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윤준필 기자]
이도경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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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생조사야. 킹이모 사는 기고, 조커 뽑으면 죽어요. 너거 두 마리.” 사채업자 정만출의 ‘킹생조사’는 종합편성채널 JTBC ‘라스트’의 시작을 알리는 대사였다. 언제나 깔끔한 정장차림의 백발 노신사 정만출 사장은 매회 주인공 장태호(윤계상)와 곽흥삼(이범수)을 위협하는 인물이었다. 장태호가 그와 엮일 때마다 시청자들은 항상 손에 땀을 쥐었다. 정 사장은 장태호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 사채업자였지만 그는 손녀에겐 인자한 할아버지였고, 거대한 돈이 오고가는 사업에서는 굽실거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기회주의자였다. 곽흥삼의 심복 사마귀(김형규)에게 붙잡혔을 때는 그저 힘없는 늙은이에 불과했다.

배우 이도경은 근엄한 아버지도 손주 앞에선 장난꾸러기가 되는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라스트’의 정만출 사장, 한 사람에게서 다양한 캐릭터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그의 연기 철학이 반영된 결과다. 사람이란 어떤 존재일까 항상 고민하기 때문에 이도경의 연기에서는 언제나 멋스러움이 느껴진다. 40년 가까이 지칠 줄 모르고 연기를 해왔던 배우 이도경. 잠시 연극 무대를 떠나 TV와 스크린을 통해서 삶을 표현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Q. 오랫동안 연극 무대만 고집하시다가 최근 몇 년 사이에 드라마와 영화에 많이 출연하고 있다.
이도경: 내가 연극 ‘용띠 위 개띠’, ‘불 좀 꺼주세요’ 이 두 작품만 십 몇 년을 했다. 한 17~8년 했나? 그랬던 이유가 연극이 재미있고, 수입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굳이 영화나 TV에 출연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진짜 맛있는 작품이 나타나면 해야지’하고 골라먹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골랐던 작품이 ‘와일드카드’였고. 그런데 그 다음부턴 입맛대로 안 되더라. (웃음) 그리고 영원히 연극을 할 수 있나. 대학로가 전체적으로 침체기인데. 그래서 잠시 연극은 접어두고 드라마랑 영화를 하고 있다. 이제는 웬만하면 다 한다. 날 필요하고, 내가 좋다는데 그냥 가서 웃고 즐기고 하는 거지.

Q. ‘라스트’는 원작 만화가 있는 드라마다. 혹시 원작 ‘라스트’에서 정사장은 어떤 캐릭터인지 봤나?
이도경: 원작은 일부러 안 봤다. 원작을 참고하게 되면 내 스스로 캐릭터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원작에 의해 캐릭터를 해석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가이드라인이 생겨서 상상력을 발휘하기가 힘들다. 내가 골프를 좋아하는데, 주변 사람한테 골프를 가르쳐주면 그 사람이 오히려 더 못하더라. 각자의 스타일이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내 스타일을 강요하면 골프를 잘 칠 수 있는 사람도 못친다.

Q. 이번에 정사장을 해석할 때 중점을 뒀던 부분은 무엇인가?
이도경: 나는 ‘악역이 미워선 안 된다’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악역들은 항상 욕을 먹는데 그 이미지가 한참을 간다. 완전히 대중들에게 나쁜 놈으로 찍히는 거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조금 비틀어봤다. 밉지 않은 악역이 되자. 이번에 정사장한테도 휴머니즘이 느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준비를 했었다.

Q. 정 사장하면 1화에서 장태호(윤계상)와 그의 선배를 붙잡고 “킹생조사야. 킹이모 사는 기고 조커를 뽑으면 죽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빼놓을 수 없다. 조커를 쪼카라고 말하는 등 경상도 사투리가 참 맛있게 들렸는데 일부러 더 맛깔나게 표현하려고 사투리 억양을 살린 거였나?
이도경: 아니, 대본에 아예 그렇게 쓰여 있었다. 내 생각엔 처음부터 날 생각해서 대본을 쓴 것 같다. (웃음)

Q. 장태호의 함정에 꼼짝없이 걸려들어 150억을 날린 것을 알았을 때 정사장 모습이 기억난다. “아이고, 내 돈”하는데 내가 다 딱하더라.
이도경: 그런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다. 보통 시청자들은 윤계상, 이범수를 응원하지 나쁜 놈들은 얼른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다. 팬들은 내편이 아니라서 내가 죽으면 박수를 친다니까. (웃음) 난 내가 죽고 난 뒤에도 사람들이 박수 안 치고, “안됐어~” 이런 얘기가 나오게 하고 싶었다.

Q. 1회에서 장태호를 죽이라고 명령했던 정사장과 도망치려다 공항 앞에서 곽흥삼의 측근인 사마귀에게 붙잡힌 정사장은 완전히 딴 사람이었다. 마지막에 주차장에 주저앉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정사장은 그야말로 힘없는 노인의 느낌이었다.
이도경: 똑같은 인간이지 않나. 이제 곧 죽임을 당한다고 하면 그 상황에서 누구나 그럴 거다. 극단 후배 연기자들이랑 얘기할 때 항상 ‘왜 배우들은 캐릭터 성격을 딱 하나로만 잡아서 모든 순간에 그 하나의 연기 톤으로 하냐’고 묻는다. 사람은 다중성을 띠고 있다. 사람이 배고플 때, 죽기 직전에, 애인이 옆에 있을 때 말투와 행동이 모두 다르다. 한 번은 목욕탕에 갔는데 인텔리 두 명이 알몸으로 아주 진지한 사업 얘기를 하고 있었다. 전혀 웃긴 모습이 아니다. 우리 사는 세상에서는 그런 상황에서도 진지한 이야기가 가능하거든. 그런데 극중에서 진지한 사업 이야기를 할 때는 목에 힘주고 근엄하게만 하려고 한다. 난 이건 아니라고 본다. 모두 다른 사람들인데 어떻게 벽돌 찍히듯이 다 똑같이 나오는가. 이런 걸 깨는 것이 배우로서 숙제다. 후배들한테도 항상 고정관념을 갖지 말라고 얘기하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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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동안의 작품에서도 인물 그 자체란 평가를 많이 받아 왔다.
이도경: 가능하면 진짜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하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언제나 부족하고 아쉽다. 끝나고 나면 ‘이렇게 할 걸’, ‘저렇게 할 걸’. 속으로 혼자 막 나한테 욕한다. (웃음)

Q. 그래도 ‘라스트’에선 나올 때마다 존재감이 상당했는데.
이도경: 흡족한 장면이 하나도 없다. 난 내가 나온 것 못 보겠더라고. 병신 같다. 그래서 항상 TV를 곁눈질해서 본다. 눈이 좀 시리더라. (웃음)

Q. 그래도 잘하니까 작가가 1회 더 출연시킨 것 아닐까? (웃음) (인터뷰 시작 전, 그는 원래 7회까지 출연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작가가 8회까지 살려줬다고 농담 삼아 말했다.)
이도경: 하하. 그게 아니라 찍어 놓은 분량이 많아지니 내가 죽는 장면이 한 회 뒤로 밀린 거지. 뭐, 8회에서 단칼에 죽여 버리던데. (잠시 생각) 이 드라마의 매력이 주저하는 것 없이 바로 해치워버리는 것 같다. 스피디하잖아. 아마 다른 드라마 같았으면 우리 1회 내용만 가지고만 4~5회 분량 나올걸. 극중 전개 속도가 빠르니까 “시원하다”고 한 사람들이 많았다.

Q. 주변에서도 ‘라스트’ 많이 이야기하지 않나?
이도경: 다들 재미있다고 하더라. 영화 같다. 그냥 안방에서 보기 미안하다. 다들 애쓴 것 같다. 이런 얘기들 많이 들었다. 주인공들은 물론이고, 조연들이 참 연기를 잘한다.

Q. 초반 8화까지 윤계상과 이범수를 괴롭히는 악당인데, 정작 정사장에 대한 칭찬은 하나도 못 들은건가? (웃음)
이도경: 하하, 사실 컴맹이라 인터넷에 뭐라고 얘기되는지 잘 모른다. 만나는 사람들이 얘기해주면 그냥 그런가보다 생각하지.

Q. 오랫동안 연극 무대에 올랐던 배우라 카메라 앞에 서는 느낌도 색다를 것 같다.
이도경: 연기하는 건 똑같은데 시스템이 확실히 다르다. 내가 촬영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촬영감독들한테 꾸중도 많이 듣고. (웃음) 그래도 다 끝나면 서로 장난치고 그런다. 재밌다. 드라마보단 영화가 좀 더 재미있지만.

Q. 드라마가 덜 재미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도경: 드라마는 쪽대본 때문에 역할을 연구할 시간이 없어서 힘들다. 그래도 ‘라스트’는 대본 연구할 시간이 충분해서 좋았다. 영화 찍는 것처럼 대본을 오래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드라마에서 쪽대본을 받으면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온다. 불안하니까. 처음에는 너무 어려웠다. 자꾸 수정되고 금방금방 대본이 바뀌어서 나오는데 적응이 잘 안되더라고. 내가 TV는 신인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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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TV 출연작을 보면 항상 젊은 배우들이랑 연기 호흡을 맞췄다.
이도경: ‘구가의서’에선 이승기, ‘더 킹 투하츠’에선 하지원이랑 했었고. 이번엔 윤계상. 난 자꾸 젊은 친구들이랑 붙이더라고. 그래도 같이 하니까 좋던데? (웃음)

Q. 젊은 배우들을 볼 때 어떤가? 연기를 잘하는 것 같나?
이도경: ‘구가의서’ 할 때 수지랑 이승기를 보면서 느낀 것이 있다. 내가 연기를 배운 것이 문제다. 수지나 이승기는 학교에서 이론이나 연기의 기술적인 부분들을 정식으로 배운 친구들이 아닌데 그 친구들이 어떤 부분에선 나보다 훨씬 잘한다고.

Q. 어떤 부분에서 그런가? 수지나 이승기의 연기력이 별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도경: 나는 생각이 다르다. 나 같은 사람들은 어떤 연기를 할 때 수를 아니까 먼저 테크닉을 부릴 생각을 한다. 근데 그 친구들은 연기를 모르기 때문에 그냥 부딪혀서 나오는 순수한 연기를 한다. 그런 건 연습을 해도 잘 안 된다. 난 이번에도 윤계상, 이범수한테 많이 배웠다. 선배라도 후배가 잘하면 보고 배워야지.

Q. ‘라스트’ 윤계상 역시 가수를 하다가 지금은 연기를 하고 있다. 앞서 말한 수지, 이승기와 비슷하다.
이도경: 윤계상도 마찬가지다. 물론 기술적인 측면에서 연기가 세련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심성이나 눈빛, 영혼이 그런 모자란 부분들을 다 이겨낸다. 이번에 윤계상 연기 못한다고 그러는 사람이 있나? 잘한다. 윤계상을 보면 잘하고 싶다는 눈빛이 가득하다. 나는 그런 모습들이 너무 좋다. 연기가 세련되지 않아도 정서가, 마음이, 영혼이 맑으면 되는 거 아닐까? 기계적으로 찍어낸 듯한 영혼 없는 연기는 밉다.

Q. 캐릭터의 성격을 잡는 거라든가 연기 소스들을 찾는 방법이 궁금하다.
이도경: 주변에 잘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 많이 찾는다. 그 사람들의 특징적인 부분들을 좀 극대화해보려고 한다. 재미있게 말하는 사람들을 기억해뒀다가 카피를 좀 한다.

Q. 그런 관찰력들 덕분에 살아있는 캐릭터가 나오는 것일까?
이도경: 에이, 해봤자 그게 그거다. 다들 비슷비슷한 캐릭터들인데 한 번 이래도 보고 저래도 보고 하는 거다. 이 캐릭터는 욕을 좀 덜하고 다른 캐릭터는 욕을 진하게 해보고. (웃음)

Q. 연기의 꿈은 언제부터 키웠나?
이도경: 경주에 신라문화제라고 있다.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 말씀을 듣고 방학에 그곳에 간 적이 있다. 그곳에 가니 미술 선생님이 포졸이 입을 옷을 만들어야 한다고 은박지를 주워오라고 하셨다. 그렇게 연극에 필요한 소품을 만들고, 내가 만든 소품을 입은 사람이 공연 무대에 오르는 걸 봤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무대에 서는 사람 되어야 겠구나’고 생각한 것이 그때부터였다.

Q. 당시 배우가 되겠다고 부모님께 얘기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이도경: 아버지가 굉장히 엄하셨다. 그런 아버지께 감히 어딜 배우가 되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집에 20명이 살았다. 문화예술을 즐기는 건 꿈도 못 꿀 정도로 대가족이었다. 몇 년을 벼르다가 아버지한테 용기를 내서 “연극영화과 가고 싶다” 얘기를 했다. 엄청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도선아!”하고 형님을 부르더니 “이놈 30살 될 때까지 밀어줘라. 최고가 되라”고 말씀하시는데 솔직히 그 때부터 아버지가 좋아졌다. “됐어. 저 방가”라고 말씀하시는데도 일어나지도 못하고 엉엉 울었다.

Q.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이도경: 난 그런 대답이 나올 줄 몰랐거든. 내가 단점이 많다. 어릴 적부터 이마에 깊은 주름살이 하나 있었고, 새치도 엄청 많았다. 그리고 사투리도 심했고, 이도 은니가 있어서 그야말로 배우하기엔 좋은 외모가 아니었다. 그런 나한테 아버지가 한 달에 20만원씩 밀어주겠다고 하시는데. 그때부터 연극이 어쩜 그리 재미있는지. 지쳐도 지친 줄 모르고, 아파도 아픈지 모르겠고. 그 날 이후로 여태껏 연기를 하기 싫다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Q. 얼마나 연극을 좋아했는지 실감이 나질 않는다.
이도경: 내가 얼마나 연극을 좋아했냐면, 고등학생 때 경주에서 밤늦게 청량리 행 열차 타고 서울로 갔다. 새벽에 도착하자마자 남산 밑에 드라마 센터로 가서 신구 선배가 공연하던 걸 봤다. 낮 공연도 보고 저녁 공연도 보고 한 네댓 개 연극을 보고 다시 밤차 타고 경주로 내려갔다. 신구 선배 연기를 보면서 연극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 배고팠다. 포기해야 하는 것도 많았다. 다 알고 연기를 시작했는데, 알면서도 연극이 정말 좋아서 즐겁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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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밀어줘서 엄청 든든했을 것 같다.
이도경: 아버지가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돼지나 키울 줄만 아는 양반인 줄 알았다. 그런데 연극하면 고생하는 걸 다 알고 계시더라. 나는 단점 투성이인 내가 배우를 해도 괜찮을까 고민했는데, 아버지는 나보고 “최고해라” 한 마디 하셨다. 그때부터 말은 하지 않아도 아버지랑 조금 통하는 게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얘기를 주변에 하면 다들 깜짝 놀랬다. 아버지가 배운 사람인 줄 알더라고.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참 신기하다. 어떻게 고민도 없이 그렇게 한 큐에 허락하셨을까.

Q. 무뚝뚝한 아버지였어도 항상 아들이 잘하고 있을까 궁금해 하지 않았을까?
이도경: 한번은 뉴스가 다 끝나고 내가 TV 광고에 나온 적이 있었다. 당시에 내가 있던 극단 광고였는데 그걸 우리 아버지가 본 거다. 어머니가 나중에 말씀해주시길, 아버지께서 도경이가 전두환 대통령 다음에 TV에 나왔다고 엄청 좋아하셨다고 한다. 그 후에 아버지가 고모랑 삼촌한테 전화를 거셨는데 고모, 삼촌은 광고를 못 봤는지 딴 소리만 계속 하셨다. 아버지는 당연히 내 얘기를 할 줄 아셨는데. (웃음) 아버지가 속상하셨는지 술을 엄청 마셨다고 들었다. 결국 그날 새벽에 생전 전화 한 통 안 쓰시던 양반이 나한테 전화를 하셨다. 내가 “아버지가 웬일이십니까?”하고 말하니까 아버지가 “그래, 봤다!”하고 끊어버리시더라고. 주변 사람들한테 자랑을 못하니 나한테 전화를 하신 거다. 그 전화 받고 새벽에 잠도 못 자고 빙그레 웃었던 기억이 난다. 구구절절 얘기하지 않아도 그게 아버지 사랑 표현인 걸 알고 있었으니까.

Q. “그래, 봤다” 딱 네 글자인데 마음이 훈훈해진다.
이도경: “나 너 TV 뉴스 끝나고 광고에 나오는 것 봤다. 되게 자랑스럽더라. 이만 끊는다” 이 말이 “그래, 봤다” 한 마디에 녹아 있으니까. ‘봤다’로 모든 정서가 다 전달된다. 요즘 시나리오를 보면 말이 너무 많다. 설명을 다하려고 해. 난 연기자의 대본도 산문이 아니라 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 정서를 전달할 수 있는 연극, 영화, 드라마가 나와야 한다. 그런 것이 가치 있다. 배우는 ‘봤다’의 정서를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

Q. 아버지의 지원도 있었고, 연극하면서 수입도 부족하지 않았고, 지금은 새로운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힘들었던 기억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이도경: 아이고, 왜 없었겠나. 30살이 넘어가니 모든 경제적 지원이 끊기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일단 집이 없었다. 그리고 차비가 없어서 수유리에서 대학로까지 걸어 다녔다. 내가 덜 고생한 것처럼 보이는 건 굉장히 열심히 살았기 때문이다.

Q. 경제적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나?
이도경: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런데 그 당시엔 연극배우가 아르바이트를 하면 헝그리 정신이 없다고 손가락질 받던 때라 연극 무대 안에서 할 수 있는 걸 찾았다. 조명을 배울까도 했는데 그럼 남을 비춰주고 내가 무대에 못 올라가니까 분장을 배웠다. 고용하는 입장에서도 배우랑 메이크업 스태프를 1+1으로 한 번에 고용하는 거니까. 내가 분장도 좀 잘했다. 그러다보니 연극, CF현장 다니면서 돈을 벌었다. 두 배로 힘들었지만 연극만 하는 것보단 확실히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다.

Q. ‘탄탄대로’를 일구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이 있었다.
이도경: 다른 직업은 상위 10%가 돈을 벌고 산다면, 연극배우는 상위 0.0001%만 산다. 연극배우가 제일 가난하다. 그런 점에서 난 운이 좋았다. 연극만 해서 돈 벌고 성공했으니까.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정말 미친 듯이 노력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극장도 내가 다 지었다. 공연 하나 올리면 포스터, 무대 세트 팸플릿 디자인. 의상. 분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다. 시장 조사한다고 극장 앞에 지나가는 사람 숫자도 세어 봤다. 진짜 지독하게 했다.

Q. 정말 지독하게 그리고 즐겁게 연기 인생을 이어왔다. 40년 가까운 연기 인생에서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연기가 있을까?
이도경: 아버지, 어머니 임종 본다고 경주와 서울을 계속 출퇴근했던 적이 있다. 서울에선 계속 공연을 해야 했으니까. 결국 두 분이 돌아가시고 상주로서 밤새 향 피우고 빈소를 지키는데 결국 목이 쉬더라. 장례를 치르면서 공연은 해야 하니까 그 상태로 몇 시간 운전해서 서울로 올라가 무대에 오르는데 그 때만큼 공연이 잘 된 적이 없다. 몸은 완전 그로기 상태였는데 말이다. 심지어 평소 컨디션이 좋을 때도 잘 안 되던 연기가 되는 것이다. 그때 느꼈다. 정신이 맑아지고, 내가 얼마나 깨끗해지는지가 연기를 잘하고 잘못하고를 결정짓는구나. 나는 스포츠 선수가 아니라 마음을 다루는 기술자이기 때문에 몸이 조금 아파도 정신이 맑아지면 연기를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Q. TV, 영화로 영역을 넓혔지만 젊은 배역을 하기엔 조금 늦었다. 아쉽지 않나?
이도경 : 그런 생각을 하긴 한다. 만약 내가 연극하면서 수입도 없이 허송세월을 보냈으면 젊은 날에 영화나 드라마를 했었을 텐데. 요즘 배우들처럼 막 스크린, 무대, TV를 넘나들면서 하면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 적 있다.

Q. 배우에게 늙어간다는 것은 무슨 느낌일지 궁금하다.
이도경: 일반인이랑 똑같다. 무섭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혹시나 내가 나이가 들어 대사를 못 외우고, 몸이 망가져서 움직일 수 없고, 말할 수 없게 되면 어쩌나, 이런 것이 걱정을 많이 한다. 내가 늙어서 연기를 못할 수도 있는 것 자체가 두렵다. 아프지 말아야 오래오래 연기를 할 수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 나는 연기하는 것 자체가 즐겁다. 현장에만 가도 좋아. 극장에만 가도 좋고. 그래서 할 수 있을 때까지 연기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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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준필 기자 yoon@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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