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 김강우.
‘간신’ 김강우.
‘간신’ 김강우.

[텐아시아=황성운 기자] 연산군, 희대의 폭군으로 기록된 조선의 10대 왕이다. 두 번의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극도의 폭정을 지속하다 결국 반정으로 폐위된 조선 최초의 왕이기도 하다. 또 ‘색’과 ‘사냥’에 미쳐있고, 시와 그림에 능하고, 어머니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는 인물로 알려졌다.

이런 연산군의 기행과 폭정은 숱한 작품을 통해 대중을 만나왔다. 이는 곧 여러 배우가 연산군을 연기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 ‘간신’도 그 범주에 속한 작품이다. 그리고 김강우는 수많은 배우를 거친 연산군을 품었다.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연산군이 가능할까 싶은 우려가 드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이는 ‘간신’과 김강우가 극복해야 할 거대한 산이었다.

그래서 ‘간신’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흥청망청’의 어원을 가져왔다. 또 전국 각지에서 1만 미녀를 징집한 채홍을 끌어왔다. 또 역사에 간신으로 기록된 임사홍 임숭재 부자를 내세워 연산군의 광기와 색을 더 채찍질했다. 연산군의 기이한 행동과 광기는 분명 이전 연산군과 다른 강렬함을 드러냈다. 김강우의 평소 ‘바른’ 이미지도 그 진폭을 키우는 데 분명 한몫했다. 이런 연산군을 만든 김강우는 “기존 연산군보다 부채를 더 펼친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Q. ‘간신’이 첫 사극이다. 대중도 마찬가지겠지만, 본인도 영화를 보면서 어색하지 않았을까 싶다.
김강우 : 사극이라는 장르가 주는 느낌이 확실히 달랐다. 사극이 처음이기도 하고. 처음에는 이게 맞나 싶기도 했다. 또 한편으론 사극은 보는 분들이 좀 더 호의적인 것 같다. 인물 표현이나 연기에 있어 잘 받아주는 것 같다. 배우 측면에서는 좋은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어색하지 않았는데, 다른 분들이 어색하게 느낄 것 같다. 캐릭터가 독특하니까.

Q. 다른 인터뷰에서 ‘간신’을 준비하기 위해 집을 나왔다고 들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평소에도 그렇게 하는 편인가.
김강우 : (집을) 나와서 따로 하진 않는다. 한적한 카페나 여행 갔을 때 하곤 한다. 일주일 여행이면, 3일 정도는 대본을 보면서 채우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죽겠는 거다. 집중 차원 아니다. 만약 집에서 만약 일주일간 빛을 차단하고, 그 안에서 나오질 않으면 가족들이 얼마나 걱정하겠나. 아이들 정서에도 좋지 않을 것 같고. 그래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해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와서 한 5일째 됐을 때 드는 생각이 ‘그 시대 살아본 사람이 누가 있어’였다. 옳다고 우기면 그게 맞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부터는 편해졌다. 만약에 그렇게 안 했으면 좀 헤맸을 거다.

Q. 가정이 있는데, 그 정도면 집에서 걱정 많이 했을 것 같다.
김강우 : 준비 과정이 다른 작품하고 다를 거라고 미리 이야기는 했다. 조금 다른 모습이 있고, 패턴이 다른 생활을 하더라도 이해해달라고 했다. 방에도 동물 그림부터 행위 예술 하는 그림이나 사진을 걸어 놨다. 또 갑자기 살찌우고, 술 많이 마시고 하니까 건강 걱정을 많이 하더라.

Q. 김강우의 평소 이미지와 연산군, 정확히 말해 ‘간신’ 속 연산군과는 멀게 느껴진다. 작품 선택할 때 본인도 고려했을 텐데.
김강우 : 솔직히 내 안에 이게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른 분들은 모르겠지만, 누구보다 많다고 알고는 있었다. 그러면서도 쉽지 않은 게임이 될 거란 생각은 했다. 그동안 잘하신다는 분들이 해왔다. 그래서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저렇게밖에 못해’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대신 이 역할은 파고, 파고, 판 놈이 이긴다고 생각했다. 또 어쨌든 간신 이야기니까 입체적으로 보여주긴 어렵다. 그래서 지금까지 연산군과 다르게 태생적인 결핍이 있는 사람으로 그리고자 했다. 그러면서 얼굴을 완성해 나갔다. 얼굴의 점도 그런 의미다. 실제 기록에도 얼굴에서 종기가 떠나지 않았다고도 돼 있다. 그렇다고 용안(왕의 얼굴)에 상처가 나는 건 말이 안 되니까.

김강우.
김강우.
김강우.

Q. ‘사이코메트리’ ‘찌라시’ ‘카트’ 등 전작들에서 김강우는 약한 편에서 큰 세력과 싸우는 인물을 연기했다. 그리고 분명 그런 인물이 더 인간적으로 느껴진다고 얘기했다. 그에 반해 ‘간신’은 그와는 정반대다. 김강우 필모에서도 처음인 것 같다.
김강우 : 사실 기억에 남는 연기는 받아주는 연기보다 주도적인 연기를 잘했을 때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더. 그래서 배우 생활하는 동안 언젠가는 그런 주도적인 감정을 사용하는 캐릭터를 할 수밖에 없고, 그때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액션에 반응하면서 느낌을 주는 캐릭터가 더 어렵다고 생각하는 데 대중에게 보이는 건 이런 쪽이다. 어떤 면에서는 이런 주도적인 연기가 더 편한 것도 있다. 다만, 이 역할은 그것마저 넘어야 해서 어려웠다. 실존 인물이고, 평가가 분분하다. 광기도 표현해야 하고, 한편으론 연민도 보여줘야 했다. 물론 감독님이 조율하는 거지만, 그 균형을 맞추는 게 힘들었다.

Q. 과거 인터뷰 당시 ‘센 캐릭터를 해서 어떤 이미지를 박는 게 좋은 건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 고민의 결과가 ‘간신’으로 이어진 건가.
김강우 : 거기에 덧붙여 말하면, 연산군이 들어왔을 때 너무 일찍 온 게 아닌가 생각했다. 내가 조금 더 능숙해졌을 때 왔으면 했다. 이런 역할 인생에 두 번은 못하니까. 하하.

Q. ‘간신’에서 연산군이 아닌 다른 역할을 했더라도 이전의 김강우와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 같다.
김강우 : 과거 ‘햄릿’을 공연할 때 이런 생각을 했다. 햄릿은 입체적으로 표현하기에 퍼펙트한 캐릭터인데 서양 작품이다 보니 거기에서 오는 이질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캐릭터는 뭐가 있을까, 막연하게 생각한 게 연산이었다. 다만, 걱정은 시나리오가 너무 셌다. ‘허구 아니야’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말이 교미하는 장면을 후궁과 지켜봤다거나 사냥개를 대신들 사이로 뛰어다니게 했다 등은 실록에 나와 있다. 거기에 그림을 그린다는 상상을 더한 거다. 실제 그랬을 것 같긴 하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지금으로 따지면 국무총리를 비롯해 전 장관을 소집해서 술을 마시고 시를 쓰게 했으니까. 연기할 때는 그런 것들을 알고 있으면 훨씬 편하다. 그래서 공부를 할 수밖에 없다.

Q. 그동안 수많은 작품을 통해 연산군이 그려졌다. 이번 영화를 위해 일부러 찾아보진 않았더라도, 과거에는 분명 한 번쯤은 접했을 거다. 그리고 이전과 다른 김강우만의 연산군을 만들어야 하는 숙제도 있었을 거고.
김강우 : 색에 미쳐있고, 폭군이란 표현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건 내가 고민하기에 앞서 감독님이 고민했을 거다. 다른 느낌이 나오지 않으면 존재 이유가 없고, 이 사람의 예술가적 기질이 전방위로 표현이 안 된다면 뻔한 연산군이 될 수밖에 없다. 탈춤을 추면 모든 여자가 울었다고 실록에 나와 있을 만큼 탤런트적인 끼가 다분했다. 시도 어마어마하게 썼고, 말도 잘 탔다. 온갖 잡기에 능한 사람이다. 그것만 보여줘도 차별성은 있다고 생각했다. 또 여자를 각 지방에서 채홍하는데, 단순히 성 노리개로 삼은 게 아니다. 이 여자는 음악을 잘하고, 이 여자는 춤을 잘 추고 등을 파악해 파트별로 나눈다. 그 안에서 재미를 찾은 거다. 쓸 수 있는 권력을 끝까지 쓰면서. 감독님이 보여주고 싶었던 건 그로 인해 묻혔던 백성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시대와 맞지 않은 독특한 능력을 보여주면서. 기존 연산군보다 부채를 더 펼친 느낌 같았다.

Q. 부채를 더 펼쳤다는 표현이 정말 알맞다.
김강우 :
내가 말하고도. 하하.

김강우.
김강우.
김강우.

Q. 시종일관 날카롭고, 하이톤을 유지하기도 쉽지 않았겠다. 그리고 광기와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까지 정신적으로 남아날 날이 없겠다.
김강우 : 내가 미쳐야지 한다고 해서 미쳐지는 게 아니지 않나. 그래서 기본적인 생활 방식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가령 평소 오른손으로 이를 닦았다면, 왼손으로 닦아보고. 햇빛을 차단한 건 공간 개념을 없애보고 싶었다. 시간을 뛰어넘어야 하고, 자연스러워야 했으니까. 외로웠지만, 그렇다고 누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싸우고 고민해서 틀을 만들어놔야 했다. 작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이미지 구축이 너무 힘들어 별의별 걸 다 봤다. 히틀러가 연설하는 장면, 무솔리니가 이야기하는 동영상, FBI가 연쇄 살인마를 심문하는 것 등등. 그래도 안 나왔다. 그러다 찾은 게 동물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사람은 동물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에는 사나운 이리나 독사 같다가, 또 어떨 땐 귀여운 곰 같기도 하고. 그래서 방에 동물 그림이나 사진을 다 붙여 놓은 거다. 여기에 아이들 표정이 플러스 됐다. 아이한테 장난감을 줬을 때 좋아하는 표정, 그걸 응용했다.

Q. 민규동 감독이 특별히 부탁한 건 없었나.
김강우 : 살찌라고. 하하. 10kg 찌웠다. 감독님하고는 두 달 동안 진한 연애를 한 기분이다. 그리고 촬영 후엔 별로 이야기를 안 했다. 거의 3달 동안 많은 문자를 주고받고, 의견 조율하고, 신 수정하고. 그래서 현장에서 요구사항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하루에 찍을 수 있는 에너지가 있는데 매 신이 힘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못 찍었을 것 같다.

Q. 본능적으로 연기하는 배우가 있고, 치밀하게 준비하는 배우가 있다고 들었다. 지금 얘기하는 걸 들으니까 김강우는 아무래도 후자 쪽인 것 같다.
김강우 : 이건 섞어야 했다. 준비는 다 해가 돼 어느 순간 탁 놔야 했다. 아니면 속된 말로 ‘뽀록’날 것 같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카메라 감독에게 ‘제가 놓으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일단 한번 찍어보세요’라고 미리 이야기해 놓는다. 하다 보면 대사의 느낌에 확 꽂힐 때가 있다. 그런 장면이 숭재와 칼 춤추고 난 뒤 나 죽여 달라고 한 장면인데, 그땐 거의 즉흥적으로 나왔다. 울 생각이 없었는데, 눈물이 막 나고. 그런 것은 계산한다고 나오는 게 아니다. 호흡도 ‘오~ 내가 이런 호흡을 쓰네’라고 할 정도로 가줘야 소위 말하는 광기가 표현될 것 같았다.

Q. 배우로서는 짜릿한 경험이었겠다.
김강우 : 재밌다. 이런 캐릭터는 힘들지만 사실 재밌다. 작위적이지 않으면서도 평범해 보이지도 않고. 그만큼 갈 수 있고, 해보고 싶은 걸 다 해볼 수 있는 캐릭터다.

Q. 좀 이상한 질문 같지만, 여배우들의 농노 짙은 행위를 눈앞에서 보는 건 어떤 기분일지 정말 궁금했다. 베드신보다 오히려 더 민망할 것 같다.
김강우 : 선정적인 느낌에서 벗어나야 했다. 둘이 얽혀있는 모습이 야한 걸 떠나서 뭔가 다른 느낌의 미(美로) 다가와야 했다. 초반에도 나체로 아크로바틱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고, 말 교미하는 것도 그린다. 사실 내 정신 상태로는 이해가 안 간다. 그게 뭔지. 하하. 연기하면서는 그 안에서 가슴이나 엉덩이가 예쁘고, 그런 시선이 아니라 다른 미를 찾으려고 했다.

Q. 평소에 누드화는.
김강우 : 볼 일이. 하하. 그런데 확실히 예전보다 터부시되진 않는 것 같다. 쉽게 볼 수 있으니까. 앞으로 더 그럴 것 같다. 또 나는 이 작품이 야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별로라고 느끼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그렇게 느끼는 건 살색이 붉은색에 눌린 것 같다. 핏빛이 난자하고, 마지막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쓸 정도니까.


김강우.
김강우.
김강우.

Q. 맞다. 그 돼지 신.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김강우 : 아. 너무 싫었다. 하하. 수능 날짜가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후반부에 찍는데 ‘꼬마 돼지 베이브’도 아니고, 정말 괴물 같고 무서웠다. 한숨만 나왔다. 피가 달달해서 그 피 먹고, 눕고, 대소변까지. 또 돼지가 체력이 약해 금방 눕는다. 그런데 그림 상 서 있어야 하니까 일으켜 세우고. 하하. 정말 엄마 생각났다.

Q. 그 신의 의미는 뭐라고 생각하나.
김강우 : 연산군은 영화 속에서 한 여자도 취하지 못한다. 상상 속에서만 할 뿐이지. 결국 그렇게 욕망을 부려봤자, 돼지와 비참한 최후를 맞는 거다. 연산 입장에서는 사람이나 돼지가 결국 다 동물이다, 이런 느낌이다.

Q. 어떤 순간에는 그런 연산군이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김강우 : 그래야 한다. 나는 정말 불쌍했다. 영화에도 있는데 ‘인생은 풀에 맺힌 이슬 같아서…’란 시는 실제 역사에서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10일 전에 연산군이 읊은 거다. 연산군은 자기가 폐위될 것을 알고 있었던 거다. 또 악행과 기행을 끝내고 싶어도 끝낼 수도 없었다. 죽지도 못하고, 브레이크 걸 사람도 없고. 그러니 얼마나 외롭고 불쌍했겠나. 문득 백남준, 앤디 워홀을 생각하기도 했다. 이 사람들이 옛날에 태어났으면 무슨 평가를 받았을까, 아마 말도 안 되는 평가를 받았을 거다. 뒤집어 생각하면, 연산군은 조선 시대에 재즈나 힙합을 좋아하는 사람인 거나 마찬가지다.

Q. 앞서 말하기도 했는데, 김강우는 바른 느낌이다. 평소에도 자신을 절제하고, 그런 편인가.
김강우 :
절대 절제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배우가 관심의 대상이라서 그렇지, 일반 남자와 비교했을 때 별로 다르지 않다. 가끔 평일 백수라는 거 빼곤 똑같다. 그러므로 내 삶을 보여 줘봐야 재밌을 구석이 없고, 외향적인 성격도 아니어서 덜 드러났을 뿐이다. 그리고 바른 생활 이미지가 나쁜 게 아니다. 퇴폐적인 삶을 산다면 항변하겠지만, ‘굳이 저 바른 생활 아니에요’라고 할 필요는 없지 않나. 가끔 캐릭터로 ‘이런 연기 합니다’라고 보여주는 거다.

Q.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최근 오랜 기간 몸담았던 소속사 나무엑터스를 떠나 씨제스엔터테인먼트에 새 둥지를 텄다. 과거 인터뷰 때 스스로 ‘김강우 비틀기’를 계속 해나갈 것이라고 했는데 ‘간신’의 연산군도, 소속사 이동도 그런 비틀기의 연장 선상처럼 보인다.
김강우 : 지금 이야기를 들으니까 뭔가 찔리는 것 같다. 그런 일환일 수도 있나 생각해 보게 된다. 비틀기의 일환은 배우로서 가야 하고, 절실하게 느꼈던 부분이다. 그리고 연산군을 보면서 그게 유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거다. 회사는 10년 있었는데 사실 매우 편하다. 엄마 품 같다. 절대 나를 이상한 길로 인도하지 않을 거고. 그런데 안주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타이밍을 놓치면 익숙함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지금도 전 소속사와는 좋은 관계다. 그리고 지금도 결정이 옳은 건지는 모르겠다.

황성운 기자 jabongdo@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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