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용 감독│보는 영화인 동시에 듣는 영화들

“제가 좀 느리잖아요” 1999년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2006년 <가족의 탄생>에 이르기 까지 7년, 그리고 <가족의 탄생>이후 3년. 김태용은 묘하게 자주 봐온 것 같지만 세상에 내어놓은 장편 극영화는 이제 겨우 2편인, 느리디 느린 감독이다. 전작 <가족의 탄생>에서 “헤픈 거.. 나쁜 거야?”라는 전대미문의 유행어를 남겼지만, 정작 본인은 자주 찾아와 헤퍼 보이기보다는 느닷없이 찾아와 평생 잊지 못할 밤을 선사하는 알뜰한 카사노바 같은 전략을 관객에게 구사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더딤의 이유는 상대적인 속도에 기인한다기 보다는 사방으로 펼쳐진 자신의 관심사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그의 태평양 같은 ‘오지랖’의 탓이 크다.

가끔씩 배우로 출연하는 즐거움을 놓지 않고, EBS <시네마 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남다른 ‘진행 본능’을 품고 있기도 하며, 베트남을 여행하는 친절한 히치하이커가 되어 시청자들에게 독특한 여행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런 김태용 감독이 무엇보다 무한애정을 숨기지 않는 대상은 바로 ‘음악’이다. 대학 노래 동아리 출신이라는 이력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윤도현 밴드와 영국 라이브 여행을 함께 한 다큐멘터리 영화 <온 더 로드 투>를 비롯해, 변사와 악단, 가수까지 등장시켜 재해석한 영화 <청춘의 십자로>의 무대도 이런 관심의 결과물들이다. “작년에 만든 옴니버스 인권영화 <달리는 차은>에서 필리핀 엄마가 아기에게 필리핀말로 자장가는 불러주는 장면이 있었어요. 자기 언어로 자기의 감정을, 그것도 노래로 표현하는 것만큼 좋은 게 없더라고요” 아쉽게도 이 장면은 음악 저작권 문제로 마지막 편집에서 빠지긴 했지만. 김태용은 그 만큼 영화와 음악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화학작용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진 감독이다.

“그 장면과 함께 그 음악을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이 행복을 느끼는 순간, 영화는 그 어떤 해석이나 평가의 너머에 존재하게 되는 것 같아요” <원스>나 <올모스트 페이머스>처럼 설명이 필요 없는 음악 영화를 비롯해 김태용 감독이 추천하는 다음 5편의 영화는 보는 영화인 동시에, 듣는 영화다. 아니 보고 또 들으니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영화들인 셈이다.


1.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 In The Rain)
1952년 │ 감독 진 켈리, 스탠리 도넌

“진 켈리가 빗속에서 춤을 추며 ‘singing in the rain’을 부르는 장면은 너무 유명해서 식상 할 수도 있지만 볼 때마다 마치 주인공의 친구가 되어 그 모습을 지켜보는 듯 흐뭇해져요. 누군가와 처음 사랑에 처음 빠졌을 때, 그 사람과 같은 감정이 통한다고 느낄 때, 그것을 비로소 확인 할 때. 그 벅찬 느낌을 이런 방법이 아니라면 또 어떻게 그려낼까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장면이었죠.”

유성영화로 넘어온 할리우드에서 뮤지컬은 이제 시대의 대세다. 너나 할 것 없이 뮤지컬 제작에 뛰어드는 가운데 예술가들의 도덕은 시험대에 오른다. 춤 실력 하나만으로 할리우드로 입성한 돈(진 켈리)과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캐시(데비 레이놀즈)에게도 뮤지컬은 희망을 허락하는 동시에 잔인한 현실을 목도하게끔 만든다. 그러나 이 전장에서도 사랑의 비는 따뜻하게 젊은 남녀의 어깨를 적신다. 주연에 공동 감독까지 맡은 배우 진 켈리의 자전적 영화이자, 뮤지컬의 시대에 바치는 가장 아름답고 흥겨운 뮤지컬 영화.

2. <사랑의 행로>(The Fabulous Baker Boys)
1989년 │ 감독 스티브 클로비스

“90년 대 초반 비디오로 처음 본 영화였어요. 특히 미셀 파이퍼가 붉은 드레스를 입고 그랜드 피아노 위에서 노래를 부르던 장면은 정말 매혹적이잖아요. ‘my funny valentine’은 쳇 베이커를 비롯해 여러 가수들의 버전이 있지만 이 영화에서 나온 음악이 가장 좋았어요. 미셀 파이퍼가 연기한 수지는 그냥 예쁘다, 가 아니라, 농염한 가운데 슬픈 기운이 감돌아요. 어쩐지 위태로워서 눈을 뗄 수 없는 누나를 지켜보는 순진한 10대 소년이 되는 느낌이랄까. (웃음)”

낙천적이면서 사려 깊은 형 프랭크 베이커와 진지하지만 까칠한 동생 잭 베이커. 이 베이커 형제는 한 때 이름을 날리던 재즈 피아노 듀오였지만 지금은 삼류 카바레에서 연주하는 것으로 근명하는 신세. 결국 매너리즘에 빠진 쇼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형제는 콜 걸 출신의 수지를 가수로 기용한다. 수지의 합류 이후 이들의 쇼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잭과 수지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운은 이 환상의 팀워크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극 중 형제로 나오는 보 브리지스와 제프 브리지스는 실제 형제이기도.

3. <그녀에게>(Hable Con Ella)
2002년 │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카에타누 벨로주가 ‘꾸꾸루꾸꾸 팔로마’(Cucurrucucu Paloma)를 부르기 시작하면 카메라는 그 자리에 모인 알모도바르 영화의 단골 배우들 얼굴을 비추기 시작해요. 사실 맥락 없고 뜬금없는 이상한 장면인데 묘하게도 전체영화의 흐름에서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가 않아요. 오히려 이 영화를 떠올리면 언제나 이 음악만, 이 장면만 생각날 정도죠. 음악을 그 어떤 배우보다 잘 활용하는 알모도바르의 연출력과 음악에 대한 경외심을 읽을 수 있는 장면이에요. 마르코가 그의 노래를 들으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이 순간, 어쩌면 그게 이 영화의 전부였는지도 모르죠.”

마르코는 투우사 리디아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는 투우경기 중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다. 남자간호사 베니그노는 아름다운 무용수 알리시아를 흠모하지만 알리시아 역시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다. 알리시아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으며 지난 4년 동안 그녀를 정성껏 간호하고 이야기를 건네는 베니그노. 마르코는 처음엔 베니그노를 이해할 수 없지만 점점 그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전염되어간다. ‘그녀’들의 왁자지껄한 수다가 아니라 ‘그’의 고해성사 같은 속삭임을 따라 새로운 장으로 넘어가는 <그녀에게>는 고통과 회환을 담은 피나 바우시의 퍼포먼스를 서막과 피날레처럼 영화의 시작과 끝에 둘러놓는다.

4. <라스트 왈츠>(The Last Waltz)
1978년 │ 감독 마틴 스콜세지

“당시 <비열한 거리>를 찍고 있던 스콜세지가 록 그룹 ‘더 밴드’가 해체 전 마지막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열일 제쳐놓고 뛰어가서 만들었다고 해요. 해체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진심 어린 축하를 담은 다큐멘터리죠. 밥 딜런, 조니 미첼, 링고 스타, 닐 영에 젊은 에릭 클랩튼까지 당대 뮤지션들이 서로 어떻게 교류했는지를 확인 할 수 있고, 그들을 사랑했던 한 젊은 감독의 순수한 경외심을 만날 수 있는 영화에요. 특히 밥 딜런이 자신의 백 밴드였던 이들에게서 록의 기운을 얻었다며 함께 연주하던 장면을 제일 좋아해요.”

1976년 ‘라스트 왈츠’라는 이름으로 마지막 콘서트를 연 캐나다 출신의 록 밴드 ‘더 밴드’의 공연 실황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안녕을 고하는 한 밴드의 16년간의 화양연화와 아쉬운 뒷모습을 담담하고 과장되지 않은 톤으로 새겨 넣은 이 영화는 30년 후인 2005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복원판으로 상영되기도 했다.

5. <커미트먼트>(The Commitments)
1991년 │ 감독 알란 파커

“소울 음악을 하겠다고 모인 더블린의 백인 노동자들이 밴드를 결성하고 결국 해체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는 영화에요. <커미트먼트>의 마지막 장면은 이 그룹 멤버 중 한명인 글랜 한사드가 홀로 기타를 메고 거리로 나와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끝나거든요. 그런데 <원스>의 첫 장면, 그가 더블린의 거리에 서서 다시 노래를 부르고 있더라고요. 마치 <커미트먼트>의 마지막과 <원스>의 시작이 연결된 듯한, 그 자리에서 늙어간 남자의 후일담을 듣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죠.”

“아일랜드 사람은 유럽의 흑인이야. 그러니까 소리치라고. 나는 자랑스러운 흑인이라고!” 소외 받은 지역, 지독한 궁핍을 업고 살아가는 아일랜드 더블린의 사람들. 동네 깡패에 주정뱅이, 하릴없는 동네 아가씨에 늙은 색광까지.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만이 진정 흑인들의 소울 음악의 영혼을 이해 할 수 있다고 믿고 ‘앤드 앤드 앤드’라는 그룹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로디 도일의 원작을 영화화 한 작품.


새로운 ‘영화의 탄생’을 기다리며

“그 사이 게으름을 너무 피워서 이젠 정말 열심히 써야 해요(웃음)” 현재는 만사 제쳐두고 오롯이 시나리오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김태용 감독의 새 영화 모티브는 “가까운 선배의 경험담”에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 “선배가 이혼을 하고 전 부인이 재혼을 했는데, 재혼한 새 남편에게도 남자 아이가 하나 있었대요. 어느 날 선배가 자기 딸이 새로운 남동생과 함께 있는 걸 봤는데, 그 풍경이 어찌나 ‘진짜 가족’처럼 보이던지 참 괴상한 기분이 들었다는 거예요.” 이혼한 4명의 남녀, 그들 사이에 있는 두 명의 아이. 굳이 마주치지 않아도 될 이들이 돌연 실종된 아이 때문에 한자리에 모이게 되는 상황에서 김태용 감독의 새 영화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의도 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가족시리즈처럼 보일까 걱정”이라는 이 영화는 오히려 “사랑에 빠졌다, 헤어졌다, 하는 두 사람 사이의 상태가 아니라, 사랑에 빠졌을 때, 그리고 헤어질 때 우리가 과연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영화”가 될 것이라 귀띔 한다. 가족의 탄생이건 사랑의 탄생이건, 우리가 기대하는 건 김태용 감독이 만들어낼 새 ‘영화의 탄생’일 테다. 그리고 더디 가는 그의 길에 걱정이 없는 것은 느릿해도 결국 할 말은 다 하고야 마는 그의 뚝심 어린 말투를 잘 알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