라갈 것 같다. 성실하고 근면한 것은 물론이고, 남식은 토종형 로맨티스트다. 휴머니즘을 바탕에 하고 있으면서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무엇이든 하는 사람이다.”

운명에 순응하지만, 운명을 거스르는 사랑에 빠지는 경숙모. 홍충민

남편은 무책임하게 밖을 떠돌며 제 멋에 취해 살고, 시아버지의 첩이었던 여자는 시어머니랍시고 매사에 잔소리다. 누구하나 자신을 살펴주지 않는데, 본인이 돌봐야 할 가족은 많으니 그녀의 인생은 그 옛날 어머니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에게 받을 돈이 있다고 들이닥친 남식은 오히려 그녀를 불쌍히 여기고, 심지어 그녀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준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사랑과 배려에 그만 아이까지 갖게 된 그녀는 남편 몰래 가족을 데리고 도망을 가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남편을 끝내 그녀를 찾아낸다. “사극으로 데뷔했지만 시대극을 경험한 적은 없었다. 더구나 전작의 요란스러움을 버리고 차분한 어머니를 연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현장의 따뜻함으로 항상 즐거웠다.”

관전포인트
정보석은 <경숙이, 경숙아버지>의 장점에 대해 “모든 가족들이 다 함께 볼 수 있는 고향 같은 이야기”라고 말했다. 고등학생들이 납치와 폭행을 사주하거나, 죽은 아내가 살아 돌아와 남편을 유혹하거나, 조직 폭력배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들을 자녀와 함께 볼 자신이 없던 분들이 특히 반길 일이다. 더구나 “어린이들이 봐도 무방한 수위는 물론이고, 어르신들은 과거를 추억하면서 손녀들에게 설명을 해 주실 수도 있다. 그리고 모든 인물이 귀엽고 코믹하다”는 홍충민의 이야기를 들으면 간만에 건강한 유기농 드라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가 든다. 그러나 그런 기대가 커질수록 아무래도 설날 특집극으로서 제격이라는 아쉬운 마음 또한 커지는 것도 사실이다. 편성의 굴욕을 극복하고 <경숙이, 경숙아버지>가 짧지만 강한 한방을 날릴 수 있을지 결과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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