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호│목소리가 매력적인 남자 가수들

“이겨내야죠.” 2008 베이징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최민호는 조용히, 그리고 여전히 종결어미에 ‘;;;’ 표시가 되어있을 것만 같은 수줍은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이겨내며 유도선수로서의 삶을 이어왔다. 감량에 대한 스트레스와 폭식에 대한 유혹을, 올림픽 금메달 획득에 실패하면서 쏟아진 질책의 시선을 이겨내며 그는 지난 올림픽을 통해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태릉선수촌에서 자신 앞에 놓인 장애들을 이겨낼 준비에 들어갔다.

놀랍고도 재밌는 건 “이겨내겠다”는 그 한 마디만으로도 올림픽 메달리스트로서, 또 한 사람의 체육인으로서 그가 느끼는 중압감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말의 무게감이 다르다고 할까. 한판승으로 루드비히 파이셔를 꺾으며 올림픽 금메달 획득을 확정짓자 기쁨의 눈물을 펑펑 흘리고, MBC <황금어장>의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조금이라도 곤란한 질문을 받으면 우물쭈물 거리면서도 자신의 속내를 밝히던 모습 그대로,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진심이 그대로 묻어나온다. 화려한 수사의 데코레이션을 걷어내면서 오히려 말 속에 숨어있던 감정의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는 걸까. “올림픽이 끝난 지 한참 지난 요즘도 인터뷰 요청이 많지만, 아직도 남 앞에서 말하는 게 운동보다 어렵다”는 이 스포츠 스타는 “그래도 이런 식으로 찾아주시면 좋죠. 그런데 훈련에 지장이 있으면…안되는데…아유 참.”이라며 역시 쑥스럽게 웃는다. 거짓말 혹은 허세가 넘쳐나는 말의 홍수에 지친 사람들이 이 수줍은 미소의 순수 청년에게 느낀 청량감은 괜한 것이 아니다.

자, 그래서 이번 그의 플레이리스트는 다른 건 몰라도 유도선수 최민호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들이다. “정말 생각이 잘 안 나는” 중에도 “리스트에 오르지 않은 다른 가수들이 서운해 하지 않을지” 한참을 고민하며 골라준 “목소리가 매력적인 남자 가수들”이라는 테마 속에서 우리는 허세의 거품과는 거리가 먼 그의 담백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 김동률의 <Shadow of Forgetfulness>
“이 곡 아시죠? 제가 아는 사람들도 다 좋아하더라고요.” 유난히 곡 선정에 힘겨워하던 최민호 선수가 가장 먼저 단박에 추천한 곡은 김동률이 첫 솔로 앨범에서 당시 고등학생이던 이소은과 함께 부른 ‘기적’이다. 그는 동시대의 이적, 유희열 등과 함께 이른바 ‘고급 가요’로 불리던 음악의 기틀을 마련한 뮤지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가수라면 고음이라고 생각하던 중고등학생들에게 목소리 톤의 중요성을 가르쳐준 탁월한 보컬리스트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들었는데 제가 원래 좋아하던 김동률의 목소리에 정말 맑고 예쁜 여자 목소리가 듀엣으로 나오는 거예요. 이적 씨랑 카니발에서 노래 부를 때도 참 잘 어우러진다고 생각했는데 여자 목소리랑도 잘 어울리더라고요.” 이 곡에서 그가 가장 놀란 건 이소은의 역량이다. “그런데 옆에서 이렇게 노래를 잘 부르는 여자가 저랑 같은 또래의 고등학생이라는 거예요. 정말 깜짝 놀라고, 나는 뭐하나 싶기도 하고. 하하.”

2. K2의 <모래시계 (Happy Together)>
한 때 노래 좀 한다는 남자들이 자신의 고음을 뽐낼 때 항상 부르던 곡 중 하나가 K2 김성면의 ‘잃어버린 너’다. 반가성의 목소리로 3옥타브에 달하는 고음을 질러대던 김성면은 고음 보컬을 동경하던 이들의 로망이기도 했다. 그것은 노래방에서 K2의 ‘유리의 성’을 즐겨 부른다는 최민호 선수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냥 노래방에 가면 한 번 정도 불러줘야 속이 후련해요. 고음처리요? 아유, ‘무릎팍 도사’에서 아담의 ‘세상엔 없는 사랑’ 부른 거 들어보셨을 거 아니에요. 고음은 어림도 없죠. ‘삑사리’가 나서 같이 온 사람들이 웃든 말든 그냥 부르는 거예요. 제가 뭐 가수가 아닌데 노래를 못 부르는 게 흉은 아니잖아요. 어차피 스트레스 풀러 오는 노래방에서 ‘삑사리’ 나는 거 걱정하면서 노래 고르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자기가 고음 보컬인양 기분 내면 되는 거죠. 그런데 또 이 기사 나가고 난 다음에 사람들이 불러달라고 할 걸 생각하면 그건 좀 걱정스럽네요.”

3. 김건모의 <Soul Groove>
“제가 아는 노래가 다 옛날 것 밖에 없는데…”라며 말끝을 흐리던 최민호 선수가 고른 가장 최신 곡은 김건모의 ‘사랑해(Fall In Love)’다. 하지만 이 곡이 수록된 <Soul Groove> 앨범이 90년대 김건모의 파트너였던 김창환과의 13년만의 협업이라는 걸 떠올리면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어쿠스틱한 반주에 비슷한 멜로디를 반복하면서도 목소리의 톤과 뉘앙스 변화만으로 곡에 생기를 불어넣는 김건모의 역량은 전성기의 그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대단했잖아요, 김건모. ‘핑계’랑 ‘잘못된 만남’ 부를 때 정말 최고 인기 가수였는데. 그나마 노래도 좀 듣고 따라 부르기도 하던 학생 시절 잘 나갔던 가수들이 오랜만에 앨범을 내면 반갑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그래요. 아니 꼭 그래서 이 노래를 고른 건 아니고요. 그냥 나도 모르게 흥얼흥얼거리게 되는 그런 묘한 중독성이 있는 노래 같아요.”

4. 토이의 <Thank You>
운동할 때 즐겨듣는 노래는 없느냐는 질문에 최민호 선수는 한참을 생각하며 말했다. “그…있잖아요, 토이 노래인데, 아…제목이 잘…아…되게 신나는 건데. (혹시 ‘뜨거운 안녕’이요?) 네, 맞아요. ‘뜨거운 안녕’.” 그의 말대로 토이의 ‘뜨거운 안녕’은 이별의 순간을 담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흥겨운 신시사이저 연주가 인상적인 곡이다. 지난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에서는 이 슬픈 이별 가사를 들으며 수 만 명의 관객들이 폴짝폴짝 뛰며 즐거워하는 기묘한 광경이 연출되기도 했으니 운동할 때 이 곡을 듣는다는 설명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 거 있잖아요. <록키> 주제곡이 나오면 왠지 뛸 때 힘이 솟는 것처럼 이 노래의 전주가 흘러나오면 뛰거나 웨이트 트레이닝을 할 때 더 잘 되는 기분이 들어요. 사실 거의 머리가 텅 빌 정도로 힘든 상황에서 듣는 노래니까 가사가 어떤 내용인진 잘 모르죠. 하하. 그냥 ‘이젠 안녕’하던 그 부분만 좀 들리는데 그 부분도 왠지 모르게 신나요.”

5. 김형중의 <Kim Hyung Joong 1>
스스로는 ‘아는 노래도 별로 없고, 이런 걸 추천할 능력도 안 되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김동률, 토이, 그리고 김형중으로 이어지는 최민호 선수의 추천 리스트는 확실히 차분하고 고급스런 90년대 말 가요들의 어떤 정서를 관통하는 듯 하다. 그가 추천한 마지막 곡인 김형중의 ‘그랬나봐’는 2003년 곡이지만, EOS 출신 보컬 김형중의 울림 좋은 목소리에 유희열의 감성이 더해진 90년대 감성의 발라드다. “한동안 TV랑 거리에서 이 노래만 울려 퍼지던 시기가 있었어요. 마침 날도 추울 때였는데 노래가 참 따뜻한 느낌이라서 더 어울렸던 것 같아요. 멜로디랑 가사가 귀에도 쏙쏙 들어오고 따라 부르기도 좋은 곡이라 참 좋아해요. 저는 김동률 씨나 김형중 씨처럼 듣기 편한 목소리가 참 좋더라고요. 사실 운동선수인 제가 음악성이 있거나 그런 건 잘 모르죠. 그냥 제 귀에 듣기 좋은 음악, 그게 저에겐 좋은 음악인 거 같아요.”

“이겨내야죠”

최근 최민호 선수는 9월에 있는 유도 세계선수권대회 출전을 위해 태릉선수촌에서 몸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많게는 하루에 12게임을 뛰어야 하는’ 살인적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다른 것보다 지구력 강화 훈련을 하고 있다고. 이번에 그가 출전하는 체급은 베이징 올림픽 때와 동일한 60㎏급이다. 감량 문제 때문에 66㎏급으로 상향 조정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 체급에 있는 가능성 있는 후배들을 위해 현재의 체급을 유지하기로 했다. 꼭 운동선수를 해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소위 ‘나잇살’이란 걸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올해 서른이 된 그가 느낄 감량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유도 강국인 한국에서 ‘같은 체급 안에 있는 까다로운 선수들’을 제치고 국가대표가 되는 과정 역시 험난하다. 힘들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다시 돌아오는 한 마디, “이겨내야죠.” 이토록 멋대가리 없는, 하지만 무한한 신뢰가 느껴지는 대답을 하는 그를 어떻게 응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가 여태 그래왔듯 이번에도 스스로를 이겨내며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있길 기대해 본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