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정시우 기자]
류승완감독01
류승완감독01
장선우 감독의 조감독이었던 류승완은 ‘나쁜 영화’(1997)에서 쓰고 남은 16mm 자투리 필름으로 단편영화 ‘패싸움’(액션)을 만들었다. ‘패싸움’에 단편영화 ‘악몽’(호러), ‘현대인’(세미다큐),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갱스터)를 이어 붙여 세상에 내놓은 작품이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여덟.

검증된 게 없는 어린 감독의 작품을 극장에 덥석 걸어줄 극장주란 많지 않았다. 결국 전국에 달랑 하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그렇게 단관에서 관객을 만났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입소문이라는 건 있었다. 영화는 “끝내준다” “기적이다” “획기적이다”란 평을 받으며 영화계에 강력한 충격을 선사했다. 같은 해 내놓은 ‘다찌마와 리’는 인터넷을 강타했다. 임원희 주연의 인터넷 영화 ‘다찌마와리’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숫자였던 100만 조회수를 넘기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류.승.완.이.란.존.재.는 그렇게 충무로에 각인됐다.

문제는 그 이후다. 감독이 자신의 전작과 싸워야 하는 존재라면, 류승완은 너무나 일찍 획기적인 작품들을 내놓았다. 영화계에 놀라운 장풍을 안기며 등장한 감독의 차기작들에 평단과 관객은 냉엄한 잣대를 들이댔다. ‘피도 눈물도 없이’(2002), ‘아라한 장풍대작전’(2004), ‘짝패’(2006)는 그 나름의 영화적 성과를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류승완 영화는 키치적’이라는 편견을 낳았다. 그의 취향이 과연 살벌한 상업영화판에 부합하느냐 아니냐를 두고 돈을 쥔 투자자들이 저울질하기도 했다. 지쳐있는 그에게 ‘다찌마와 리-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2008)의 실패는 특히나 뼈아팠다. 류승완식 재기발랄함은 한국영화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드문 재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관객들에게 크게 환영받지 못하면서 저평가 되는 부분이 분명 있었다.

변화가 감지된 것은 ‘부당거래’(2010)부터였다. 이전까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쩔 수 없는 딱한 처지에 놓인 약자들이었다. 한마디로 을(乙)끼리의 눈물겨운 싸움이 많았다. 하지만 ‘부당거래’에 이르러 권력을 쥔 기득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류승완은 그들과 싸웠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류승완이 당대와 호흡하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여기에 류승완은 일부 동의하는 듯하다. “그건 제 의식의 변화라기보다는 살면서 변한 제 환경의 영향 같아요. 제 삶의 영역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넓어지면서 생긴 변화가 있는 거죠. 저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변한다고 믿는 사람인데, ‘변할 거라면 잘 변하자’는 쪽이에요. 성장해야죠. 퇴보하지 말고!” 류승완은 진화하고 있었다.
베테랑
베테랑
하지만 변화엔 시행착오가 뒤따르는 법. ‘베를린’(2012)은 8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으나, 100억 원 대의 큰 자본을 운영해야 했던 류승완에게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안겼다. 류승완은 체력적으로 지쳤고, 정신적으로 너덜너덜해졌다. ‘영화를 신명나게, 재미있게 다시 찍고 싶다’는 바람. 그 고민의 끝에서 나온 영화가 바로 ‘베테랑’이다.

‘베테랑’에는 류승완이 ‘순수영화키드’였던 시절 탐닉했던 요소요소(버스터 키튼, TV 시리즈 ‘톰과 제리’, 슬랩스틱 코미디, 성룡 식 액션 등)들이 즐비하다. 영화 자체가 좋아 영화판에 들어온 류승완은 자신이 진짜 좋아는 것들을 ‘어깨에 힘주지 않고’ 신명나게 ‘베테랑’안에 담아냈고, 그 결과물로 관객들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다.

무엇보다 ‘베테랑’에 이르러 류승완은 자신이 만든 인물들을 너그럽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부당거래’와 ‘베를린’까지만 해도 그의 주인공들은 슬픈 운명 앞에 눈물을 뚝뚝 흘리거나, 도망 다녀야 했다. 그는 자신의 분신들을 기어코 코너까지 몰고 갔다. 하지만 ‘베테랑’에서 류승완은 주인공을 빌어 사회의 부조리에 통쾌한 한 방을 날린다. “과거 영화를 만드는 저의 기본적인 태도는 제가 중심이었어요. 그 다음은 내 동세대 친구들. 그리고 윗세대에 대한 어떤 것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내 뒷세대들을 자꾸 생각하게 돼요. 우리는 이 사회가 얼마나 부조리하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잖아요? 이건 우리 세대의 문제거든요. 물려주면 안 되는 거잖아요. ‘부당거래’ ‘베를린’을 만들면서 우리가 언제까지 이 꼬락서니를 보고 살아야 하나 싶었어요. ‘우리가 언제까지 패배해야 하는데?’ ‘우리도 한 번 승리하면 안 돼?’ 싶었던 거죠. 뭔가 뒷세대 친구들에게 다른 이야기를 해 주고 싶더라고요. ‘형이 봤는데 말이야,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하는 걸 말이에요.”

‘베테랑’이 류승완에게 던지는 천만돌파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류승완은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을 풀어내는 방식을 감지했고, 자신이 창조한 주인공에게 관대해지면서 스스로도 행복해졌다. 이는 그 스스로가 “쪽팔리게 살지 않는 방법”을 터득한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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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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