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 주지훈.
‘간신’ 주지훈.
‘간신’ 주지훈.

[텐아시아=황성운 기자] 작은 소인은 숭재요, 큰 소인은 사홍이라. 천고에 으뜸가는 간흉이구나. (중종실록)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실존 인물이다. 폭군 연산군마저 쥐락펴락했다고 하니 그 위세를 가늠할 수 있다. 이처럼 엄청난 권력을 누린 인물인 동시에 한편으론 철저히 감춰진 인물이기도 하다. 대부분 마찬가지일 테다. 연산군은 알아도, 장녹수는 들어봤어도 임숭재란 역사적 인물에 대한 기억은 까마득하다.

주지훈은 알았을까. “같이 하자”는 민규동 감독의 말 한마디에 시나리오를 보지도 않고 ‘간신’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가 연기한 인물이 바로 간신 임숭재다. 차라리 허구의 인물이라면, 마음껏 인물을 창조했을 테지만 그럴 수도 없는 상황. 또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모습이 빠지지 않고 등장할 만큼 극 중 분량도 어마어마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통해 사극을 경험했다곤 하지만, 장르는 완전 달랐다. “서로 도움될 게 하나도 없다”는 게 그의 말이다.

민규동 감독이 주지훈을 선택한 이유도 그래서다. 민 감독은 텐아시아와의 인터뷰에서 “깊은 소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잘 알고 소통이 쉬운 배우랑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민 감독과 주지훈은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로 만난 이후 ‘키친’(제작-배우), ‘결혼전야’(제작-배우) 등을 함께 했다. ‘키친’ ‘결혼전야’를 연출한 홍지영 감독은 민규동 감독과 부부 사이기도 하다. 이처럼 친분이 두터운 민규동 감독과 주지훈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치고받았다. 이렇게 간신 임숭재가 만들어졌다.

Q. 시나리오도 보지 않고, 민규동 감독이 하자는 말에 작품을 선택했다. 이후 시나리오를 접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나.
주지훈 : 아무래도 이미 결정했고, 좋아하는 마음으로 보는 거니까. 하하. ‘내가 뭘 해야 하지’ 이런 고민 안 하고 보는 거라서 쉽게 읽혔다.

Q. 만약 평소처럼 정상적인 절차였다면, 그래도 이 작품을 선택했을 것 같나.
주지훈 : 글쎄.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다. 정상적인 절차였다면…. 어렵다. 시나리오 볼 때마다 마음 상태가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정말 모르겠다.

Q. 사실 쉽지 않은 작품이지 않나.
주지훈 : 사극, 19금, 정사신도 있다고 하면 주위에서 ‘아~’(탄식) 이럴 수도 있는데 감독님 특유의 스타일이 있어서 크게 걱정은 안 했던 것 같다.

Q. 또 한 가지 궁금한 건 임숭재 말고 탐나는 역할은 없었나.
주지훈 : 그런 질문 많이 받았다. 연기자 측면에서 연산이 재밌어 보였다. 표현하는 데는 고통스럽겠지만. 희로애락이 다 들어가 있는 인물이라서 욕심났다. 그런데 숭재란 인물을 줬으니까. 만약 연산을 한다고 하면 판을 다 뒤엎는 건데, 그땐 내가 다 책임을 져야 하는 거라서. 하하.

Q. 만약 본인이 연산을 하고 싶다고 강하게 어필했으면, 그렇게 됐을 가능성도 있었다는 말인가.
주지훈 : 감독님이 생각하는 톤 앤 매너가 내 장점과 부합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그걸 바꾸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니까. 옷으로 따지면 원단부터 다시 골라서 재단에 가봉까지, 훨씬 많은 시간이 들어간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현실적인 시간이 만만치 않았으니까. 하하.

주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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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영화를 보고 나선 어떤 느낌이었나.
주지훈 : 연출의도와 맞는지 모르겠는데, 재밌게 봤다. 찍을 땐 CG도 없었고. 또 몰랐던 역사적 사건을 보면서 느끼는 것도 많고, 중간중간 액션 등의 시퀀스가 지루하지 않게 잘 만들어진 것 같다.

Q. 주지훈 개인으로는 두 번째 사극 작품이다. 물론 전혀 다른 느낌이지만.
주지훈 : 서로 도움될 게 하나도 없다. 그건 완벽한 코미디고. 시대 배경과 말투 정도 비슷하다는 것 말고 아예 다른 느낌이었다.

Q.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허구로 만들어낸 코믹이지만, 잘 알려진 실존 인물인 충녕을 다뤘다. 반면 ‘간신’은 당시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 들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뭔가 접근하는 방식이나 임하는 자세가 달랐을 것 같다.
주지훈 : 뭐랄까, 이번엔 헷갈리는 부분이 있었다. 군신 관계나 시대상 등 정확히 지켜야 할 때가 있고, 상상력을 가미할 때가 있다. 영화 전체가 128신이 안 되는데, 내가 나온 신이 128신이다. 몽타주 신까지 하면 그렇게 되더라. 그런데 여기서는 지키고, 여기서는 파괴하고. 순서대로 찍는 것도 아니고. 준비한다고 해 가는 데 매번 틀린 학생 같은 거다. 감독님 머릿속에는 그게 정확히 있는데, 나는 그게 아니었으니까. 초반에는 그거 때문에 시나리오를 잘 못 보고 있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Q. 실존 인물을 다루는 사극의 어려운 점이 아닐까 싶다.
주지훈 : 역사를 이걸로 접할 수 있는데 고증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는 글을 인터넷 게시판 같은 곳에서 본 적 있다. 그런 불만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아주 개인적인 생각은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극은 극이다. 2차 매체, 3차 매체를 가지고 이야기하기보다는 역사 교육 등 근본적인 시스템이 더 좋아져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배우가 제대로 된 역사를 알고 있으면 물론 좋지만, 극은 극으로 보는 게 더 좋지 않나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가 전태일은 아니지 않나. 그 시대의 아픔을 그리는, 고발성 영화가 아니다. 대본에 나와 있고, 변형된 것을 믿고 가는 거다.

Q. 감독의 특별한 요구 사항은 없었나.
주지훈 : 한마디로 표현하면, 감독님이 이렇게 말하는 거 싫어하는데. 어쨌든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강함’이다. 통념적으로 권력자는 여유 있다. 진짜 권력이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주니까. 무엇보다 힘 있고, 에너지 있게 가고 싶었나 보더라. 적의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원하는 욕구를 가감 없이 표현하는 그런 간신을 원했던 것 같다. 그런 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대사는 분명 회유하는 거로 쓰여 있다. 심지어 주위에 아는 작가한테도 ‘회유하는 대사 맞지’라고 물어봤을 정도다. 그런데 그 대사를 직진으로 뚫고 나가는 느낌을 원했다. 특히나 대사가 문어체라서 그 회유의 느낌이 명확하다. 그래서 쉽지 않았고, 그 이격을 줄이는 데 시간이 꽤 걸렸던 것 같다.

Q. 극 중 임숭재는 막강한 권력을 누리는 상태에서 한 여인의 등장으로 왕에게 맞선다. 상황에 따라선 이해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변해 과정을 잡아가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주지훈 :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이렇게 만들었습니다’고 해도 그렇게 생각 안 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하다. 여하튼 영화적 장치로는 용이하다. 남녀 마음이라는 게 특별한 이유 없이도 흔들릴 수 있다. 하지만 남녀 간의 관계로 연기했다기보다, 숭재란 인물은 뒤를 돌아볼 이유가 없다. 가족도 없고, 아버지와는 적대관계다. 당시 백성, 천민들은 소, 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 죽는다고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그런 시대상의 아픔 등을 전혀 못 느끼는 인물이 단희라는 불씨를 통해 죄의식, 좌절감 등을 봤다고 생각한다.

Q. 잘 표현된 것 같나.
주지훈 : 내가 연기했는데 객관성이 없을 수밖에.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영화는 우리 손을 떠나면 오롯이 관객들의 몫이다.

Q. 조금 구체적으로 숭재와 단희의 감정은 무엇인가. 단지 죄책감이 전부인가. 분명 멜로의 감정도 있어 보이던데.
주지훈 : 영화는 완성본보다 더 길게 찍는다. 그중에는 멜로인 감정도 있다. 그런데 감독님이 편집 방향을 그렇게 선택한 거다. 나는 양쪽을 다 했다.

Q. 아. 그런데 감독님이 원체 단호하게 ‘사랑’이 아니라고 해서.
주지훈 :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렇게 봤다면 그게 맞는 것일 수도 있다. 에필로그 역시 마찬가지다. 일종의 구원인데, 죄를 지은 사람도 반성하면 용서해주는 그런 여유를 전해준 거로 볼 수도 있다.

주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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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단희 역의 임지연뿐만 아니라 수많은 여배우와 부딪힌다. 1만 미녀를 채홍하는 역할이니까. 이 역시도 쉽지 않은 경험이겠다.
주지훈 : 일단 힘들다. 드라마든 영화든 사람이 많으면 동선, 앵글, 조명 등 모든 게 힘들다. 또 초반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춥겠다는 걱정도 들었고. 나중에 체력의 한계를 느낄 때인데, 스태프가 ‘등장인물 40명입니다’라고 하면 ‘죽었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 하하. 뭐 그래도 적응해 간다.

Q. 눈을 두기 힘들다는 것도 적응되던가.
주지훈 : 그건 적응이 안 됐다. 하하. 남자가 다수면 적응되겠는데 소수니까. 뭔가 분위기가 안 좋다. 저들은 너무 고통스러워하는데, 괜히 다른 쪽으로 오해를 받으면 너무 나쁜 놈이 되는 거다. 안 그래도 집중하기 힘든 여배우들인데 나쁜 감정 주지 않기 위해서 조심했다. 수영장에서 즐기는, 그런 신이 아니잖나.

Q.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게 여배우들의 농염한 몸짓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단순히 유희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게 아니라 많은 감정이 담겨 있지 않나.
주지훈 :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다. 또 익숙하지 않다는 건 불편함으로 다가올 수 있다. 연기 측면에서 바라보는 시간도 중요했다. 나는 길게 바라봤다고 생각했는데, 쓸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 바라봤더라. 시간이 감정적으로 다르게 흘러갔다. 그래서 재촬영한 것도 있고. 다만 여배우들의 노고가 감정적으로 굉장히 도움됐다. 워낙 에너지를 품으면서 했으니까.

Q. 갑자기 뜬금없지만, 정말 여자 친구인 가인의 반응은 궁금하지 않았나.
주지훈 : 원래 누군가의 개인사를 알고 싶지도 않고, 알리고 싶은 성격도 아니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개인적으로 SNS도 안 한다. 그래서 가인이 뭐라고 했는지 왜 궁금해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미 공개 연애하는데 숨길 게 없다. 그런데 4개월 고생했는데 다른 이야기가 나가면 죄인인 기분이다. 모두가 찍은 작품에 누를 끼치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주객이 바뀌는 것 같고.

Q. 임지연과 이유영, 두 배우가 참 잘해줬다. 어려운 장면인데.
주지훈 : 둘 다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많지 않은데 열심히 하는 게 좋았다. 사실 내가 저 나이 때 ‘나는 뭐 했나’ 생각이 들 정도로 강단 있게 잘해준 것 같다. 아무리 감독님을 믿는다지만, 본능적인 불안함이 있다. 20대 초반에 그런 것을 강단 있게 한다는 게 쉽지 않은 것 같다.

Q. 아버지 역할의 천호진과 호흡은 어땠나.
주지훈 : 항상 진중하시고, 아우라가 있다. 그리고 대립하는 역할이다 보니 가까이 가게 되지 않더라. 아무래도. 무엇보다 선생님이랑 연기하면 편하다. 어떤 준비가 아니라 그 느낌을 그냥 줘버린다. 만약 공포감을 느껴야 하는데, 그 공포감을 줘버리면 연기할 필요가 없다. 내가 느낀 대로만 하면 된다. 물론 어려움은 있다. 내가 우리 아버지를 만나도 어려우니까. 하하.

Q. 또 뜬금없지만, 민규동 감독과 부인인 홍지영 감독 중에 누가 더 편한가.
주지훈 : 간단히 말하면, 아버지와 어머니 중에 누구랑 있는 게 편한지 묻는 것과 같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일반적으로 느끼는 딱 그거다. 하하. 홍 감독님은 내가 투덜대면, ‘힘들지, 그래도 해보자’고 어루만져준다. 반면 민 감독님은 ‘그래도 해야지. 잘해야지’라고 하는 식이다.

Q. 민규동 감독과 감독 배우로 만난 건 2008년 ‘앤티크’ 이후 오랜만이다. 본인만이 느끼는 민규동 감독의 변화가 있다면.
주지훈 : 원래도 지독하리만큼 디테일하다. 그런데 (사극이) 처음이어서 그런지 그 디테일이 배도 아니고 제곱이 된 것 같다. 그래서 진짜 힘들었다. 연기가 감성만으로 할 수 없다. 연기술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부분에서 많이 배웠다.

주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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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동안 다양한 작품을 해 왔지만, 흥행 면에서는 조금 거리가 멀다.
주지훈 : 자위일 수도 있는데, 우리가 ‘저 영화는 저래서 안 됐고, 저래서 잘됐어’라고 하는 건 결과가 나온 다음에 하는 이야기다 .시나리오 보고 ‘정말 좋은데 망할 것 같아’ 이러진 않는다. 관객들도 좋아할 것 같다고 생각해서 하는 거다. 또 옛날에는 통상적인 흥행코드가 있었다면, 지금은 그런 게 다 깨졌다. 정말 어렵다.

Q. 그렇다면 좋은 평가를 받길 원하나, 평가와 상관없이 흥행을 원하나.
주지훈 : 몇 년 전만 해도 ‘꾼’들한테 좋은 평가를 받는 걸 좋아한다. (Q. 꾼?) 그 말을 좋아한다. 특정 분야에서 특화된 인물만이 가질 수 있는 느낌인 것 같다. 그리고 우리도 열심히 하면 갈 수 있는 경지인 것 같기도 하고. 솔직한 표현이다. 다시 흥행 이야기를 하면,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어떤 영화가 진짜 혹평을 받는데 관객 수가 어마어마하다. 그럼 그 영화는 관객이 원했던 것일 수도 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흥행이 안 됐는데 영화가 좋다는 평가를 받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좋은 방향인 것 같다. 배우로서 정말 예술만 하다 가겠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 기로에 서 있는 것 같다. 궁극적인 목표는 두 개 다 가야지 않을까.

Q. 그리고 아픈 기억을 다시 한 번 꺼내보겠다. 2012년 인터뷰 당시 ‘단단해진 것 같다’고 말했더니 ‘몇 년 지나고 봐야 한다’고 말을 아꼈다. 그로부터 몇 년 지났는데, 단단해진 것 같나.
주지훈 : 하하. 잘 모르겠다. 그럴 나이인가 보다. 전혀 다른 직업을 가진 일반 친구들하고 자주 어울리는데 그들도 똑같다. 다 흔들리고 있는 시점인 것 같다. 인생의 큰 결정을,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하는 나잇대인 것 같다. 오히려 더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지금보다 어릴 때는 뭘 몰라서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단단해지기는커녕, 외줄 타기를 하는 것 같다.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겠다.

Q. 숭재의 느낌이다. 하하.
주지훈 : 확실히 배우들은 그게 있다. 캐릭터로 몇 개월 고민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 정도 치우치게 된다. 예를 들어 극 중에서 내가 유영의 따귀를 때리는 장면이 있다. 그건 연기다. 하지만 여자의 뺨을 때린 감촉은 내 손에 남아 있다. 연기라고 해서 안 미안한 건 아니다. 이처럼 이 캐릭터로 생각하다 보면 상황이나 사물을 보는 관점도 일정 기간 치우치게 된다.

Q. 또 당시 연기로 속죄하는 길밖에 없다고 했다.
주지훈 : 스스로는 늘 열심히 하고 있다. 최소한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하고 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평가는 관객들이 하는 것 같다.

황성운 기자 jabongdo@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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