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가 죽던 날' 주연 이정은
"힘 빼고 연기"
"동갑내기 김혜수, '큰 배우'"
"늘어나는 여성영화, 고무적인 일"
배우 이정은 /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배우 이정은 /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이정은은 항상 뒷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배우다. 그가 등장하면 이야기의 흐름이 급변할 것 같고 숨겨져 있던 비밀이 드러날 것만 같다. 이번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 역시 이정은은 다음 전개에 대한 궁금증을 계속해서 자극하며 집중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범죄 사건의 주요 증인이 된 소녀 세진(노정의 분)이 섬마을에서 지내던 중 사라진 사건을 형사 현수(김혜수 분)가 추적하는 이야기다. 이정은은 세진의 마지막 목격자이자 섬마을에서 살고 있는 순천댁으로 분했다. 친근하고 덤덤한 얼굴을 한 순천댁의 모습에서 더욱 비밀스러움이 느껴진다.

"표정 없이, 과하지 않은 얼굴로 표현하려고 했어요. 찍으면서도 바닷가에 흔히 살 것 같은 여인의 모습으로, 더 평범한 모습으로 보이려고 감독님과 계속 상의했죠. 사실 얼굴에 주름이 더 많았으면 했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열심히 했어요. 하하. 드러나지 않은 뭔가가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일상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모습을 담으려고 노력했죠."

극 중 순천댁은 농약을 마시고 목소리를 잃은 인물. 친오빠 내외는 죽었고 홀로 전신마비의 조카를 돌보고 있다. 섬마을 사람들과의 소통도 거의 없다. 감정, 몸짓 등 어떠한 표현도 쉽게 하지 않는다. 대사 없이 연기하는 게 어려웠을 것 같다고 하자 "그걸 신경 쓰기보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들으려고 했다. 현수가 섬에 나타났을 때 두려움이 많았지만 (비밀을) 들키지 않아야 하니까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려 했다"고 말했다.

"(표현을) 많이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감독님과 나눴어요. 어떤 역할이든 힘을 줘야 할 때가 있는데 순천댁을 연기할 땐 힘을 많이 뺐죠. 새롭게 보이는 얼굴과 표정들에 대해 감독님은 찍고 나면 꼭 모니터로 보여주곤 했어요."
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 /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 /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속 순천댁은 뜻하지 않게 범죄 사건의 주요 증인이 돼버린 후 일상을 잃어버린 세진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 무력하게 삶을 이어가던 두 사람은 서로 연대한다. 이처럼 힘들 때 누군가, 혹은 무언가로부터 힘을 얻은 적이 있었느냐고 묻자 이정은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촬영 때를 떠올렸다.

"'미스터 션샤인' 촬영 초반에 '겨울을 뚫고 꽃이 피려면 얼마나 힘든데 애지중지하지 않고 버리냐'는 대사를 잘 풀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때 마침 촬영도 미뤄져서 영국으로 딱 3박 4일 여행을 다녀왔죠. 자연사박물관을 둘러보면서 생명이 이렇게 어렵게 잉태되고 수많은 보살핌 속에서 자라나는구나 생각이 들면서 우울감이 좀 내려가더라고요. 서울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촬영이 없었는데 그 겨울날에 새순이 올라와 있는 걸 보게 됐어요. '이런 게 예쁘면 나는 중년이 맞다' 싶었죠. 왜 스무 살 땐 몰랐던 걸 이제 알게 되냐고 엄마와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봤더니 제가 동물적으로 늙어가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하하. 이제 늙어가는 일만 남았는데 그렇다면 내게 보람 있는 일은 뭘까 생각하게 됐어요. 그런 생각들이 '미스터 션샤인'을 할 수 있었던 힘이었어요."
배우 이정은 /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배우 이정은 /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이정은은 이번 영화에 함께 출연한 김혜수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로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인연은 오래 전부터 이어오고 있다. 이정은은 "계속 서로를 지켜봐주는 친구로 지내자는 이야기를 얼마 전에 했다"면서 "지난해 청룡영화상에서 내가 수상한 후 정말 좋아해줬다. 내 뺨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손에서 동료애를 느꼈다"고 고마워했다. 또한 "단순히 여자 배우라고 부르기엔 부족하다"며 "큰 배우 같다"고 칭찬했다. 영화 후반부 순천댁이 현수에게 그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내놓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 촬영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만 보고도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무언가를 결정해놓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처럼 서로의 액션과 리액션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드라마틱한 순간이 있는 것도 좋았지만 우리가 이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담아낼 수 있는 힘도 있다는 게 좋았어요. 지인을 통해 예전부터 서로를 알았는데 저도 혜수 씨의 행보에 늘 관심이 많았고, 혜수 씨 역시도 제 활동을 중간 중간 봐왔어요. 이번 현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 얼굴이 예전보다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얘기를 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만나니 서로의 시너지가 더 발휘됐고 서로 격려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더 기운을 주고받은 것 같아요."

이번 영화는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가 주연하고 박지완 감독이 연출해 '여성영화'로도 관심을 받고 있다. 이정은은 최근 역량 있는 여성 감독들이 주목 받고 여성영화가 늘어나는 추세를 긍정적으로 봤다.

"여성 감독들이 많이 나온다는 주위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관심이 갈 것이고, 또 전형적으로 써놨던 여성 캐릭터를 더 입체적으로 만들려고 노력도 할 것 같아요. 그러면 저 같은 조연도 할 일이 더 많아질 것 같고요. 그 겹을 다채롭게 할 수 있으니 좋은 현상이라 생각해요. 투자를 원활하게 받는 건 또 다른 문제인 것 같은데 그것까지 잘 된다면 정말 좋은 영화 세상이 오겠죠. 사실 이번 영화를 찍을 때는 여성영화라고 굳이 인식하진 않았어요. 자기 감정을 잘 모르던 이가 자신의 감정을 찾고, 또 거기서 누군가의 감정을 읽는 공감 능력까지 발휘하게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죠. 찍고 나서 보니 여자 스태프들이 많았더라고요. 하하."
배우 이정은 /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배우 이정은 /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연극으로 데뷔해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막강한 캐릭터 소화력을 보여준 이정은. '기생충'으로 전 세계에 화제를 불러일으킨 이후에도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한 번 다녀왔습니다' 등으로 꾸준히 좋은 연기를 선보여왔다.

"개인의 역량은 계속 수련하지 않으면 떨어지잖아요. 제가 많이 노출 돼서 저에 대한 기대감도 떨어졌을 거예요. 하지만 어떤 평가도 달게 받아야죠. 책임감이 많아지면서 부담감도 늘었어요. 하지만 부담 없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요. 스트레스를 줄이려고 산책도 많이 하고 대본 보는 시간도 늘이려고 하고 있어요. 또 이제는 한 작품을 더 깊고 천천히 볼 수 있도록 작업을 겹쳐서 하는 건 좀 지양하려고요. 욕심내서 몇 개씩 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요즘은 침착하게 바라봐야할 때도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드네요."

내년이면 데뷔 30주년을 맞는 이정은. 바라는 일이나 목표가 있느냐고 묻자 "지금 찍는 영화 '오마주’가 내년에 개봉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직 후반 작업과 후시 녹음도 남았지만 감독님을 비롯해 모두가 열심히 한 만큼 '내가 죽던 날'처럼 세상에 나올 수 있길 소망한다. 그게 데뷔 30주년에 바라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지원 기자 bella@ten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