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고│괜찮아, 누나가 이번 달에 인센티브도 받았어

‘왜 아직도 입장을 안 시켜주지…’ 김수연(28세. 가명)씨는 생각했다. 날은 덥고 단체복 우비는 답답하고 앞에 서 있는 팬들의 줄이 끝도 없는데 시간은 점점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이 김수연 씨의 바로 앞에서 줄을 끊고는 외쳤다. “선착순인데 자리 다 찼어요. 여기서부터 입장 안 됩니다!” 김수연 씨가 팬클럽 임원에게 매달렸다. “팬미팅인데 선착순이 어딨어요! 저 첫날 만오천 원 분명히 입금했거든요?” 임원이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만오천 원이면 반 밖에 안 낸 거네. 들어가서 왼쪽 눈으로만 봐요” 네? 뭐라구요? 자리에 주저앉은 김수연 씨의 목소리가 점점 다급해졌다.

AM 7:00 헉…무서운 꿈을 꾸었구나. 잠에서 깨어난 김수연 씨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꿈에 나온 것은 김수연 씨가 10년 전 좋아했던 아이돌 그룹 ‘태평천하’의 팬미팅이었지만 김수연 씨는 다짐했다. ‘오늘은 꼭 레전드 팬클럽 가입비 입금해야지’ 레전드는 김수연 씨가 좋아하는 5인조 아이돌 그룹이다. 3개월 전 2집 앨범을 내고 공식 팬클럽 ‘전설의 고향’을 모집 중인데 김수연 씨는 팬미팅에 같이 갈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가입을 미루던 중이었다. ‘혼자서 밥도 먹고 혼자서 영화도 보는데 혼자서 팬미팅 못 갈 것도 없지’ 김수연 씨는 선착순의 악몽을 되새기며 인터넷 뱅킹으로 3만원을 입금했다.

AM 8:40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길, 김수연 씨는 레전드에서 제일 좋아하는 멤버 ‘광명’에게 UFO 문자를 보낸다. [추워서 출근하기 싫다. 하지만 돈 벌어야 광명이네 앨범 사주지ㅋㅋ] 아무리 생각해도 경호라는 멀쩡한 이름을 두고 광명이는 참 쓸데없는 작명이다 싶지만 그게 레전드 소속사 사장님의 방침이라 어쩔 수 없다. 레전드의 선배였던 태평천하에서 김수연 씨가 좋아했던 태풍 역시 본명은 태원이라는 평범한 이름이었다. ‘…아직 자나?’ 벌써 38번째 보내고 매번 씹히면서도 혹시나 싶어 잠시 답장을 기다려 보지만 역시 오지 않는다. 우표도 250원인 세상에 고작 문자 한 통 보내는 데 300원씩 드는 건 억울하지만 그래도 다른 팬들이 [누나 힘네세여 샤방샤방 광명이가 있잖아여^^] 같은 답장을 받아 인증사진을 올린 걸 보면 죽기 전에 답장 한 번 받아봐야겠다 싶어 9,900원 짜리 월정액도 끊었다. 가끔 [광명아 점심 먹었니? 누난 순두부찌개 먹었는데 맛있었어.]나 [오늘 소개팅 나온 남자가 글쎄 너 태어났을 때쯤 대학 들어갔대. 누나 진짜 늙었나봐 T_T] 따위 혼잣말을 보내기도 한다.

PM 3:00 오후에 사무실로 택배가 도착했다. 이틀 전 주문한 레전드 2집 E버전이다. 처음에는 24페이지짜리 화보집이 들어 있는 A 버전과 레전드의 숙소 공개 영상 및 멤버별 셀프 카메라가 들어 있는 B 버전이 동시에 발매되었다. 김수연 씨는 물론 두 장을 함께 샀다. 그리고 얼마 뒤 스페셜 뮤직 비디오와 신곡 2개가 담긴 C 버전이 발매되었다. 인터넷에서는 A, B, C 버전을 패키지로 묶어 8,300원을 세일해 팔기 시작했지만 김수연 씨는 따로 살 수 밖에 없었다. 멤버 자작곡과 자켓 촬영 미공개 사진이 들어간 D 버전 역시 샀다. 그리고 더 이상은 없을 줄 알았는데 E 버전도 나왔다. 다음 달 발매될 레전드의 뉴질랜드 사진집에서 미리 공개되는 사진 16컷과 겨울맞이 보너스 트랙 ‘군밤타령’이 담겨 있다고 했다. E 버전을 주문하며 김수연 씨는 생각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Z 버전까지 나오더라도 다 살 테다’ 그런데 CD가 담긴 상자와 따로 온 포스터 통이 문제였다. 포스터가 구겨지지 않도록 종이로 된 원통에 넣어 보내주는 건 고마웠지만 회사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하루 종일 “그 통에 든 게 뭐야?”라고 묻는 직원들에게 김수연 씨는 “그..그림 한 점 샀어요. 요샌 인터넷 쇼핑몰에서도 팔더라구요”라고 둘러댔다. 누구의 그림이냐며 지대한 관심을 보인 본부장님께는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대답했다. “신윤복의 미, 미인도요..”

PM 9:00 퇴근 후 김수연 씨는 가장 편한 복장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하루 종일 못했던 팬질을 재개한다. 캔맥주를 마시며 즐겨찾기에 늘어서 있는 레전드와 광명의 팬 사이트를 찾아다니며 영상을 다운받고 사진을 저장하는 게 김수연 씨의 낙이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레전드 자료 때문에 하드용량이 부족해지고 있긴 하지만 예전 태평천하의 프로필 사진과 잡지,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로 방 안이 가득 찼던 시절에 비하면 10만원 안팎의 외장 하드 하나 사서 다는 것쯤은 별 일도 아니다. 그보다 요즘 더 신경 쓰이는 것은 다음 주로 다가온 뮤직 컨트리시상식이다. 레전드가 엔딩을 장식할 게 확실시되는 이 시상식의 입장권을 얻기 위해 김수연 씨는 온 가족의 아이디를 다 동원해 매일 투표 중이다. 심지어 1923년에 태어나신 할아버지마저 레전드를 최고인기가수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계시다는 걸 가족들에게 들키면 김수연 씨는 호적에서 파일 지도 모르는 위기인데 도저히 당첨의 기미가 안 보인다. 그래서 김수연 씨는 한 달에 5천 원짜리 유료 회원으로 등록해 VIP 투표도 하고, 시상식을 주최하는 방송사에서 런칭한 게임도 다운받아 하루 한 시간씩 꼬박꼬박 들어간다. 게임이라면 테트리스도 귀찮아하는 김수연 씨가 이 게임을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한 시간 게임을 할 때마다 입장권 응모에 쓸 수 있는 쿠폰을 한 장씩 주기 때문이다.

다음 주 그러나 결국 뮤직 컨트리 입장권 당첨자 명단에는 온 가족 중 한 명의 이름도 올라 있지 않았다. 암표라도 구해 볼까, 김수연씨는 생각했지만 가격이 20만원도 넘는다는 소문에 포기했다. 게다가 남동생이 어디선가 옮은 바이러스 때문에 컴퓨터 하드의 레전드 자료를 모두 날려서 대판 싸우고, 억울한 마음을 담아 보내 본 UFO 문자는 여전히 54전 54패. 회사에서는 괜히 부장님께 깨지고 야근하고, 바람은 불고 날씨는 추워서 초라한 기분 뭐 같은 채 퇴근하던 김수연 씨는 아무 생각 없이 55번째 UFO 문자를 보냈다. 물론 답장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쳇, 콘서트 하면 제일 비싼 표 끊어서 가야지’ 생각하던 김수연씨의 휴대폰이 갑자기 깜박였다. [누나 퇴근 잘 해요^^] 광명으로부터의 첫 답장이었다. 버스 안 사람들이 깜짝 놀라도록 환호성을 지르고 내린 뒤 날듯이 집에 달려 온 김수연 씨는 당장 컴퓨터를 켜고 레전드 팬까페에 접속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UFO자랑] 광명이한테 답장 받았어요! 난 오늘부터 영원히 광명이의 노예♡”

일러스트레이션 루나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