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비 43억 '랑종', 2300억 '블랙 위도우'와 비등한 성적
'엽기호러물 마니아'라는 확실한 타깃 공략
'겁쟁이' 관객 위한 이색 상영회로 관심·호기심 유도
비주류 덕후 파워 증명
영화 '랑종'(왼쪽)과 '블랙 위도우'의 한 장면. / 사진제공=쇼박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영화 '랑종'(왼쪽)과 '블랙 위도우'의 한 장면. / 사진제공=쇼박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김지원의 인서트≫
영화 속 중요 포인트를 확대하는 인서트 장면처럼 김지원 텐아시아 기자가 매주 목요일 오후 영화계 이슈를 집중 조명합니다. 입체적 시각으로 화젯거리의 앞과 뒤를 세밀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올해 극장가에서 '블랙 위도우'의 적수는 없었다. 개봉 첫 주에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의 타격이 크긴 했지만 여전사의 앞길은 탄탄대로였다. 태국의 무당이 나타나기 전까진. 요즘 관객들 사이에선 마블의 여전사보다 더 많이 언급되는 뜻밖의 작품이 있다. 태국 호러물 '랑종'이다.

지난 14일 상영을 시작한 '랑종'은 개봉일에 '블랙 위도우'를 제치고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더니 다음날도 정상 자리를 지켜냈다. 주말에 '블랙 위도우'에게 1위 자리를 내주긴 했지만 '블랙 위도우'라는 대작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블랙 위도우' 측은 편치 않은 상황이다. 제작비 2억 달러(한화 약 2300억 원)가 들어간 '블랙 위도우'에게 제작비 43억 원짜리 태국 무당가 이야기 '랑종'은 애초에 경쟁 상대가 아니었다. 극장가에 가장 강력한 팬덤이 있다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작품 아닌가.

하지만 '랑종'은 개봉 4일 만에 손익분기점인 40만 관객을 돌파했다. 가장 많은 관객 동원력을 가진 작품이 상영되는 IMAX관에는 '블랙 위도우'가 아닌 '랑종'이 걸리기도 했다. '블랙 위도우'에 상응할 만한 작품이 '랑종' 뿐이라는 판단이 배경이 된 것이다.
영화 '랑종' 스틸 / 사진제공=쇼박스
영화 '랑종' 스틸 / 사진제공=쇼박스
'랑종'이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명확한 마니아층이 있는 작품이었다는 데 있다. 물론 '블랙 위도우'의 마블 팬층도 탄탄하다. 하지만 '블랙 위도우'는 마블 팬층과 더불어 불특정 다수의 관객을 타깃으로 해 더 대중적이고 친숙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

반면 '랑종'은 확실하고 명확한 소수 집단을 노렸다. 여주인공이 악령에 빙의돼 인간성을 잃어가는 모습은 기괴하며, 존속살인, 근친상간, 식인, 동물학대, 아동학대 등 가학적이고 엽기적인 장면은 불쾌감마저 자아낸다. 단순히 공포, 스릴러, 호러 장르로 분류하기에 부족한 이런 작품을 영화 팬들은 고어(gore)하다고 표현한다. '랑종'은 고어영화 팬층 공략에 제대로 성공한 것이다. 나홍진 감독이 제작·기획한 작품인 만큼 '추격자', '황해', '곡성' 등으로 그의 그로테스크테한 경향의 작품을 경험한 '충성도 높은 팬층'도 끌어올 수 있었다.
영화 '랑종'(왼쪽)과 '블랙 위도우' 포스터 / 사진제공=쇼박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영화 '랑종'(왼쪽)과 '블랙 위도우' 포스터 / 사진제공=쇼박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경악스러울 만큼 높은 수위에 대한 입소문이 돌자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영화 팬들은 '보고 싶은데 봐도 되겠냐'며 진지하게 고민 상담을 하는 일도 생겼다. '보지 않는 게 좋겠다'는 걱정 어린 답글이 달리기도 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이런 '겁쟁이' 예비 관객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랑종' 측이 발 빠르게 움직인 것도 흥행 요인 중 하나다. 상영관 조명을 켠 채 영화를 보여주는 '겁쟁이 상영회'를 연 것. 관객들은 극장이라는 넓은 공간과 큰 스크린에서 느낄 수 있는 시청각 경험을 놓치지 않을 수 있어서 좋고, 극장과 배급사, 제작사에서는 관객을 한 명이라도 끌어올 수 있어서 좋았던 '윈윈' 마케팅 전략이었다. 고정관념을 깬 이색 상영회는 관객들에게 기획력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얼마나 무서우면'이라는 궁금증을 자극해 더 많은 관객들의 관심도 유도할 수 있었다.

지금 극장은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이 흥행 성패를 좌우하는 요인이 됐다. 불특정 다수가 즐길거리로 여길 작품보다는 딴딴한 소수, 소위 '덕후'들이 의무적으로 봐야한다고 여길 작품이 더 승산이 있는 것이다. 주류 대중이 아닌 숨어있던 비주류 덕후 파워가 태국 무당 '랑종'이 미국 '블랙 위도우'를 꺾을 수 있었던 이유다.

김지원 텐아시아 기자 bella@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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