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는 눈 속에 피어 추위에 떨고 어미는 어려서 되어 이별에 우네”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가 무엇이었냐는 말에 정일우는 이 한 줄의 시로 답했다. 그것은 MBC <돌아온 일지매>에서 자신을 낳자마자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생모 백매(정혜영)가 아들에게 유일하게 남긴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태어나자마자 혼자가 된 일지매는 춥고 외롭다. 양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자신의 진짜 뿌리를 찾기 위해 그들을 떠났고, 천릿길을 달려와서 찾은 생부는 그를 부정한다. 생모와는 엇갈림 속에 만나지 못하고, 첫사랑은 영글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다. 수많은 여인들이 그를 원하지만 일지매가 편히 쉴 품은 월희(윤진서) 하나뿐이고 세상 어디든 조용히 발붙이고 살아보려 해도 운명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그는 세상의 수많은 악과 홀로 싸우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를 영웅이라 부르며 칭송하지만 일지매는 여전히 외롭다. 다른 누구와도 손잡지 못하고 혼자 가야 하는 길, 영웅으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영웅으로 자라게 된 인간의 운명은 그런 법이다.

‘스타의 시간’을 통과해 온 청춘

그리고 현대에 배우의, 스타의 운명은 영웅과 닮아 있다. 대중으로부터 사랑받지만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내보이기는 어렵다. 부와 명예를 누리는 대신 끊임없이 사적 영역을 침범당하고 선망과 찬사를 듣지만 끊임없는 불안과 고독에 시달린다. 어린 나이라고 해서 그 짐의 무게가 덜한 것은 결코 아니다. <돌아온 일지매>에서 일지매를 연기하는 정일우가 바로 그 ‘스타의 시간’을 통과해 온 젊은 배우라는 사실은 그래서 흥미로운 부분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정일우는 MBC <거침없이 하이킥>(이하 <하이킥>)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그가 연기한 윤호는 학교 성적이 바닥을 기고 “회자정리”를 “혜자존니”로 받아쓰며 끙끙대는 사고뭉치 고등학생이었지만 직선적인 캐릭터와 해사한 외모를 갖춘 정일우는 시트콤 사상 최고의 청춘스타로 떠올랐다. <하이킥>에서 윤호가 자신의 삼촌을 좋아하는 학교 선생님을 짝사랑한다는 다소 센 설정이 힘을 얻어 끝까지 갈 수 있었던 것도 ‘꽃남 신드롬’ 이전에 ‘킥윤호 신드롬’이 있었다고 할 만큼 여성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의 매력 덕분이었다. 갓 스무 살이 된 이 풋풋한 청춘의 시간은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곧게 자란 이 청년, 여전히 자라고 있다

하지만 2007년 여름, <하이킥>이 끝난 뒤 정일우는 거짓말처럼 대중 앞에서 사라졌다. 그 해 겨울 옴니버스 로맨스 영화 <내 사랑>의 주인공 가운데 하나로 출연했지만 ‘킥윤호’ 시절의 반짝거림을 기억하고 기대하는 이들은 과도기에 선 그의 변신을 아쉬워했다. 그리고 1년이 훌쩍 더 흘렀다. 윤호도, 정일우도 서서히 잊히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그는 조급해 하는 대신 공들여 작품을 준비했다. 이윤정 감독의 <트리플>에 쇼트트랙 선수 역으로 잠정 캐스팅되자 4개월간 꼬박 빙판에 올랐고, 결국 <트리플> 대신 <돌아온 일지매>에 출연하게 되면서는 반 년이 넘는 사전제작 기간을 견뎌 냈다. “어린 나이에 갑자기 유명해져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인기가 있다가 그 거품이 사그라드는 걸 자기가 경험해 봤다는 게 마음에 들어” 정일우를 캐스팅했다는 황인뢰 감독은 젊은 배우들의 연기를 엄격하게 가르치기로 유명했지만 <하이킥> 시절부터 대본 표지가 닳도록 대사를 외우고 이순재, 나문희 등 선배들에게 먼저 찾아가 연기를 배우던 성실함으로 정일우는 마침내 일지매가 되었다.

그리고 “<돌아온 일지매>는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지매의 성장기”라고 해석하는 그의 말처럼 이 작품은 스타였던 시간을 조심히 지나고 스타의 자리에서 내려와 있던 시간을 충실하게 보낸 한 젊은 배우의 성장 드라마이기도 하다. 전반부 동안 자신의 정체성을, 부모를, 사랑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불안해하던 일지매는 후반부에 접어들며 영웅으로서의 면모와 고수다운 여유를 갖추게 된다. 그와 함께 오랜 촬영 기간을 지나며 조금씩 깊어진 눈빛과 목소리를 느끼게 되는 것은 이 작품을 보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그래서 ‘킥윤호’가 그의 빛나는 과거였지만 그로 인해 정일우의 현재가 빛바래 보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반가운 일이다. 게다가 정일우는 아직 스물 셋, 망가지지도 비뚤어지지도 않고 곧게 자란 이 청년은 여전히 청춘의 한가운데에 있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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