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범 “천사도 있고, 몬스터도 있는 중원에서 난 또 다른 생명체”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류승범이 가장 많이 쓴 추임새는 “그냥”, “막”이었다. 좋아하는 배우인 드니 라방에 대한 묘사는 “믿는 대로 그냥 막 가는 사람”이었고, 혼자 떠나는 여행의 즐거움도 “그냥 너무 좋다”고 담백하게 내뱉었다. 젠 체하는 수식어나 느끼한 미사여구 따위는 입에 올리지도 않는 류승범식 화법은 그에 대해 익히 품고 있던 이미지와 딱 맞아 떨어졌다. 첫 등장부터 지금까지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야생의 펄떡거림과 본능의 날카로움을 가진 배우는 그렇게 군더더기 하나 없이 자신의 생각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매 질문에 준비된 대사를 읊기보다는 미간에 힘을 꽉 주고 가장 적확한 표현을 찾아내려는 성실함은 그 생각들에 무게를 더했다. 이미 많은 곳에서 그의 탁월함을 옮겨 놓은 바 있지만 여전히 풍부한 류승범이라는 텍스트를 여기 풀어 놓았다.

영화 기자 간담회 때도 그렇고 최근 인터뷰들을 찾아보니 생각이 많더라. 영화 홍보 때문에 릴레이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 이제 생각들이 좀 정리가 됐나.
류승범: 요즘은 뭐 인터뷰 머신이 돼가고 있다. (웃음) 정리해야 될 부분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지만 인터뷰를 위한 것들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다. 나머지는 내 숙제고.

“솔직하고 진지하게 그리고 충실하게 살고 싶다”
류승범 “천사도 있고, 몬스터도 있는 중원에서 난 또 다른 생명체”
일단 영화 얘기부터 시작하자면, 자살이라는 화두에 한참 끌려있을 때 시나리오를 받아서 그 부분에 빠졌다고 하던데, 사실 자살은 접근하기가 쉬운 소재는 아니다.
류승범: 자살이 많이 일어나고 또 노출도 많이 되고 있다. 근데 영화의 장점이라고 하면 그것을 우울하게 다루기보다는 어떻게든 밝은 각도의 위로로 이끌거나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준다는 것이다. 은 그런 면이 좋아보였다. 사실 휴먼코미디라는 게 어떻게 보면 굉장히 가혹한 장르다. 누군가의 아픔으로 웃고 울린다는 게, 그 현실에 있는 사람들에겐 가혹하다. 하지만 처음에 라는 제목으로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제목 때문에 그런지 로베르토 베니니의 가 떠올랐다. 그러면서 아, 그래 우리 영화를 통해서 그런 느낌, 힘, 이미지를 줄 수 있다면, 그런 정서를 소통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배병우라는 캐릭터는 어땠나. 자살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이들을 구하느라 혼자 고군분투 하는데, 선의라기보다는 오지랖으로 느껴지기도 하더라. (웃음)
류승범: 그 오지랖이 넓다는 것 때문에 나도 되게 힘들었다. (웃음) 그래서 현장에서 감독님한테 얘는 뭐 이렇게 오지랖이 넓어요 하소연하기도 했고. 근데 배병우란 인물은 그냥 그런 사람인 것 같다. 굉장히 개인적인 것을 추구하지만 결국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인 거지. 절대적으로 개인적일 수 없는. 그렇게 양면성을 드러내니까 인간의 단면을 보여주는 걸 수도 있다. 뭐 나도 마찬가지고. 내 얘기를 하자면 양면성을 떠나서 아주 다면적인 것들로 가고 있다. (웃음) 내 안에서 그런 것들이 계속 충돌해나가고.

사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일을 하고, 나이가 먹고, 보통 그렇게 살다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충돌을 다스리거나 덮어버릴 수 있게 된다. 사실 그게 편하기도 하고. 그런데도 자기 안의 충돌, 불편함을 이번처럼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게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웃음)
류승범: 여전히 청춘인 것 같다. 그런 면에서는 여전히 어색하고, 여전히 컨트롤이 안 되고, 충돌하고 있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다. 나도 물론 나이스할 수 있다. 유연할 수 있고. 근데 솔직하고 싶은 본능도 있는 거고, 진지하고 싶은 본능도 있는 거다. 때로는 가면을 잘 쓰기도 하고 때로는 그 가면을 집어치우고 싶기도 하는 과정 속에 있는 것 같다. 정착하지 못하는 그 과정이 평생가지 않을까 싶다. 많은 사람들이 숨기고 다스렸다 믿고 싶은 것뿐이지, 평생 죽는 날까지 다 그렇지 않을까? 사는 게 그런 게 아닌 가 싶다. 계속 충돌하고 깨지고 넘어지고 일어서고.

연인인 공효진 씨가 본인에 대해서 아주 정확한 표현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류승범은 원래 늑댄데 산에서 내려와서 인간이 주는 밥 얻어먹고 미용도 받고 살다가 야생 본능이 다시 나왔다”고. 근데 그 말이 제 3자가 보기에도 되게 와 닿더라. 류승범이란 배우는 첫 등장만큼이나 이미지가 굉장히 강렬했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어떤 사진을 봐도 거친 느낌이 사라지고 온화함이 깃들어 있더라.
류승범: 주님의 이름으로. (웃음)

그러다 요즘 얼굴을 보면 또 굉장히 복잡하다. 정말 야생성이 다시 나와서 그런 건가? (웃음)
류승범: 내 인생은 계속 파도인 것 같다. 어디 한 군데에 정착하지 못한다. 그냥 날 맡기고 또 내던지는 거다. 이렇게 또 던져졌으니까 이렇게 흐르다보면 언젠가 그 곳이 어딘지 모르겠지만 정박하게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하나의 흐름으로 끝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냥 내 인생에 주어진 것에 솔직하고 진지하게 그리고 충실하게 살고 싶다.

그렇게 파도 따라서 흘러가다 보면 사람이 사람인지라 중심을 잃을 수도 있고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류승범: 중심이 없다.(웃음) 중심을 잡는다는 게 너무 힘들다. 근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중심을 잡고자 하니까 힘들구나, 중심이 없다고 생각하자. 그러면 그냥 흐르는 거다. 그런데 파도는 계속 치는데 중심을 잡고 서 있으려니까 힘들지. 그러니까 그냥 떠내려가는 거다. 거기에서 중심을 잡는 거지, 무중력으로. (웃음)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의 선입견, 나 자체지 않나? 그냥 때로는 중심을 잃고자 하는 것이 또 다른 중심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현상을 진실 되게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류승범 “천사도 있고, 몬스터도 있는 중원에서 난 또 다른 생명체”류승범 “천사도 있고, 몬스터도 있는 중원에서 난 또 다른 생명체”
어떤 형태를 두지 않고 계속 흐름에 따라 맡기겠다는데 그 와중에서도 이것만은, 이 가치만은 타협하거나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게 있나?
류승범: 예전에 지하철 타면 아줌마들이 가방을 앉으려는 데 확 던지지 않나. 그게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근데 그건 그냥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거다. 서서가는 것보다 앉아서 가면 편한 거다. 그 순간 주위의 어떤 시선보다 자신에게 솔직한 거지. 그러니까 그 솔직하다는 걸 바라보는 시선이 솔직해졌으면 좋겠다. 내가 가방을 던지겠다는 게 아니라 (웃음) 그런 일이 있을 때 내가 솔직하게 바라보길 바란다. 나의 생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그리고 나의 생각이라는 게 결국에 보면 누가 가르치고 심어놓은 의식 아닌가. 본질과 진실은 라이트하다. 그냥 그거다. 컵은 컵인 것처럼. 그러니까 그렇게 있는 현상을 진실 되게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것만은 흔들리지 않아야 될 것 같다.

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배우로서 일하는 것과 인간으로서 사는 것에 대한 생각들이 분리되는 편인가 아니면 전혀 경계가 없나?
류승범: 분리 못한다. 그걸 분리하면 좋을 때도 많은데 배우 류승범이라는 존재와 인간 류승범이라는 존재가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영화를 끝내고 어떤 숙제를 안게 되면, 그 안에서 끝내야 하는데 그게 인간 류승범으로 넘어온다. 그럼 그 고민을 안고 있다가 다음 작업을 선택할 때 영향을 미친다. 아주 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에 질문을 낳고 그렇다. (웃음) 연기를 통해서 내가 변하기도 하고, 내가 변해서 연기가 변하기도 한다. 우위가 없다. 자기 인생은 자기 인생대로 살고, 배우 인생은 배우 인생대로 보면, 이렇게 양쪽 다 객관적일 수 있을 텐데 그걸 잘 못한다. 그래서 힘든 것도 있고. 좋은 점도 있고.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는 게 내 자연스러운 모습이니까 그게 사람들에게 어필이 되는 반면에 어떨 땐 내가 생활을 하는 거야, 연기를 하는 거야 충돌할 때가 있다. 또 그 충돌이 나고.

연기를 막 시작하던 때에도 그렇게 연기에 대한 고민이 많았나?
류승범: 초반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사실 나는 이 일에 대해서 책임을 가졌거나 꿈을 가졌던 적이 없었다. 그냥 신세계가 열린 거였다. 이거 뭐야, 이 사람 뭐야. 이 사람 유명한 사람 아니야? 그냥 뭐 야생이었지. (웃음) 그냥. 얼마나 정신없었겠나. 산에서 막 내려왔는데. 그냥 이상하고 신기했다. 이 신세계는 뭘까? 그런 고민들을 했지. 뻥 하고 왔으니까. 내가 왜 갑자기 유명해졌지? 왜 나한테 사인을 받으러 오지? 이상했다. 그냥 난 좀 이상한 뒷골목에 있는 사람이었는데. (웃음)

그렇게 오랫동안 지켜봤던 그 신세계는 어떻던가?
류승범: 여기? 뭐 엄청나다. 천사도 있고, 몬스터도 있고, 막 아주 막, 엄청나다, 여긴. 거대한 세상이다. 최민식 선배님의 이야기를 빌리면 여기는 중원의 협객들이 많다. 칼을 뽑고 있든 안 뽑고 있든 무로도 사람 죽이고. 그런 거 있지 않나. 너 칼 들었어? 나 무 들었어! 이러면서 막 죽이고, 즉사해 있고. 뭐 그렇다. (웃음)

류승범은 어떤 협객인가? 칼을 들었나, 무를 들었나? (웃음)
류승범: 나는… 좀 어정쩡한 타입이다. (웃음) 어정쩡하게 있다가 사람들 보고 저놈 뭐야, 신기하네, 이러고. 조금 아웃사이더 기질도 있고 뭐, 재빠르게 흡수할 땐 흡수하고. 그냥 그 공간에 있는 사람이다. 또 다른 어떤 생명체랄까? (웃음)

“앞으로의 내 인생을 수련하고 훈련해야 되는 것 같다”
류승범 “천사도 있고, 몬스터도 있는 중원에서 난 또 다른 생명체”류승범 “천사도 있고, 몬스터도 있는 중원에서 난 또 다른 생명체”
그런 무시무시한 신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매 작품뿐만 아니라 연기라는 긴 싸움에 임하는 자신만의 특별한 기준이 있을 것 같다.
류승범: 어떤 작품은 감독님에 대한 신뢰, 시나리오의 흥미, 또 작업 자체에 의도를 둘 때도 있고, 그때그때마다 다르다. 배우로서의 행보를 생각해볼 때도 있고. 뭐 이렇게 여러 가지다. 그러니까 드니 라방 같은 배우가 보면 얼마나 우스울까? 그 사람은 너무 완벽하잖나. 딱 보기에 잘 사는 것 같지도 않은데. (웃음) 삼시 세끼도 못 먹을 것 같고, 나보다 별로 행복할 것 같지 않은데. 뭐를 저렇게 자신 있게 믿으면서 연기를 하지? 정말 대단하다. 그런 위대한 배우가 날 보면 ‘너 뭐하냐? 배우가 연기해야지 뭐하냐?’ 그러겠지. (웃음) 근데 뭐 나는 얘기할 수 있다. ‘이게 난데. 넌 너고 난 나야’라고.

예전에 영화 할 때 “나는 아직 연기의 청소년인 것 같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디쯤 온 것 같나? (웃음)
류승범: 미소년 쯤? (웃음) 농담이고 지금도 똑같다. 완성이 없으니까. 연기에는 성숙이 없는 것 같다. 그 때나 지금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 않다. 어느 정도 노련미는 생겼을 수 있지만, 노련미로 연기가 또 승부 나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배우라는 일을 하고 있는 건 정말 축복받은 일이다. 요 몇 년 새 언제 돌아올지도 정하지 않고 혼자 여행을 다니는데 그것도 이 직업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특권 같다. 철저하게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좋더라. 한국에서처럼 외부의 영향도 안 받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또 그 새로운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렇게 혼자 여행을 떠나서는 하루를 어떻게 보내나?
류승범: 아침에 일어나서 가까운 데 가서 커피 한잔 먹고, 담배 하나 피면서 오늘은 뭐 할지를 생각한다. 관광은 잘 안 다니니까 일단 앉아서 두세 시간 정도를 그런 식으로 죽을 때리는 거다. (웃음) 사람들도 구경하고. 그러다가 일어나서 좀 걷고, 걷는 게 심심하면 대중교통 타고 돌아다니고. 행선지 없이 그냥 다니는 거다. 최근에 가장 좋았던 뉴욕에서도 배우의 텐션을 다 잊고 진짜 동물처럼 배고프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새벽에 깨면 나가서 걷다가 맥주 한 잔 마시고 들어오고 그러다가 낮에 자고 싶으면 또 자고. 너무 좋더라. 배우들은 쉬는 동안에도 운동해야하지 않나, 뭘 배워야 하지 않나 이런 압력이 있는데 그런 게 하나도 없는 상태니까 아, 자유더라. 배우를 하면서 그런 날들을 보내면 소름이 쫙 돋고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하다. 내 시간을 분배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걸 비교적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 또 그게 내 일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현실에서의 경험이 연기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건데, 자연인 류승범으로서는 그렇게 자유로운 시간을 영위하다가 꽉 짜인 배우로서의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 간극으로 인한 혼란도 있을 것 같다.
류승범: 사실 그 간극을 맞추기가 어렵다. 내가 영화를 제작하는 것도 아니고 시나리오를 쓰는 것도 아니고. 그 톤 조절을 잘 해야 되는 것 같다. 대중을 상대하는 상업배우는. 올라가는 만큼 내려가는 것도 많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걸 잘 못하면 내 자신이 너무 힘들어지더라. 그러다가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하고. 현실과 이상을 조절하지 못하는 이 간극이 확 생기니까. 아직 그게 잘 안되는데. 그거는 그거대로 흘려보내고, 이 현실 안에서 잘 맞춰가고 수련하고 훈련해야 되는 것 같다. 앞으로의 내 인생을.

글. 이지혜 seven@
사진. 이진혁 elev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