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윤준필 기자]
이범수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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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수는 처음부터 스타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단역도 상관없었다. 그저 연기를 할 수 있는 기회만 생긴다면 어떤 역할이라도 좋았다. 그는 “작은 배역은 없지만 대접받는 배역은 있다”는 생각으로 연기 열정을 불태웠다. 자신이 해낼 수 있는 사소한 목표를 하나씩 달성하며 전진했다. 이범수는 신인 때 상상해본 적 없던 큰 무대에 올랐고, 그의 연기에 열광하는 팬들도 많아졌다. 지난 25년 동안 뜨겁게 노력한 결과였다.

이범수는 지난 12일 종영한 종합편성채널 JTBC ‘라스트’에서 서울역 지하경제를 주름잡고 있는 곽흥삼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그가 ‘라스트’에서 보여준 곽흥삼이란 악역은 영화 ‘짝패’, ‘신의 한 수’에서 보여줬던 모습과 달랐다. 이범수는 자신의 연기에 ‘캐릭터의 역사’가 묻어나길 원했다. 맡은 캐릭터가 자라온 환경, 겪은 경험, 하고 있는 생각들이 이범수를 통해 표현되길 원했다. 그렇게 이범수는 서울역 밑바닥에서부터 최종보스까지 올라온 곽흥삼의 카리스마, 승부욕, 비열함, 알 수 없는 속내 등을 디테일하게 그려냈다.

카메라 앞에서는 명연기를 쏟아내는 배우지만, 인터뷰에 나선 이범수는 질문이 끝날 때마다 짧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연기와 관련된 자신의 생각을 조금 더 정확하게 전달되길 바라는 모습이었다. 이범수는 “좋은 책 한 권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것처럼 좋은 드라마, 좋은 연기가 어떤 시청자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드라마 제작 환경과 관련된 쓴 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을 비롯한 배우들이 좋은 연기를 할 수 있기 위함인 것이다. 데뷔 25년차 배우 이범수의 연기를 향한 열정과 애정은 여전히 뜨겁다.

Q. 일부러 ‘라스트’의 원작 웹툰을 보지 않았다고 들었다. 이제 드라마도 끝났는데 원작을 한 번 봐야하지 않을까? (웃음)
이범수: 조만간 한 번 볼 생각이다. 원래 만화를 좋아한다. ‘라스트’도 워낙 유명했던 웹툰이라고 하니까 이제 한 번 여유를 가지고 볼 생각이다.

Q. 곽흥삼을 준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궁금하다.
이범수: MBC ‘닥터 진’에서는 흥선대원군을 공부하기 위해 다양한 책을 많이 읽었다. SBS ‘외과의사 봉달희’를 했을 때는 외과의사가 돼야했으니까 직접 병원에 가서 의사들은 어떻게 일을 하는지 관찰했다. 그런데 ‘라스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곽흥삼이 추레한 노숙자라면 노숙자들을 만나러 서울역에 갔을 텐데 그는 서울역 지하경제를 주름잡는 넘버원 아닌가. 살인마 역할을 맡은 배우가 살인을 체험할 수 없는 것처럼 서울역 지하세계 넘버원을 체험할 방법이 없으니까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했다. 감독님과 작가님도 각색을 많이 해서 굳이 원작을 안 봐도 된다고 말씀해주셨다.

Q. 이범수의 상상력으로 빚어낸 곽흥삼은 어떤 인물인가?
이범수: 곽흥삼은 부모의 죽음으로 고아가 되고 어린 나이에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거기서부터 바득바득 기어 올라와 결국에는 서울역 정상을 차지한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진흙탕 싸움이 있었을지 생각했다. 곽흥삼의 행동에 그의 역사가 담겨있었으면 했다. 아마 곽흥삼은 무조건 이기고 살아남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던 인물이라 비겁하고 야비한 짓도 많이 했을 것이고, 엄청나게 자잘한 싸움들도 많이 하지 않았을까. 그런 역사가 느껴질 수 있게 대사를 할 때도 최대한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Q. 영화 ‘짝패’, ‘신의 한 수’ 등에서도 인상 깊은 악역을 연기했었다. 곽흥삼은 이들과 또 다른 느낌의 악역인데?
이범수: ‘신의 한 수’의 살수가 개인플레이에 능한 소리 없는 칼잡이로 자라온 인물이라면 곽흥삼은 진흙탕에서 구르면서 밑바닥부터 큰 잔뼈가 꽤 굵은 인물이다. 넉살도 좋고. 당연히 그 캐릭터가 살아온 역사가 다른데 배우로서 그걸 보여주지 못하고 “살수랑 똑같네” 이런 소리를 들으면 안 되지 않을까.

Q. ‘라스트’ 곽흥삼을 상징할 만한 대사가 있다면 무엇일까?
이범수: 곽흥삼이 1회에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 클럽에서 개판을 벌이고 싸우는 중간 보스들에게 “젠틀하게 살자”고 다그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이게 본인을 포함해서 젠틀하지 못하게 사는 사람들한테 하는 말이다. 자신들이 젠틀하지 않다는 것도, 젠틀해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 말이 곽흥삼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사인 것 같다.

Q.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다면?
이범수: 마지막 회에서 했던 “후회하는 것 없냐”는 장태호의 질문에 “후회하는 것 없다. 내가 하지 못한 것들이 후회될 뿐”이라고 말하는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이범수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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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명색이 정통액션 드라마인데 곽흥삼의 액션은 중반 이후에 접어들어야 나왔다. 몸이 좀 근질근질하진 않았나?
이범수: ‘라스트’가 남자들의 거친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니까 드라마 시작 전부터 액션 신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초반에 액션을 보여줄 기회가 없어서 조금 아쉽긴 했다. 스태프들은 나보고 “서열 1위가 벌써부터 싸울 생각이냐”며 “중후반부터 싸우니까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니 더 기대가 되더라. 얼마나 멋있게 나올까 궁금하기도 했고.

Q. 7회 펜트하우스 액션 신은 영화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멋있던 장면이었다. 그 신에서도 디테일한 부분을 살리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고 들었다.
이범수: 그 신을 찍기 전에 모여서 회의를 했었는데 곽흥삼이 제일 잘 싸우는 사람이니 제일 적게 다쳤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그 때 내가 아니라고 했다. 정사장(이도경) 패거리가 죽이러 온 사람은 곽흥삼 하나인데 맞아도 내가 더 많이 맞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그래서 실핏줄도 터진 것처럼 눈에 색소도 넣고, 피도 더 많이 묻히라고 했다. 연출부가 좀 놀라는 눈치였다. 내가 몸을 좀 사릴 줄 알았던 모양이다. (웃음)

Q. 제작발표회나 기자간담회에서 종합편성채널의 제작시스템을 칭찬했었다.
이범수: ‘라스트’처럼 새로운 장르의 드라마에 모험을 하고, 한 번 촬영에 카메라 3대를 동시에 돌리는 등 투자도 과감하게 하는 일련의 시도들이 좋아보였다. 반면 지상파 일부 드라마 관계자들한테는 아쉬웠던 것이 있다. 물론, 지상파니까 여러 이유로 ‘라스트’ 같은 드라마에 투자하지 못할 수 있다.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자신들이 지상파에 대한 프라이드가 있고 당당함이 있다면 그만큼 어른스럽게 행동을 해야 하지 않을까. 더 좋은 드라마가 나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는 사람들을 칭찬해주지 못할망정 종편, 케이블 드라마라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다던데 그런 것은 좀 사라졌으면 좋겠다.

Q. 사전제작 시스템이 정착되어야 한다고도 말했었다. 사전제작이 많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자세히 듣고 싶다.
이범수: 나는 드라마 제작 환경이 발전했으면 좋겠다.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이 당당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쪽대본, 막장드라마 부정적이라는 것을 누구나 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준비 기간이 짧기 때문이라고 한다. 있어서는 안 될 말이다. 미리 완제품을 만들어 둘 자신감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시청자 의견을 반영하려고 한다’는 말을 하던데 그 말도 웃기다. 예를 들어 대본을 4회까지 쓰고, 5회부터는 시청자 의견을 반영했다면 모든 드라마의 시청률이 100%가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좋게 표현해서 반영이지, 자기가 원래 그리려고 했던 이야기에 시청자 의견을 반영하면 그걸 자신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나? 의견을 참고하는 거랑 의견에 좌지우지 흔들리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고 본다. 영화판을 봐라. 시나리오 작가는 관객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았는데 천만 관객을 동원한다. 이건 습관이다. 습관을 고쳐야 한다.

Q. ‘라스트’를 같이 찍었던 동료 중에서 인상 깊었던 배우가 있다면?
이범수: 사마귀 역의 김형규. 그 친구는 우리가 농담으로 리액션만 한 100개 찍고 집에 보내자고 말했었다. (웃음) 사마귀는 대사 없이 표정과 눈빛으로만 말을 해야 하는 역할이었다. 대사라는 장치가 없으니까 느낌을 전달하기 쉽지가 않았을 텐데 잘한다. 대사가 주어지면 시원시원하게 또 하니까 보기 좋았다. 현장에서 집중도 잘하고, 기대가 되는 배우다.

Q. 참 다양한 색깔의 연기를 한다. 코미디를 주로 하다가 한동안 멜로를 찍고, 최근에는 또 악역을 자주 하는 느낌이다. 이제 다음엔 어떤 캐릭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범수: 코미디 연기를 보고 싶어 하는 팬들도 많고,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원하는 분들도 계신다. 더 나이가 먹기 전에 그런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도 해보고 싶은데 사실 그때그때 끌리는 작품이 있을 때마다 결정하는 거라 다음엔 어떤 모습을 보여드릴지 나도 잘 모르겠다. (웃음)

Q. 선한 역과 악역, 어떤 연기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는 그야말로 ‘믿고 보는 배우’다. 이범수만의 노하우가 있을까?
이범수: 오래 전부터 배우는 어떤 고정된 이미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인물에 따라 분하는 직업이라 생각해왔다. 얼마 전에 배우 이시언이 연기변신을 잘해서 날 롤모델이라고 말했던데, 좋게 봐줘서 고맙더라.
이범수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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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엔터테인먼트 사업에도 뛰어들어 소속사에서 연기자 후배들을 양성하고 있다. 소속사 이름인 테스피스는 무슨 뜻인가?
이범수: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배우가 테스피스다. 연기를 전공하던 학창시절부터 의미 있게 생각했던 인물이다. 우리 소속사가 배우들이 모인 곳으로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고, 어디로 향해 갈 것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Q.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뛰어들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이범수: 내가 배우지만, ‘배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란 질문을 받으면 막막하다. ‘배우’란 직업이 전문 분야이고 특수한 분야인데 배우가 되겠다는 사람들을 이끌어 줄 가이드가 없으니 참 아쉬웠다. 나도 연극영화과를 나왔지만 잘 모르겠더라. 전국에 76개의 연극영화 관련 학과가 있는데, 거기 나온다고 배우가 된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얼마 전에는 연영과 학생들이 학교를 휴학하고 연기 학원을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슬프고 화가 났다. 그런 후배들을 위해서 어디 한 구석에서라도 배우를 책임감 있게 양성하고, 현장에 등용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회사를 만들어야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꼭 이루고 싶다.

Q. 제대로 된 배우 소속사를 만들고 싶은 진심이 느껴진다.
이범수: 연기자가 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많지만 높은 곳으로 올라갈 확률은 희박하다. 정도가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방송국 공채라는 신인 등용문이 있어서 드라마든 영화든 신인들이 경험을 쌓고, 더 좋은 연기자가 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이 없어졌다. 음반기획사에서 연습생을 두는 것처럼 배우도 그런 시스템을 갖춰야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감히 해보려고 한다.

Q. 벌써 25년 차 배우다. 배우 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이범수: 내가 연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연기야말로 인간을 탐구할 수 있는 최고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연기에는 인간의 욕망, 꿈, 희노애락, 흥망성쇠 등 이 담겨 있다. 난 그게 무척 흥미롭고, 연기를 대하는 태도가 절로 진지해진다. 좋은 문학 책이 한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듯이 좋은 영화가, 또 좋은 대사 한 마디가, 어떤 배우의 좋은 연기 하나가 그것을 보는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에서 자긍심을 느끼며 지금까지 배우 생활을 해왔던 것 같다.

Q. ‘라스트’ 곽흥삼은 서울역 옥상에 올라 자신의 사업이 번성하는 상상을 했다. 배우 이범수는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범수: 이제 막 시작한 엔터 사업이 초심을 잃지 않고 잘 됐으면 좋겠다. 내가 무명인 시절에 연기에 대한 갈증이 심했기 때문에 지금 어떻게 배우가 되는지 몰라 방황하는 후배들에게 배우가 될 수 있는 발판을 만들고 싶다. 좋은 배우들이 우리 회사를 통해 배출되는 것이 내가 그리는 청사진이다. 물론 나 역시 배우로서 더더욱 어른스러운 행보를 걸어갈 것이다. 나중에 고민을 해야 할 부분이긴 하지만 영화 제작이든 연출이든 투자든, 그런 방향으로 사업이 커질 수도 있다. 어떤 선택을 하든 혈기왕성하게 임하겠다. 내 다음 행보가 나도 궁금하고 기대된다. 굉장히 흥미로울 것 같다.

Q. 앞으로 또 난 어떤 연기를 하게 될 것인가를 기대하는 것 같다. 40대를 넘어 50대, 60대가 되면 맡을 수 있는 역할들이 또 달라져서 그런 것일까.
이범수: 이제야 연기를 알 것 같다. 비유하자면, 그동안 나는 파도가 오면 오는 대로 파도에 넘어지지 않고 서핑보드 위에서 균형을 맞추는 데 집중했었다. 이제는 먼저 파도를 즐기기 시작했다. 경험이 쌓이고 연륜이 생긴 거다. 이제야 파도를 타는 맛을 알았는데 좀 더 타 봐야하지 않을까. (웃음) 새로운 캐릭터가 됐든, 새로운 장르가 됐든 항상 새로운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고민할 것이다. ‘다음에 뭘 보여주지’ 걱정하는 순간이 오지 않도록.

윤준필 기자 yoon@
사진. 구혜정 기사 photo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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