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대로’, 청년 이적에게 들려주는 어른 이적의 위로

MBC 의 ‘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이하 ‘무도 가요제’)에서 ‘말하는 대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뜨거웠다. 비록 박명수-지드래곤이 함께한 GG의 ‘바람났어’처럼 음원 차트를 올킬하지는 못했지만, ‘말하는 대로’에 따스한 감동과 위로를 받았다는 고백이 적잖게 인터넷 사이트 게시판을 달구었다. 이적과 유재석의 ‘생존 경쟁에 지친 20대에 대한 위로’에 대해 많은 언론들이 앞다투어 조명했음은 물론이다.

‘말하는 대로’가 전해주는 따스한 위로는 패닉과 긱스 등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던 시절의 이적을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다. 이적은 1995년 데뷔 앨범 < Panic >에서 ‘달팽이’가 거의 국민 가요라고 할만큼 크게 히트하고, 포스트 서태지라는 찬사를 받으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어쿠스틱 소품인 ‘강’ 정도를 제외하면 ‘달팽이’의 뒤를 이을만한 발라드를 한 곡도 넣지 않은 파격적인 앨범 을 발표해 논란의 대상이 됐다. 김동률과 함께 한 카니발은 대중적으로도, 평론적으로도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지만 이적은 또다시 그 모든 반응을 뒤로 한 채 긱스의 일원이 되어 소극장 공연 위주의 활동을 펼친다. 이 예측할 수 없는 행보는 청년 이적의 뜨거운 혈기와 세상에 대한 냉소라는 아이러니한 조합의 결과였다. 이적은 10대 시절에 이미 ‘다시 처음부터 다시’에서 ‘내 인생을 도둑 맞았어 / 이젠 아무도 믿지 않겠어’라고 공격성을 표출했고, 의 ‘그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하여’에서는 세상에 대한 날선 시각을 드러냈다. 이적의 이러한 세계관은 < Sea Within >의 ‘단도직입’에서 그야말로 단도직입적으로 표출된다. 13년 전의 이적은 ‘그런 충곤 집어쳐 / 그게 어른이면 나는 아이가 될래’ 라고 노래하던 청년이었다.

하지만 이적은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라며 간절한 어떤 꿈을 노래하던 스물 셋의 청년이기도 했다.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 ‘희망의 마지막 조각’ 등에서 이적이 드러내기 시작한 내적 고민과 방황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냉소를 표출하던 청년의 또 다른 이면이었고, 그러한 방황이나 고민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냉소와 더불어 90년대 후반의 엄혹한 시기를 견뎌내던 청년들의 공감대를 살 수 있었다.

음악도 나이를 먹는다

이후 이적은 솔로 앨범을 통해 상상력과 재기발랄함이 빛났던 이적 특유의 세계관을 고수하기보다 평범한 자신의 일상과 내면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한다. 이적의 앨범에서 동화를 비틀어 삶에 비유하는 상상력이 빛났던 ‘해피엔딩’ 같은 발랄함이나 TV에 종속된 세상을 노래한 ‘Life on TV’나 ‘죽은 새들 날다’ 같은 곡에서 들을 수 있는 날서 있는 현실 비판은 앨범이 거듭될수록 조금씩 사라져갔고, 대신 자리를 차지한 것은 30대에 접어든 한 남자의 인생이었다. 이적이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내놓은 에서 이적은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로 20대의 뜨거웠던 감정을 돌이켜 보고, ‘서쪽 숲’ 같은 노래에선 동화에서 따온 ‘서쪽 숲’이라는 아이디어를 예전처럼 한번 더 비틀기보다 일상의 무게에 짓눌리기 시작한 30대의 이상향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노래한다. ‘장난감 전쟁’처럼 이적 특유의 비유가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는 곡이나 ‘착시’처럼 이적 특유의 판타지적 스토리텔링이 내면의 고백보다 앞서는 곡이 여전히 앨범에 수록되지만 3집 에 이르르면 일상과 내면을 향한 이적의 관조는 더욱 깊어진다. 예전의 이적이 세상과 인생을 ‘다르게’ 바라봤다면 어느 순간 이적은 세상과 인생을 ‘깊게’ 바라보게 됐다.

그래서 이적이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 또한 달라진다. 이적이 스물두 살 이전에 만든 ‘달팽이’가 ‘언젠가 / 먼 훗날에’를 동세대에 대한 위로의 방법으로 선택했다면, 이제 ‘언젠가 멋 훗날’을 믿지 않을 나이가 된 이적은 ‘다행이다’에서도 이적은 ‘거친 바람 속에도 젖은 지붕 밑에도 / 홀로 내팽겨쳐져 있지 않다는게 / 다행이다’ 라고 노래한다. 현실의 고됨을 부정할 수 없는 나이가 되면서 이적의 가사가 그리는 세상은 점차 소박해진다. 반면에 ‘달팽이’나 ‘기다리다’가 피아노 한 대, 혹은 어쿠스틱 기타 한 대로 일반적인 가요 문법을 따라간 소박한 곡이었다면 ‘다행이다’나 ‘같이 걸을까’, ‘빨래’ 같은 곡은 좀 더 극적인 편곡을 가지게 되었다. ‘다행이다’에서 이적은 코드를 잡는 피아노 위에서 시를 읊듯 노래를 시작하지만 감정이 절정으로 흐를 땐 지금까지 없었던 드럼 소리와 함께 록기타가 터져 나온다. 그리고 이 격한 감정은 마무리에선 다시 씻은듯이 사라지고 다시 한번 피아노 한 대에 의지한 한소절의 노래로 끝난다. 나이가 들수록 감정과 사연이 깊어지고, 노래 한곡에서 표현할 수 있는 감정 또한 단순한 한두가지의 감정이 아니라 여러 층위를 가진 깊고, 복합적인 감정이 된다. 그만큼 이적이 한 곡에서 들려주는 사운드의 간극 역시 깊어진다. 그렇게 마치 한 사람이 나이를 먹는 것처럼 이적의 음악도 나이를 먹는다.

이적, 그도 어른이 되다

그래서 이적의 가장 최근작 은 중요하다. 마치 사랑하고 이별하는 한 남자의 일기를 보는 것 같은 일상성도 3집 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앨범의 거의 전곡이 ‘사랑 이야기’인 것은 이적으로서는 독특한 구성이다. 편곡 역시 앨범마다 독특한 아이디어가 빛나던 것과는 달리 예전의 자신의 음악에서 사용했던 아이디어를 많이 차용하고 있다. 패닉 3집 < Sea Within > ‘내 낡은 서랍속의 바다’의 피아노 편곡을 ‘네가 없는’에서 사용되고, ‘보조개’의 귀여운 리듬은 ‘뿔’과 닮아 있다. ‘그대랑’은 ‘하늘을 달리다’를 더 록적으로 풀어낸 곡이고, ‘빨래’나 ‘매듭’ 같은 곡은 ‘다행이다’의 록기타를 현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자신의 음악 역사를 이적은 한결 강해진 록밴드적인 성향과 ’사랑‘이라는 테마로 묶어낸다. 마치 자신의 한 시기를 정리하는 듯한 이 앨범은 한 남자가 30대에 접어든지도 이미 한참이 지나 30대 초반의 혼란과 방황의 시기를 딛고 한결 단단해진 어른의 내면을 갖게 된 것과도 같다.

‘모두 어디로 간걸까’라는 질문에 10년을 돌아온 대답

‘말하는 대로’에서 이적은 20대를 향해 ‘멈추지 말고 쓰러지지 말고 / 앞만 보고 달려 너의 길을 가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다고 될 수 있다고 그대 믿는다면 / 도전은 무한히 인생은 영원히’라고 긍정적으로 조언한다. 10년 전 이적은 토이의 5집 < Feramata >에 실린 ‘모두 어디로 간걸까’에서 ‘말해줘. 넌 잘하고 있다고 / 너 혼자만 외로운건 아니라고 / 잡아줘 흔들리지 않도록 / 내 목소리 공허한 울림 아니길 바래’라고 노래했다. 비록 ‘모두 어디로 간걸까’가 이적이 작사, 작곡한 곡은 아니지만 그 시절의 이적만이 표현할 수 있는 청년의 불안함, 방황, 고민을 담고 있는 곡이었다. ‘말하는 대로’는 바로 ‘모두 어디로 간걸까’가 던진 간절한 질문이나 바람에 대해 10년 동안 한 뮤지션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성장한 한 어른의 따뜻한 대답과 같다. 이적은 자신의 이야기를 20대에게 들려주는 것에 대해 쑥스러워 하는 유재석에게 “이젠 그러셔야죠”하고 말한다. ‘말하는 대로’는 유재석 뿐만 아니라 이적 또한 이젠 이렇게 따뜻한 위로를 청년들에게 건네줄 때가 됐다는 이적 스스로의 대답인지도 모른다. ‘말하는 대로’의 감동은 유재석의 인생을 함축적으로 담았기 뿐만이 아니라 10여년 동안 음악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했고, 또 그 자신의 내적 세계를 진솔히 드러냈던 한 뮤지션이 내놓은 답이기 때문이다. ‘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로 얻게 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는 10여년 전 청년이었던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들려줄 수 있을만큼 어른이 된 뮤지션을 재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진 제공. MBC, 뮤직팜

글. 김명현 기자 eight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