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원│아직도 보여줄 게 많은 여자

MBC 에서 가장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정다정이다. 미모의 성공한 동시통역사, 그러나 다정의 꿈은 더 늙기 전에 아이를 낳아 유모차 끌고 외출하는 것이다. 혼자 먹으러 가기엔 눈치 보이는 아구찜과 꽃등심 함께 나눌 남자도 절실하다. 하지만 가난한 남자, 키 작은 남자, 딸린 식구 많은 남자는 사양이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힘들게 공부해 번 돈으로 동생들 학비까지 댔으니 자신은 훌륭한 남자를 만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스펙’도 로맨스도 포기하지 못하는 사이 세월은 계속 흘러 서른넷이 되어 버린 다정은 조급하다. 자신을 차 버린 남자의 집을 찾아가 주사를 부리고 다른 남자에겐 저도 모르게 부담을 주다가 또 차인다. 모든 인맥을 동원해 소개팅 전선의 최전방에 나서고 괜찮은 남자를 잡기 위해서라면 내숭은 물론 거짓말과 갖은 연기도 불사하는 다정의 욕망은 지극히 속물적이지만 그만큼 현실적이기도 하다.

엄지원, 정다정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엄지원│아직도 보여줄 게 많은 여자
그리고 2010년을 사는 대한민국 골드미스의 무수한 욕망과 갈등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낸 캐릭터 정다정은 엄지원을 만나 불편함 대신 사랑스러움을 얻었다. ‘청담동 며느리’ 스타일로 꾸미고 조건 좋은 소개팅 자리만 찾아다닐 만큼 야심차지만 정작 남자의 진심을 읽지 못해 그 남자가 왜 갑자기 연락 않는지 모르겠다며 하소연하는 다정의 순진무구함을 완성시키는 것은 엄지원의 우유 같은 피부와 말갛게 비치는 눈동자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딱딱한 직선이라곤 없이 부드러운 곡선으로만 그린 듯 우아한 이 숙녀가 술에 취해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뻗어 눕거나 동안 경락 때문에 불그죽죽해진 뺨으로 포장마차에서 홀로 소주병을 기울이는 광경은 에서 가장 뛰어난 코미디를 그려내는 순간이기도 하다. 의 김인영 작가는 엄지원에 대해 “굉장한 준비성과 성실함은 물론 현장을 즐기는 성격과 남다른 의상 센스로 내가 생각했던 다정이보다 더 다정이를 잘 만들어 준 배우”로 평가한다.

올해로 데뷔 10년차에 접어드는 엄지원이 “여자가 하는 여자 이야기”를 하고 싶어 를 선택했고 이 작품을 통해 기존의 이미지와 전혀 다른 모습,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재능을 백 퍼센트 이상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몹시 흥미롭고 반가운 일이다.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커피 배달 오토바이를 몰며 깔깔한 경상도 사투리로 “로데‘오’거리에 커피숍 차리는 게 꿈”이라 말하던 영화 의 정애와, 순박한 광주 아가씨에서 7년의 세월을 건너 단단한 심지의 활동가로 변신한 의 세영, 단아한 얼굴 뒤에 어떤 속내를 감추고 있는지 끊임없이 궁금하게 만드는 의 영실 등 그가 그려온 독특한 궤적들은 일반적인 여배우의 성공 공식과는 달랐지만 겉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꽉 채워진 안쪽이 느껴지는 현실감의 중량은 꼬박꼬박 쌓이며 배우 엄지원을 만들었다. SBS 에 특별 출연해 좌중에게 폭탄주를 건네며 “원샷!”을 외쳐대던 여배우나 에서 청초해 보이지만 예상치 못한 순간 화르륵 폭발하는 현희의 ‘또라이’ 기질은 어쩌면 엄지원이 정다정이 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힌트였는지도 모른다.

대본 속 인물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연금술사
엄지원│아직도 보여줄 게 많은 여자
그래서 남편감은커녕 애인조차 없으면서 혼자 결혼 날짜를 잡으며 망상을 펼치고 결혼 상대에게 좋은 생일 선물을 받지 못하자 친구들에게 처량해 보이기 싫어 명품 백과 드레스를 12개월 할부로 구입해 허세 부리는 아이러니의 순간마다 엄지원의 발랄하면서도 톡 쏘는 말투와 짧은 눈 흘김, 콧등의 찡긋거림은 가벼워 보이지만 결코 단순하지는 않은 다정의 내면을 고스란히 그려낸다. 텍스트로만 존재하던 캐릭터에 달콤한 숨결을 불어넣은 상상력과 표현력은 현장에서의 별명이 F4, ‘네 번째 FD’일 만큼 스태프들의 허드렛일까지 나서 돕는 성격의 그가 지난 시간 성실하게 바쳤던 노력에 대한 보상일 것이다. 그리고 ‘남자들이 꿈꾸는 여자’를 넘어 ‘여자들이 이해하는 여자’를 통해 또다시 자신이 즐겁게 놀 수 있는 새로운 물을 만난 엄지원은 이제 “끝까지 가는” 캐릭터를 만나고 싶다고 말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보통은 아닐 거란 예감, 혹은 믿음이 든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