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점잖은 신사인 척 하실 건가요?

KBS <미워도 다시 한 번>과 신영균, 문희 주연의 1968년작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이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건 몰라도 남자 주인공이 지극히 무책임하다는 거 하나는 일치하더군요. 외할머니 손을 잡고 동네 극장에 가서 이 영화를 봤을 때가 열 살 즈음이었을 텐데 어린 마음에도 왜 여자들만 울며불며 죽을 둥 살 둥 마음고생을 하는 건지, 반면 원인 제공자인 저 아저씨는 어찌하여 뭐 하나 잃는 게 없는 건지, 그게 의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강산이 몇 번씩이나 바뀌었어도 여전히 양 손에 떡을 들고 점잖은 미소를 띠고 계시다니, 참으로 후안무치하십니다. 40년 전엔 그저 이해와 양보가 미덕인 줄만 아는 다소곳했던 처자들(문희, 전계현)이 이젠 서로에게 복수의 칼을 겨누는 살벌한 여인네들(최명길, 전인화)로 변신했거늘 당신은 홀로 그 때 그 시절에 머물러 있군요.

당신이 효자라구요?

아니, 생각해보니 오히려 더 한심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 속의 남자는 두 여자들에게는 무책임했을지언정 자식에 대한 책임감은 조금이나마 있었거든요. 물론 어린 아들을 생모에게서 떼어 내어 생이별 시키는 잔인한 짓을 했지만 당시엔 그게 남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테니까요. 이정훈 부회장(박상원) 당신은 딸 수진(한예인)이를 은혜정(전인화) 손에서 크게 했지만 그건 그들 모녀를 위한 배려라기보다는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였을 겁니다.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보상이 손에 돈 쥐어주는 것뿐인지라 돈 쓰는 재주만 있는 딸아이가 카드 정지를 풀어 달라고 부회장님 방에 들이닥치기 전까지는 그 안전이 평생 갈 줄 알았겠지요. 부회장실에서 당신의 딸과 맞닥뜨린 당신의 아내 한명인(최명길) 회장이 수진이를 당신의 숨겨둔 여자로 오해하여 수차례 참기 어려운 모욕을 퍼부었던 건 알고 계시지요?

그뿐인가요? 이정훈 부회장에게서 즉시 떨어지라는 경고를 아랑곳 않자 학교에 ‘돈 많은 남자에게 빌붙어 사는 애’라는 소문을 퍼뜨려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 또래 여자아이에게 평판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십니까? 보통 아버지 같으면 딸아이에게 구정물이라도 한 방울 튈까봐 전전긍긍하기 마련인데 자기 딸이 진흙바닥에 나뒹군 꼴임에도 분노는커녕 여전히 침착할 수 있는 당신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게다가 당신 딸은 당신이 이때껏 아버지 노릇을 해온 한명인의 아들 민수(정겨운)에게 따귀를 연타로 맞기까지 했잖아요? 당신의 딸이라는 이유로요. 사고뭉치이긴 하지만 비굴할 정도로 자신의 처지를 감내해온 딸에게 던지는 당신의 전매특허는 “미안하다, 내가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구나”입니다. 또 당신은 이런 변명을 합니다. 지난 날 어머니(김용림)의 목숨을 구해줄 테니 사위가 되어달라는 한명인 회장의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고. 한명인 회장의 아버지는 기업 총수다운 직관력으로 당신을 잘 파악했던 듯합니다. 효자인 척 할 구실이 있는 이상 호박이 넝쿨 째 굴러들어올 제안을 거절할 리 없는 인물이라는 걸 알았겠지요.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마음에 없는 결혼을 했다는 당신이 한명인 회장이 이십여 년 간 닫고 있던 마음의 문을 열고 여자로서 다가오자 대번에 은혜정에게 결별을 선언하더군요.

더 이상 해줄 게 없다는 소리는 이제 그만 하세요

나를 믿고 의지하려는 아내에게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고요? 나는 세상 사람을 바람피우는 부류와 안 피는 부류로 나눌 정도로 바람기를 경멸하는 사람입니다만,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내에게 돌아가겠다는 당신의 손을 들어줄 수가 없네요. 그 오랜 기간 남몰래 불륜을 저질러 온 두 남녀는 물론, 결혼 생활 내내 첫사랑을 가슴에 품은 채 남편을 거부해온 한명인도 이 파국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봅니다. 내가 진실로 가슴 아픈 건 그 옛날 영화에서는 문제를 일으킨 어른들이 사건의 중심에 놓인 죄 없는 어린 아이의 행복을 위해 힘을 모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당신과 당신의 여자들은 한 여자아이는 엄마를 이모라고 부르며 살아왔고 한 남자아이는 어쩌면 생부의 죽음에 일조했을지도 모를 사람을 아버지라 부르며 살아왔건만 아이들의 심경은 뒷전인 채 서로를 물고 뜯기 위해 으르렁거릴 뿐이죠. 이 모든 사건의 시발점인 당신이 정말 모두에게 미안하다면, 더 이상 해줄 게 없다는 소리 따윈 하지 말라고요.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손에 쥐고 있는 모든 걸 내려놓는 겁니다. 그리하여 두 여자에게서 멀리 떠나 어머니를 모시고 여생을 보낸다면 지난날의 효심도 믿어드리지요. 그러나 돌아가는 분위기로 봐서 그도 여의치 않을 듯합니다. 당신의 여인네들은 이제 당신이 바라는 대로 움직여줄 마음이 없어 보이니까요. 당신이 계속 극한의 이기주의를 뒤에 감춘 채 점잖은 신사의 탈을 쓰고 살아가려면 40년 전 영화 속으로 돌아갈 타임머신이 필요할 텐데 이를 어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