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재│Oldies but goodies

그는 KBS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TV에서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연기를 하고 있다. 또한 그의 출연작 중에는 한국 드라마사(史)의 걸작과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들이 다수 포함 돼 있고, 일흔이 넘은 나이에 시트콤 연기와 오보에 연주자의 연기에 도전했으며, 한 작품에서는 노인의 로맨스를 그리며 ‘역대 최고령 키스신’이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살아있는 전설’이나 ‘No.1’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가 지금 이순재의 연기를 보는 것은 기적이다. 서울대 철학과 출신이라든가, 국회의원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그리 커 보이지 않을 만큼, 연기자로서의 이순재는 ‘완벽한 인생’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젊은 시절 스타였고, 나이 들어서는 후배들에게 가장 존경 받는 연기자다. 하지만 그가 단지 후배 연기자들의 위대한 ‘선생님’을 넘어 ‘only one’일 수 있는 것은 그의 클라이맥스가 바로 지금부터이기 때문이다. MBC <이산>에서 그가 연기한 영조는 손자에 대한 사랑과 왕의 위치 사이에서 고뇌하는 모습으로 드라마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MBC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는 ‘야동’을 즐겨 보는 노인을, 그리고 KBS <엄마가 뿔났다>에서는 사랑하는 여성에게 키스를 하는 할아버지를 보여줬다. 이순재를 통해 드라마 속 노인은 ‘인자한 할아버지’가 아닌 ‘남자’로 되돌아왔다. MBC <황금어장>의 ‘무릎 팍 도사’에 출연해 시청자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고,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주인공일 수 있으며, 여전히 연극 무대에 올라서는 연기자. 그래서 이순재는 지금도 그와 자기 또래의 연기자들이 지금도 무대의 중심에 설 수 있길 바란다.

“우리가 연기를 하는 건 병풍으로 뒷바라지하기 위해서가 아냐. 그런 연기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으면 좋겠어. 농담 삼아 하는 이야기지만, 우리가 출연해서 시청률이 올라가면 올라갔지 내려가진 않잖아? 하하.” 그래서, 이순재에게는 이런 음악들을 골라달라고 부탁했다. ‘Oldies but goodies.’

1. 김추자의 <김추자 그 시절 그 노래>
“요즘에는 수애가 영화에서 이 노래를 부른 걸로 아는데, 원래는 이게 TBC 방송사의 드라마 주제곡이었어.” 이순재가 첫 번째로 꼽은 ‘Oldies but goodies’는 한국 록의 거장 신중현이 작곡하고, 김추자가 부른 ‘님은 먼 곳에’였다. 지난해 수애가 주연으로 출연한 동명의 영화로 더 알려졌지만, 이 노래는 원래 이순재가 주연으로 출연한 동명의 드라마 주제곡이었다고. “그 때는 노래의 주제가를 드라마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어. 내가 출연했던 <지금 서울이여 안녕>도 이미자 씨의 노래를 바탕으로 한 거고. <님은 먼 곳에>에서는 내가 삼각관계의 주인공이었고. 하하. 하지만 요즘 삼각관계 이야기하고는 달라. 노래처럼 마음속에만 담아놓은 사랑하는 님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요즘은 그런 사랑이 거의 사라졌잖아. 하지만 ‘님은 먼 곳에’같은 노래가 오래됐다고 해서 그 노래가 나빠지는 게 아니잖아? 지금도 아련하잖아. 그래서 영화로도 만들어졌을 거고. 그런 게 좋은 옛 노래의 힘인 것 같아.”

2. Elvis Presley의 <The Essential Elvis Presley>
이순재는 신중현의 이름 다음으로 엘비스 프레슬리를 언급했다. 그 중에서도 그가 꼽은 노래는 ‘Love me tender’. 엘비스 프레슬리 보다 한 해 일찍 태어난 이순재는 이 노래를 엘비스 프레슬리 사후에 나온 컴필레이션 앨범들이 아닌 영화로, 그것도 극장에서 직접 관람했던 세대다. “‘Love me tender’는 노래 제목이기도 하지만 영화 제목이기도 해. 웨스턴 영화로 기억하는데, 거기서 나온 엘비스 프레슬리의 모습은 우리한테 충격이었지. 그 때 한국에서는 그렇게 자신의 성적인 모습을 보여주거나, 여자한테… 요즘 말로는 ‘작업’이라고 하나? 하하. 그런 걸 대놓고 하는 남자를 보기는 어려웠거든. 그래서 친구들끼리 와, 저 녀석 멋있다 하면서 봤지. 그 때부터 ‘Love me tender’를 줄곧 불러. 젊었을 때는 로맨틱한 분위기를 내려고 불렀고, 지금은 그 시절을 추억하는 거지.”

3. Diana Ross의 <One Woman : The Ultimate Collection>
“남자는 엘비스 프레슬리라면 여자는 다이아나 로스지. 다이아나 로스의 목소리는 정말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아.” 이순재는 다이아나 로스의 노래 중에서도 특히 ‘Endless love’를 추천했다. 다이아나 로스는 팝과 소울의 경계를 없애며 이후 미국 음악계에서 탄생한 ‘팝 디바’의 원형이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닌 전설의 흑인 팝스타. 또한 ‘Endless love’ 역시 ‘Love me tender’처럼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불려지며 현재까지 생명력이 이어지고 있는 명곡이다. 하지만 그가 이 노래를 추천한 또 하나의 이유는 제목이었다. “사실 사람한테 사랑이라는 건 ‘Endless love’인 거잖아. 젊은이들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노인들도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거든. 노인들도 자기의 인생이 있는데 무조건 좋은 할아버지 노릇만 하라고 할 수는 없잖아? 내가 <엄마가 뿔났다>에서 로맨스 연기를 한 것도 그것 때문이고. 나이가 들었다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냐. 그걸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

4. 이동원의 <추상 (追想)>
이순재는 네 번째 ‘Oldies but goodies’로 가수 이동원과 성악가 박인수가 함께 부른 노래 ‘향수’를 꼽았다. ‘향수’는 발표 당시에는 보기 드물었던 가수와 성악가의 만남이라는 점, 또한 일반 대중가요와 달리 시인 정지용의 시를 노래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향수’는 우리의 어린 시절에 관한 노래야. 내 고향을 그린 것 같아.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늘 꿈속에서 그리워하는 고향이겠지. 사실 정지용 선생의 시가 발표될 때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이란 건 정말 힘들었을 거야. 내가 자랄 때도 피폐했다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생활이었는데, 그 때는 오죽했겠어. 그리고 그렇게 어렵게 살다 보니까 다들 도시로 오게 되고. 그러니까 참 슬프지. 그렇게 아름다운 고향인데, 그 곳에서 사는 건 참 힘들잖아. 그래서 떠나와서 그리워 할 수밖에 없고. 나한테는 참 아련하면서도 아픈 노래야.”

5. Frank Sinatra의 <Nothing But The Best>
“이 노래는 설명할 필요 없지? 하하.” 그는 프랭크 시내트라의 ‘My way’를 마지막으로 선택했다. 이미 배우로서 모든 것을 다 이룬 듯 한 그에게 남아 있는 ‘My way’는 무엇일까. “연기라는 건 창조 작업이야. 거기에 끝이라는 건 없어. 나이 들었다고 화면 구석에서 회수만 채워주면 배우의 존재의 의미가 없는 거야. 배우는 늙으나 젊으나 늘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작품에 기여를 할 수 있어야 해. 예를 들어 왕을 연기하려면 그냥 품위 있는 표정만 짓는 거 가지고는 안 돼. 예전 왕들은 왕이 되기 위해 공부를 많이 했으니까 그만큼의 학식이 있는 사람의 행동을 연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한 나라를 책임지는 사람과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의 이해가 부딪치며 생기는 고민도 드러내야 하고. 그래서 이런 배역은 우리처럼 오래 활동한 배우들이 필요할 수밖에 없지. 젊음은 한 때지만, 인간은 그 뒤에도 살잖아. 그 인간을 파고드는 게 배우야. 그러니까 앞으로도 할 일은 무궁무진해. 하하.”

“파고드는 자세만 있다면 어디서든 행복할 수 있을 거야.”

이순재는 요즘 우리 시대의 ‘어른’으로 통한다. 그의 놀라운 연기 이력을 바탕으로 그가 사회를 향해 던지는 말들이 그만큼의 영향력을 갖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Oldies but goodies’를 다 고른 뒤에도 젊은이들을 위한 덕담을 잊지 않았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워낙 조건이 좋잖아. 얼굴도 잘 생겼지, 키도 크지. 그래서 인기도 빨리 얻을 수 있는 것 같아. 그럼 그 다음에는 연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깊게 고민하면서 계속 연기에 도전해 볼 수는 없을까?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누군가는 환경에 따라서 쉽게 성공할 수도 있을 거야. 그럼 성공했으니까 일을 그만하나? 아니야. 더 좋은 기회가 생겼다 생각하고 더 파고들어야지. 그런 자세만 있다면 어디서든 행복할 수 있을 거야.” 모든 사람들이 이순재처럼 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2009년에는 그가 평생토록 보여준 치열함을 배워 볼 수는 있지 않을까.

글. 강명석 (two@10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