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이제야 다시 스타트 선에 선 것 같아요” -1

SBS (이하 )는 지난 3월 동시에 시작된 방송 3사의 수목 미니 시리즈 가운데 한 번도 시청률 1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탄탄한 구성과 개성 있는 캐릭터, 적재적소에 캐스팅된 배우들은 마지막까지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냈고, 타이틀 롤을 맡은 김소연은 상반기 최대의 수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꼭 ‘혼을 담은 연기’가 아니더라도 배우와 캐릭터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순간의 쾌감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그가 거둔 성과는 흥미롭다. 그렇게 해서 90년대를 대표하는 트렌디 드라마의 스타였던 여배우는 오랜 공백과 도전의 시간을 거쳐 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그리고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연기가 절실하다고 말한다. 김소연과의 인터뷰는 즐거웠지만 예고 없이 가슴이 찡해지는 순간이 찾아왔던 것은 그 안에 담긴 진심 때문이었다.

가 종영한지 한참 지났는데도 여전히 열기가 남아 있는 느낌이에요.
김소연 : 네, 16부가 끝인데 팬 분들이 만드신 17부 예고가 올라왔죠! 대본도 계속 나오고 있다던데, 하하. 사실 시작할 때는 책임감과 부담감이 너무 커서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아직도 ‘검프앓이’를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제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원톱은 아니니까요”
김소연│“이제야 다시 스타트 선에 선 것 같아요” -1
는 SBS 을 함께 한 진혁 감독, 소현경 작가의 작품이라 기대가 높았는데 처음 캐스팅을 제안 받았을 때는 어땠나요.
김소연 : KBS 가 끝나고 나서는 아주 상반된, 정말 밝은 캐릭터를 너무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의 선화를 했기 때문에 밝은 캐릭터는 오히려 잘 안 들어올 것 같았고, 실제로 선화와 비슷해서 거절한 배역도 있어요. 공백을 갖기는 싫어서 고민하던 중에 시놉시스를 받았어요. 사실 제가 SBS 에서 차갑고 팜므파탈적인 여자를 연기할 때 진혁 감독님이 조연출이셨거든요. 그래서 대본도 좋았지만 평소 제 성격을 잘 알고 계시는 분이 이런 작품을 보내주셨다는 게 기뻐서 바로 하겠다고 했어요. 그 뒤로 한 달 정도를 기다려야 했는데, 알죠. 제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원톱은 아니니까 김소연이란 사람을 타이틀 롤로 쓸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 많으셨을 거라는 걸. 그래서 제가 아닌 다른 배우가 캐스팅되었다는 ‘카더라’가 돌아다니는 걸 보면서도 ‘아, 내가 또 안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서운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다 캐스팅 확정 소식을 들었을 땐 큰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죠.

“누구나 쉽게 생각할 만한 원톱은 아니”라고 스스로 평가했다는 게 놀라운데요.
김소연 : 인터넷을 보면 “로맨틱 코미디의 핵심은 여주(여주인공)의 밝고 사랑스런 매력인데 과연 김소연이…?”라는 우려가 많았어요. 저도 중고등학교 때 맥 라이언이나 줄리아 로버츠 같은 배우들의 작품을 보며 자랐고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로맨틱 코미디는 제가 정말 원했던 장르지만 저 자신의 거울은 제가 못 보는 거니까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부담이 컸어요. 또 어떻게 보면 그렇게 러블리한 외모도 아니고 선이 좀 큰 얼굴이니까 어느 순간부터 로맨틱 코미디는 제가 감히 꿈꿀 수 없는 장르라고까지 생각되더라구요.

확실히 로맨틱 코미디는 주인공의 사랑스러움을 시청자들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전달하느냐에 작품의 성패가 달려 있는 것 같아요.
김소연 : 저는 마혜리라는 캐릭터가 진짜 좋았는데, 그래서 더 큰 고민이 있었어요. 김소연 이라는 고정된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 그 전에 북한 공작원 역을 했던, 또 그 전에 10년 동안 따라붙은 MBC 허영미가 마혜리라는 역할을 하는 바람에 이 캐릭터를 사람들에게 설득시키지 못하게 될까 봐.

그런 면에서 마혜리라는 캐릭터에는 어떻게 접근하려고 했나요.
김소연 : 제일 염두에 둔 건 전형적인 데서 탈피하자는 거였어요. 사람은 하나하나 다 다르지만 대본에는 마침표나 느낌표 같이 정해진 룰이 있거든요. 저는 그 전까지 마침표는 꼭 마침표대로, 느낌표는 꼭 느낌표대로 충실히 연기하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마혜리기 때문에 가능한 연기를 한 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그런 룰을 다 무시했던 것 같아요. 느낌표가 있는데 끝을 흐리기도 하고 물음표처럼 올리기도 하고, 평소 제 말투나 웃음소리를 적용시켜 보기도 하고. 사실 ‘이래도 되나?’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작가님이 대본에 제 말투를 그대로 써 주시고 감독님도 제 시도에 흔쾌히 오케이해주신 덕분에 카메라 앞에서 처음으로 편안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는 마혜리의 성장기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선입견 속에서 힘들었던 저 역시 마지막에는 많이 웃을 수 있게 해 준 작품이에요.

“ MC가 제 소원이에요”
김소연│“이제야 다시 스타트 선에 선 것 같아요” -1 이나 의 차갑고 도도한 이미지가 강하지만 KBS 나 에서는 에서와 흡사하게 엉뚱하고 밝은 모습을 보여줬잖아요?
김소연 : 사실은 그런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는 것도 두려웠어요. 배우는 연기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제 정신없는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많거든요. 2008년 처음 에 나가기 전에도 안 하겠다고 1년을 버텼어요. 그런데 매니저가 “너는 말로는 매일 로맨틱 코미디, 풀어지는 연기를 하고 싶다고 하면서 항상 감추고만 있으면 누가 너의 그런 모습을 알고 써주겠냐”면서 설득해서 용기를 냈던 거예요. 그래서 시작하기 전에 주문을 외웠어요. ‘나처럼 하자. 욕먹더라도 나처럼 하고 욕먹으면 덜 억울하겠지, 웃기면 웃고 안 웃기면 안 웃고 모르겠으면 그냥 모르겠다고 하자’ 그렇게 정말 힘들게 촬영을 했는데 재밌다는 반응이 있어서 너무 신기했어요. 그래서 그 때부터 저의 다른 모습을 보여드리는 데 한 걸음, 한 걸음씩 욕심을 냈던 건데 까지 차근차근 오게 된 것 같아요.

예전에 했던 작품 안에도 로맨스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에서 마혜리와 서변(박시후)의 러브라인은 유독 몰입도가 높은 편이었는데 이런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 전과 달라진 게 있나요?
김소연 : 워낙 작품에 빠져 있었으니까 그게 그렇게 어렵지가 않았어요. 그리고 어떨 땐 제가 이렇게 나이 든 게 싫은데(웃음), 그런 생각도 들어요.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내공은 1년 전이어도 달랐을 거고 그 전이어도 달랐을 거예요. 경험 같은 것도 무시 못 하는 거고, 짝사랑 같은 것도 무시 못 하는 거고. 찍으면서 알게 모르게 떠오르는 것들이 많아서 도움을 받은 것 같아요. 아마 또 내년에 하면 다르겠죠. 하하.

전 3년 정도의 공백기 동안 비축한 에너지도 도움이 됐을 것 같아요.
김소연 : 네, 그 땐 최고로 내성적일 때라서 집 밖에도 안 나가고 거의 컴퓨터만 하면서 오타쿠처럼 지냈는데, 하하. 쉬니까 에너지가 넘치고 뭔가 더 하고 싶고 채워 넣은 걸 발산하고 싶은데 할 데가 없었거든요. 그 때 꾹꾹 눌러왔던 걸 요즘 조금씩 꺼내놓고 있다는 게 좋아요. 지금도 그걸 생각하면 힘들 게 없어요. 그렇게 절실히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고 과감히 나를, 어려움을 감수하고 써주시는 분들이 계실 때 모든 걸 뿜어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요.

그런데 십대 때부터 스타의 자리에 있다가 어느 시점에 일이 없어졌을 때는 감정적인 이유나 경제적인 이유로 자신과 잘 맞지 않는 작품을 선택하기도 쉬웠을 텐데 그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했어요.
김소연 : 여러 번 할 뻔 했죠. 하하. 물론 ‘안 했어야 되는 작품’은 없겠지만 안 했어도 되었을 만한 작품을 하려다가 안 된 적도 있고, 한 번은 ‘그거라도 해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중간에 캐스팅이 바뀌면서 굴욕 아닌 굴욕을 당한 적도 있어요. 그런 이유로 본의 아닌 공백이 생겼는데 그 다음부터는 오기가 생기더라구요. 기다려보자는 마음도 있었고, 자기최면으로 ‘내 운이 이게 다는 아닐 거야’라는 생각도 하면서 버텼는데. 지금 생각하면 저를 도와준 것 같지만 그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웃음)

열다섯 살 때 데뷔를 한 건 진지한 고민이 있었다기보다는 연기자에 대한 단순한 동경에서였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이십 대 초반에 출연한 에서는 진짜 아나운서 같다는 반응을 얻기도 했을 만큼 발음이나 발성을 비롯한 기본기가 좋다는 평가를 받아왔어요. 에서도 독특하지만 또렷한 대사 처리가 인상적이었구요.
김소연 : 때는 확실히 연필 물고 많이 연습했어요. 지금도 안 되는 발음이 있거나 하면 연필 물고 연습하고, 남들 다 하는 정도로 하죠. 요즘에는 드라마 시스템상 선생님들과 연기할 기회가 많지 않지만 제가 어릴 땐 선생님들이 현장에 많이 계셨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었던 것들이 있어요. 고등학교 때 했던 작품도 그렇고, MBC 같은 경우는 특히 나문희 선생님, 고두심 선생님과 매일 마주앉아 연기해야 했으니까요. 발음이나 발성에 대한 강박이 특별히 있지는 않았는데 일단은 제가 잘 해야 시청자들이 잘 들으실 수가 있으니까요.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을 해도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던데요.
김소연 : 너무 하고 싶어요! 꼭 써 주시면 좋겠어요. (웃음) 목소리로 할 수 있는 일에 관심이 많아요. 애니메이션 더빙도 해 보고 싶고, KBS MC가 제 소원이고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 DJ도 하고 싶은데 심야를 저한테 맡겨 주실지 모르겠지만. 정신없다고, 잠 깬다고! 하하.

“배우 김소연이 인간 김소연을 먹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소연│“이제야 다시 스타트 선에 선 것 같아요” -1 다양한 프로그램을 많이 보는 것 같아요. 토크쇼에서 한 얘기를 보면 요즘 아이돌에 대해서도 잘 아는 편인 것 같고.
김소연 : 아하하, 많이 알죠! 집에서 매일 SBS 봐요. 케이블에 나오는 옛날 드라마나 쇼 프로그램을 주로 보고, 제일 좋아하는 건 SBS 에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관찰하는 것도 쏠쏠하게 재밌는데 감동적이고 가슴 아픈 사연도 많아요. 정말 최고인 것 같아요.

외모는 도회적이고 이지적인 분위기인데 말투와 목소리가 굉장히 발랄한 편이라 서로 갭이 좀 생기는 것 같아요.
김소연 : 그래서 예전엔 일부러 목소리 톤을 낮추려고 하기도 했어요. 소속사 대표님도 한때는 제가 “아하하, 안녕하세요?” 하면 “목소리 고쳐. 외모처럼 행동해!” 하셨는데 어느 순간 포기하고 제 웃음소리 따라하세요. 참 신기한 게, 제가 오랫동안 감추거나 없애고 고치고 싶었던 것들이 마혜리로 인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거예요.

나의 본모습을 인정받았다는 이유 같은 건가요?
김소연 : 네, 직후에 욕을 많이 먹었어요. 가식적이라던가 귀여운 척 한다던가 하는 반응에 너무 상처를 받아서 동영상 인터뷰를 한참 피하기도 했어요. 저는 여러 매체와 인터뷰하지만 그 분들은 저를 처음 만나는 거고 이것도 인연이니까 어떻게든 잘 하려고 했던 것에 대해 사람들이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게 참 속상했어요. 그 때 메이크업 선생님께서 “사람들이 언젠가는 알아줄 거다”라는 말씀을 해 주신 게 아직도 기억이 나요. 그리고 정확히 10년 만에 제가 허영미에서 마혜리가 될 수 있었다는 게, 지금 이렇게 편하게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아요. 그래서 혜리가 너무 고마워요. 혜리로 인해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됐고, 고정된 배역만 들어오지 않게 됐고, 또 이제는 그런 배역을 다시 한다 해도 ‘연기’로 봐 주신다는 것도 다 고마운 일이죠. 정말 이제야 다시 스타트 선에 선 것 같고, 제가 늘 해야 했던 숙제를 덜어낸 것 같은 기분이에요.

지난해 로 KBS 연기대상 인기상을 수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감격하는 모습이 재미있었어요. 혹시 배우로서 스타성을 더 가지고 싶다거나 하는 바람도 있나요?
김소연 :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왜냐면 그런 것들 덕분에 제가 행복해지는 건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이제 검색어 1위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 같은 ‘셀러브리티의 허상’을 쫓고 싶지는 않아요. 예전에는 저도 그런 것들을 너무나 많이 쫓았지만 그게 얼마나 쉽게 사그라지는지, 또 거기 빠져 있으면 다른 게 안 보인다는 걸 알게 되니까 지금은 오히려 그런 것들로부터 담담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고 있어요.

허영미에서 마혜리가 되기까지 꼭 10년이 걸렸고 이제 30대가 시작됐는데 30대에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면 어떤 건가요.
김소연 : 손발이 오그라드는 얘기 같겠지만, 정말 지금 저는 머릿속이 연기로 가득 차 있어요. 배우 김소연이 인간 김소연을 먹어버렸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래서 쉬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 보고 싶어요. 이렇게 해서 ‘어떤’ 연기자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어요. 열심히, 다양한 캐릭터를, 진짜 연기 잘 하는 사람, 그리고 하고 싶은 작업을 늘 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기다리는 게 너무 힘들다는 걸 알아서요. (웃음)

글. 최지은 five@
사진. 이진혁 eleven@
편집. 이지혜 sev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