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아 작가│“사는 게 다 그렇지”라고 공감했던 드라마

홍진아 작가는 드라마의 창작자인 동시에 드라마의 열렬한 팬이다. 방영되는 드라마의 대부분을 초반 몇 회라도 모두 챙겨본다는 그는 좋아하는 드라마가 몹시 다양한 데다 작품에 대한 묘사 역시 눈에 선하도록 생생하게 펼쳐 놓는다. 아무리 오래 지난 작품이어도 주인공들의 감정은 물론 그 순간 그들의 표정, 카메라 앵글, 인상적인 대사, 조연들의 캐릭터까지 빠짐없이 기억하고 애정을 가득 담아 이야기하면서 그가 덧붙였다. “어떤 장르든 드라마는 사람 사는 얘기잖아요. ‘나만 이런 게 아니라 다들 그렇구나’ 하는 연민이 생기고 위로도 받는 얘기를 좋아해요. 그리고 조연들에게도 각자의 인생이 있는 작품이 좋아요. 제가 주인공으로 살아보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웃음)”

MBC <베스트극장> ‘태릉선수촌’을 비롯해 <오버 더 레인보우>와 <베토벤 바이러스>가 어떤 세계 안에 모인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의 이해와 욕구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순간들을 반짝이게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그런 애정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주인공’이 아닌 ‘사람들’의 드라마를 기대하게 하는 홍진아 작가로부터 ‘사는 게 다 그렇지’라며 공감했던 드라마들에 대해 들었다.

MBC <애인>
1996년 연출 이창순, 극본 최연지

“불륜이라는 소재보다 멜로가 정말 촘촘하고 디테일하게 펼쳐진 드라마였어요. 한 눈에 반해서 타오르는 사랑이 아니라 힘든 상황에서 만난 두 남녀가 서로 조금씩 위로하면서 가까워지는 이야기였는데, 결국 둘은 가정으로 돌아가고 헤어져요. 마지막은 몇 년 뒤 두 사람이 각자 가족과 함께 롯데월드에 갔다가 마주쳐서 인사하고 안부를 나누고 돌아서는 장면이에요. 돌아선 사람이나 바라보는 사람이나 눈물이 고이면서 멀어지는데 카메라는 부감 숏으로 멀리 빠져서 사람이 바글바글한 롯데월드의 전경을 비추죠. 마치 ‘이 많은 사람들이 각자 그런, 자기만의 사연을 갖고 텅 빈 가슴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어떤 멜로드라마에서도 그렇게 멋진 엔딩은 못 본 것 같아요”

日 <롱 베케이션>(ロングバケション) 후지TV
1996년

“여자는 결혼식 날 신랑이 도망가 버린, 안 팔리는 모델이고 남자는 소심한 성격에 역시 안 팔리는 피아니스트인데 어쩌다 동거를 하게 돼요. 둘 다 세상의 마이너리티인데 여자가 그런 자기 인생을 한탄하니까 남자가 이런 말을 해 줘요. ‘긴 휴가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뭘 해도 안 되는 때. 그럴 때는 신이 준 휴식이라고 생각해요. 무리하지 않는다. 초조해하지 않는다. 분발하지 않는다. 흐름에 몸을 맡긴다.’저도 힘들 때였기 때문에 머리를 쾅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그건 정말 살면서 바닥을 쳐 본 사람이, 그 의미를 수십 번 곱씹어야만 나올 수 있는 말이거든요. ‘죽기 전에 저런 작품 한 번 써 보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美 <배틀스타 갤럭티카>(Battlestar Galactica) Sci Fi
2003년~

“우주의 어느 별에서 기계인 ‘사일런’이 자신을 만들어 낸 인간들에게 반란을 일으키는데 우연히 살아남은 인간들이 전설 속 이데아로 남아 있는 지구를 찾아 나서는 내용이에요. 극 중에서 전함의 함장이 ‘나는 지구의 위치를 알고 있고 우리는 지구를 향해 간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거짓말이에요. 나중에 거기에 대한 추궁을 받으니까 ‘우리에겐 생존이 목표다. 살아남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 목표가 지구일 뿐이다’라고 말하죠. 그렇게 매 장면마다 들어있는 의미와 철학, 완전체이면서도 감정을 가진 인간을 부러워하는 사일런의 내면, 대작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심리 묘사와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까지 너무나 훌륭해요. 그래서 재미있게 보다가도 ‘저런 작품은 내가 죽을 때까지 못 쓰겠구나’하는 자괴감이 들 만큼 부럽고 질투 나는 작품이에요”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싶어요”

<베토벤 바이러스>를 끝내고 휴식기에 접어든 홍진아 작가는 봄이 오면 동생 홍자람 작가와 함께 칠순의 어머니를 모시고 한 달 동안 유럽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다. “제가 운전해서 다닐 건데, 이렇게 공표해놓지 않으면 흐지부지될지 모르니까 미리 말해 놓는 거예요. (웃음)” 그리고 다음 작품은 내년 하반기 방영을 목표로 준비할 예정인데 소재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방향은 다음과 같다. “<태릉선수촌>의 국가대표팀이나 <베토벤 바이러스>의 오케스트라처럼 새로운 이야기에 맞는 독특한 집단을 찾고 있어요. 그리고 어쨌든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 목표가 확실한 사람들에 대해 쓰게 될 것 같아요.”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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