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화
엄정화


배우로서, 가수로서 이처럼 성공한 사람이 있을까. 바로 엄정화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엄정화는 1990년대 국내 최고의 ‘섹시 디바’였다. 당시 엄정화의 독특한 분위기와 무대 위 카리스마는 다른 여가수들이 모방조차하기 힘들었을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그녀만의 독특한 스타일과 패션도 비교를 불허했다. <배반의 장미> <포이즌> <몰라> <페스티발> <하늘만이 허락한 사랑> <초대> 등의 노래들이 엄정화를 대표한다. 각 노래마다 선보인 다양한 퍼포먼스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렇게 엄정화는 가수로서 최정상을 달렸다.

가수로 먼저 두각을 나타내긴 했지만 그녀의 연예계 시작은 배우다.(MBC 합창단 활동은 연예인과는 다른 영역이다.) 엄정화는 1993년 개봉된 영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로 스크린 주연 신고식을 치렀다. 아쉽게도 흥행에선 쓴맛. 하지만 엄정화는 영화 OST에 수록된 <눈동자>로 인기를 모았다. 자연스럽게 가수로 활동영역을 옮겨간다. 간간히 드라마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미비했다. 10여 년이 흘러 엄정화는 유하 감독과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다시 만났다. 배우 인생의 전환점이 된 순간이다. 흥행은 물론 평가에서도 만족할 만한 성적표를 받아든 엄정화는 이후 <싱글즈> <홍반장> <오로라공주>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뛰어난 연기를 선보이며 배우로서 이미지를 굳혀간다. 그리고 지금은 국내에서 몇 안 되는, 원톱 주연이 가능한 여배우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 개봉된 <몽타주>에서도 그녀의 연기에 대한 호평이 줄을 잇고 있다. 지금까지 걸어온, 그녀의 영화를 다시금 떠올려 본다.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1993, 유하 감독, 최민수 엄정화 홍학표 주연.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1990년대 초, 화려함으로 치닫던 압구정동을 배경으로 젊은 남녀의 꿈, 사랑, 좌절 등을 그린 작품. 영화감독을 꿈꾸는 영훈(홍학표)은 혜진(엄정화)을 보고 한 눈에 반하지만 혜진의 마음은 상류 사회로의 진입뿐이다. 어느 날 영훈으로부터 CF 감독 박우삼(이광수)을 소개 받은 혜진은 CF 스타로 부상한다. 혜진과 박우삼은 연인으로 발전하고, 더 나아가 영훈의 아이디어를 도용해 혜진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기획하기에 이른다. 환멸을 느낀 영훈은 고향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10. 엄정화의 스크린 주연 데뷔작. 연기 경험이 거의 없던 신예가 주연으로 발탁돼 상당한 이목을 끌었다. 엄정화는 팜므파탈 캐릭터를 잘 소화하며 당시 황금촬영상 신인연기상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흥행에서 부진, 대중들에게 배우로서 이름을 알리진 못했다. 그럼에도 엄정화는 승승장구했다. 영화 OST 수록곡인 <눈동자>를 불러 상당한 인기를 모은 것. 당시 영화음악을 신해철이 맡아 화제가 더해졌다. 이후 엄정화는 배우보다 가수로서 활동영역을 넓혔고, ‘섹시 디바’로서 정상의 위치까지 오르게 된다. 간간히 드라마 출연은 있었지만 영화와는 더욱더 멀어졌다. 하지만 이 작품이 엄정화에게 준 또 하나의 선물은 유하 감독이다.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는 유하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기도 하다. 여하튼, 가수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엄정화를 다시금 영화로 끌어들인 주인공이 바로 유하 감독이다. <결혼은, 미친짓이다>(2002)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흥행과 비평, 모두 사로잡으며, 각자의 영역에서 위치를 잡아간다. 한편, ‘오렌지족’은 당시 급변하는 문화를 대변하는 말. 1990년대 초 강남에 거주하는 부자 부모를 두고, 화려한 소비생활을 누린 20대 청년들을 가리킨다. 그들의 주요 활동 무대는 압구정동. 이 영화는 그들의 문화를 카메라에 담아내며 흥행과 별개로 많은 관심과 화제를 불러 모으기도 했다. 바람 부는 날엔 진짜 압구정동을 가야하는 건가란 생각을 은연중에 심어주기도 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2002, 유하 감독, 엄정화 감우성 주연.
결혼은 미친짓이다
결혼은 미친짓이다

연애지상주의자인 대학 강사 준영(감우성)은 친구의 결혼식 사회를 보는 대가로 소개팅을 하게 된다. 그 앞에 섹시하고 당돌한 조명 디자이너 연희(엄정화)가 나타난다. 가식적인 질문과 대답이 오가며 3차까지 이어진 술자리 그리고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여관. 대화만큼이나 솔직하고 화끈한 섹스가 이어진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꿍꿍이를 갖고 연애를 시작하게 되는데…

10. 이 작품은 유하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이자 엄정화의 두 번째 주연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이후 10년 만에 다시 만난 셈이다. 엄정화는 <마누라 죽이기>(1994)에서 조연으로 출연했고, 이 외에 여러 편의 드라마에서 모습을 드러내긴 했다. 하지만 배우보다는 가수로서 활동이 훨씬 많았고, 인기도 대단했다. 엄정화가 배우였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잊혀져갔다. 그랬던 엄정화는 다시 유하 감독과 손을 잡고, 배우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결혼 따로, 연애 따로’라는 생각으로 결혼 이후에도 애인과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연의 역을 맡은 그녀는 과감한 노출은 물론 연희의 내면까지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가수 활동을 하면서 구축한 ‘섹시’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간다는 불편한 시선도 있었으나 영화가 공개된 후 쏙 사라졌다. 평단과 대중은 ‘배우’ 엄정화에게 지지를 보냈고, 백상예술대상은 엄정화에게 최우수연기상을 안겼다. 흥행도 뒤따랐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엄정화의 배우 인생에 전환점을 마련해 준 뜻 깊은 작품이다. 이후 엄정화는 가수 활동을 하면서도 배우로서의 필모그래피도 착실하게 만들어간다. 가수와 배우, 두 분야 모두에서 정상에 오르는 그 첫걸음이었다. 참고로 이 작품은 감우성의 스크린 데뷔작이기도 하다.

<싱글즈>, 2003, 권칠인 감독, 장진영 김주혁 엄정화 이범수 주연. /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 2004, 강석범 감독, 김주혁 엄정화 주연.
싱글즈 홍반장
싱글즈 홍반장

<싱글즈> : 나난(장진영), 동미(엄정화), 정준(이범수), 수헌(김주혁) 등 각기 다른 성격을 지닌 싱글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 일본 작가 카마타 토시오의 소설 <29세의 크리스마스>를 원작으로, 신세대 젊은이들의 성과 사랑 그리고 연애를 그려냈다. / <홍반장> : 마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참견하는 오지랖 넓은 동네반장 홍두식(김주혁)과 그와 티격태격하는 치과의사 윤혜진(엄정화)이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코믹하게 그린 작품. 김주혁과 엄정화의 호흡이 만들어낸 매력이 가득했다.

10.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성공적인 스크린 복귀를 알린 엄정화의 이후 행보는 거침없다. 섹시한 이미지가 아닌 다른 모습도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는 듯 다양한 이미지로 자신의 연기 영역을 넓혀간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이후 선택한 <싱글즈>와 <홍반장>은 그런 점에서 남다르다. <싱글즈> 하면, 고 장진영이 먼저 떠오르는 것도 사실. 하지만 엄정화 역시 당찬 커리어 우먼 동미 역을 100% 소화했다. 장진영과는 반대되는 매력을 더하며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또 <홍반장>에서는 ‘허당’ 치과의사 혜진 역으로 출연, ‘코믹한’ 연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김주혁과 빚어낸 코믹한 상황과 장면들이 상당했다. 이렇게 ‘배우’ 엄정화의 영역은 점차 확대됐다.

<오로라 공주>, 2005, 방은진 감독, 엄정화 주연.
오로라 공주
오로라 공주

연이은 살인사건 그리고 어김없이 남아 있는 오로라공주 스티커. 오형사(문성근)는 CCTV를 통해 “날 잡아봐”라는 메시지를 남긴 정순정(엄정화)이 범인임을 직감한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공통점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즉, 결정적 단서가 없는 것. 잔혹한 살인을 계속하는 순정은 살인 장소를 공개하며 전 국민의 시선을 집중시키는데…

10. 연기 활동이 많아지면서 가수 활동은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그리고 <오로라공주>를 만나면서 연기 폭도 한층 넓어졌다. 처음으로 스릴러 장르에 도전했고, 더욱이 그가 연기한 정순정은 잔혹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연쇄살인범. 이전에 보여줬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영역에 들어온 셈이다. 최근 <몽타주> 개봉으로 회자되고 있는 엄정화의 ‘모성 스릴러 3부작’의 첫 번째다. 엄정화가 영화 속에서 ‘모성’을 드러낸 것도 처음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정순정의 살인 동기가 강간당한 채 변사체로 발견된 딸에 대한 복수다. 엄정화는 많은 부분에서 ‘처음’이었음에도 정순정을 제대로 표현해 내면서 ‘여성 원톱’ 또는 ‘여성 원톱 스릴러’가 가능한, 몇 안 되는 여배우로 입지를 굳혀간다. 한편, 배우였던 방은진이 감독으로 첫 발을 내딛은 작품이기도 하다. 방은진 역시 ‘처음’이었음에도 뛰어난 연출 역량을 발휘했다. ‘처음’과 ‘처음’인 여성이 만나 더욱 시너지를 낸 셈이다.

<댄싱퀸>, 2012, 이석훈 감독, 황정민 엄정화 주연.
댄싱퀸
댄싱퀸

왕년의 신촌 마돈나 정화(엄정화)에게 댄스 가수가 될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다. 하지만 설렘도 잠시. ‘서울 시장 후보로 출마하게 됐다’는 남편 정민의 폭탄선언이 이어진다. 이에 정화는 서울 시장 후보의 부인과 ‘댄싱퀸즈’의 리더 사이를 오가며 다이내믹한 이중생활을 시작하게 되는데…

10. <댄싱퀸>은 엄정화 본인뿐만 아니라 그녀의 행보를 쭉 지켜본 대중 입장에서도 각별하다. 한때는 영화나 드라마 속 엄정화를 보면서도 많은 대중은 ‘가수’ 엄정화를 떠올렸다. 온전히 ‘배우’ 엄정화로 보여 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댄싱퀸>에서 댄스가수 꿈꾸는 역할을 소화했다. 그리고 극 중 이름도 ‘정화’다. 영화 속 정화가 실제 엄정화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연기도 이전에 비해 훨씬 더 자연스럽고, 꾸밈 없다. 이전과 달리 물 흘러가듯 편안한 모습이다. 그리고 백상예술대상 최우수연기상을 이끌었다. 더 나아가 엄정화가 아니라면, 과연 누가 이 역할을 소화할 수 있을지 떠오르지 않을 정도다. 대체불가다. 영화 속에서 엄정화가 만들어내는 화려한 무대를 보고, 특별한 감흥을 느끼는 사람들 꽤나 많았을 것이다.

글. 황성운 jabongdo@ten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tenasia.co.kr
편집. 홍지유 jiyou@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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