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하진 기자]
연극 ‘엠.버터플라이’를 공연 중인 오승훈(위)과 김도빈. / 사진제공=연극열전
연극 ‘엠.버터플라이’를 공연 중인 오승훈(위)과 김도빈. / 사진제공=연극열전
사랑한 그녀가 나를 이용해 국가 기밀을 빼돌리려고 한 스파이(spy)에다 남자라면, 게다가 무려 20년 간 이 사실을 몰랐다면? 연극 ‘엠. 버터플라이(M. Butterfly, 연출 김동연)’는 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낸다. 놀라운 건 실제 일어난 일이라는 점이다.

지난 9월 9일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에서 막을 올린 ‘엠. 버터플라이’는 중국계 미국인 극작가 데이비드 헨리 황(David Henry Hwang)의 작품을 무대화했다. 1986년 국가 기밀 유출 혐의로 법정에 선 전 프랑스 영사 버나드 브루시코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버나드와 중국인 경극 배우 쉬 페이푸의 만남으로 1막이 흘러가고, 서서히 진실이 드러나는 2막부터 무대에는 내내 긴장감이 흐른다. 버나드와 쉬 페이푸는 극에서 각각 르네 갈리마르와 송 릴링으로 탄생했다.

감옥에서 ‘내 얘기 한번 들어보라’는 듯 목소리를 높이는 르네(김도빈)는 온 세상이 자신을 비웃고 있다며 한숨을 내쉰다. 그의 속 사정은 지난날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드러난다. 르네와 송 릴링(오승훈)의 이야기가 중심인 만큼 두 사람이 자신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방식으로 흘러간다. 가령 송의 정체가 밝혀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르네는 매우 초조해하며 관객들에게 “내 얘기를 들어달라”고 청한다.

연극 ‘엠.버터플라이’ 공연 중인 배우 오승훈 / 사진제공=연극열전
연극 ‘엠.버터플라이’ 공연 중인 배우 오승훈 / 사진제공=연극열전
특히 ‘엠. 버터플라이’는 미군 장교와 일본인 게이샤의 사랑을 그린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을 차용해 볼거리를 풍성하게 만드는 동시에 주제의식도 선명하다. 단순한 줄거리인 남녀의 사랑 아래에는 서양이 동양에 대해, 특히 동양 여성에게 갖고 있는 편견 등에 대한 비판의식이 깔려있다. 극 말미, 르네보다 송에게 더 눈길이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장을 한 채 르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송. 할 수 있는 거라곤 듣고, 기다리는 것뿐인 그가 여장을 거두고 눈물을 흘리며 속내를 토해내는 장면은 그래서 더 설득력 있다.

김동연 연출은 자극적인 소재를 결코 가볍게 다루지 않았다. 20년간 사랑하는 연인이 남자인 줄 몰랐다는 한 남자의 이야기 안에는 놓치면 안 될 중요한 것들이 숨어있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지는 선입견, 우월의식, 추악한 욕망의 껍질을 하나씩 벗겨낸다. 관객들은 휴식시간 없이 이어지는 120분 간 르네, 송의 이야기에 점점 더 빠져들 수밖에 없다. ‘엠. 버터플라이’ 관계자는 “원작이 지닌 주제를 바탕으로 실존 인물의 삶을 심층적으로 연구하며 인간의 심리, 욕망에 대해 심도 있게 접근했다”고 설명했다.

연극 ‘엠.버터플라이’ 공연 중인 배우 김도빈 / 사진제공=연극열전
연극 ‘엠.버터플라이’ 공연 중인 배우 김도빈 / 사진제공=연극열전
법정에 선 송과 감옥에 갇혀 자신을 들여다보는 르네. 두 사람의 마지막은 극을 한층 묵직하게 만든다. 무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 김도빈은 초조하고 불안하며 때론 자신감 넘치고 고집 센 르네 역을 매끄럽게 소화했다. 특히 2막에서 현실을 부정하며 감정을 분출하는 모습은 뛰어났다. 여자와 남자, 경극 배우와 스파이를 오가는 송 릴링 역의 오승훈 역시 신예답지 않은 노련함으로 극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오는 12월 3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

김하진 기자 hahahajin@ten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