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희│“연기하기 전에 난 무생물 같았다”

지난 17일, 주인공 현준(이병헌)의 의문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떡밥’을 남기며 KBS2 가 종영했다. 미국드라마를 연상케 하는 이 열린 결말의 중심에는 아직까지도 의문의 존재로 남은 최승희(김태희)가 있다. 막판 반전의 주인공이 된 그녀는 덕분에 남자주인공을 따르기만 하는 그저 그런 수동적 여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좀 더 인상적인 여성 캐릭터로 남을 수 있었다. 드라마 방영 전부터 연기와 흥행에 대한 중압감에 시달려야 했던 김태희에게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그녀는 종영 다음날인 18일에 진행된 매체 공동인터뷰를 통해 종영에 대한 소감과 승희로서 지냈던 10개월이 연기자로서의 자신에게 주는 의미를 밝혔다.

이번 작품에 대해서는 감회가 남다를 거 같다.
김태희 : 보통 작품을 끝내면 시원섭섭하다고 하지 않나. 다른 작품에선 시원함이 더 컸는데 이번에는 섭섭함이 더 크다. 제작 기간 자체가 길기도 길었고, 내가 연기한 걸 편집실에서 모니터하고 내 아이디어도 좀 더 적극적으로 냈던 드라마라 지나간 장면들에 대해서도 ‘이건 이러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스트레스도 많았지만 애착이 많이 가는 드라마다.

“좀 더 확실한 엔딩이었으면 어땠을까”
김태희│“연기하기 전에 난 무생물 같았다”
엔딩에 대해서는 만족하나.
김태희 : 좀 더 확실한 엔딩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마지막 회에서 대통령을 암살할지, 아이리스 저격수들을 암살할지 고민하는 순간까지 승희는 미스터리한 인물이지 않나. 얘가 말하는 게 진실인 건지도 확신할 수 없고. 그런 것이 좀 더 명확하게 설명되는 엔딩이었으면 싶은 아쉬움은 있다.

말 그대로 후반부에서 미스터리의 키를 쥔 인물은 승희였는데 초반부의 승희를 연기할 때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나.
김태희 : 알지도 못했지만 작가님이 그걸 미리 계산하지 말고 연기하라고 주문했다. 뒤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냥 현재의 승희 모습에 맞춰 연기하면 된다고. 사실 나도 얘의 정체와 심리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 막판에 쪽대본 형태로, 그것도 순서대로가 아닌 뒤죽박죽인 상태로 신을 소화하려니 많이 혼란스러웠다. 그냥 그 신 하나 하나에 맞춰 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고민이 되지 않나. 그래서 최대한 집필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작가님에게 전화를 걸어 승희의 감정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 건지 확인하고 마무리를 했다. 만약 대본이 미리 다 나와서 내 정체를 안 상태였다면 거기에 딱딱 맞춰 연기하려 했을 거 같다.

정확히 결말은 언제 알았나.
김태희 : 19회, 20회는 방영 일주일도 채 남겨놓지 않고 나왔다. 주변에서 물어봐도 나도 모르겠다고 했다.

앞서 이번 작품에 대해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내서 애착이 간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장면들이 있나.
김태희 : 우선 작가님께서 대사의 토씨 하나 안 틀리길 바라는 타입은 아니라 배우의 성격을 캐릭터에 맞춰주는 게 있었다. 가령 캠퍼스 신에서 현준이 뒤에 따라 붙었을 때 원래는 “차 마시면서 노닥거리는 거 질색이에요”라는 대사였는데 그걸 “체질에 안 맞거든요”라고 바꾸고, 헝가리에서 현준에게 “죽더라도 같이 죽을 거야”라고 할 땐 원래 “지옥에라도 같이 갈 거야”라는 대사가 있었는데 마음에 와 닿지 않아 뺐다. 또 NSS에 침투한 테러리스트들과 싸우는 장면에서 감독님은 메스로 짧고 빠르게 제압하는 걸 생각했는데 나는 요원이라면 기본적 훈련을 거쳤으니 격투의 합을 길게 가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연기하면서 답답했던 부분이 많이 해소됐다”
김태희│“연기하기 전에 난 무생물 같았다”
그건 본인이 더 힘들어지는 일인데.
김태희 : 그 전에 일본인 다카시와 싸우는 신, 김소연 씨와 붙는 신이 있었는데 다카시 같은 경우는 나이가 있는 편이고, 김소연 씨는 여자라 좀 조심조심하는 면이 있었다. 그래서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 요원으로서 좀 더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하고 며칠 동안 액션스쿨에서 진짜 촬영한다는 생각으로 연습했다. 그냥 합을 맞추는 게 아니라 정말 악을 쓰고 고함을 질러가면서.

욕심이 많았던 만큼 후회되거나 아쉬운 장면도 있겠다.
김태희 : 사소하게 따지면 정말 많지. 개인적으로 1회 엔딩에서 현준이 약물로 고문 받는 걸 바라보는 장면이 많이 아쉽다. 그걸 실제로 보는 게 아닌 상황에서 카메라를 향해 최대한 감정을 잡아 눈빛으로 표현해야 하니까 힘들었다. 만약 이병헌 선배에게 부탁했다면 앞에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줬을 수도 있겠지만 며칠 동안 지하 벙커에서 고생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긴 미안했고. 그렇게 찍고 나중에 방송을 보니 마치 관조하는 듯한, 무슨 생각인지 모를 눈빛이 나오더라. 나는 좀 더 감정이 드러나길 바랐는데 감독님께선 조금 무표정한 눈빛이 더 강하고 좋다고 여기셨다.

이번 작품을 가장 진지하게 준비했고 일종의 터닝포인트가 되길 바란다고 했는데 끝나고 보니 그런 거 같나.
김태희 : 연기하면서 전에는 많이 답답했다. 남들은 쉽게 하는 거 같은데 나만 미궁 속을 헤매는 거 같고. 하지만 이 작품을 10개월 정도 찍고 많은 선배들의 조언을 들으면서 뭔가 답답했던 한 부분이 해소되고 채워진 거 같다. 연기를 하는 것도 조금은 편해졌고.

자신감이 붙은 건가?
김태희 : 약간은? 이번 작품이 잘 되어서 ‘김태희도 히트작이 있다’고 인식된 것도 기쁘고. (웃음)

“를 하면서 연기자의 가능성을 발견”
김태희│“연기하기 전에 난 무생물 같았다”
결과론적으로 잘 되어서 정말 다행이지만 방영 전에는 스트레스가 엄청났을 거 같다. 하반기 최대 기대작의 여자 주인공을 맡은 것에 대해서.
김태희 : 정말 엄청났다. 일본에서 현준과 밀월여행을 즐기는 장면을 찍고 헝가리로 갔는데 연결고리 없이 그냥 그 분량의 대본만 나오니까 내 안에 확실히 흡수가 안 됐다. 그러니 자신감도 없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그 때 감독님이 내준 숙제가 판토마임이다. 연기에 도움이 될 거라고. 혼자서 이런저런 연습을 한 다음에 남들에게 맞춰보라고도 하고 캠코더를 놓고 찍어도 봤다. 덕분에 헝가리 촬영이 끝나고 한국 돌아와서는 많이 적응이 됐다.

연기력 논란을 돌파하려는 오기 혹은 치열함은 느껴진다. 궁금한 건 과연 이 일을 즐기고 있는가이다.
김태희 : 전에는 책임감과 부담감에 짓눌려 있었다. 어쩌다보니 연기에 발을 들여놨는데 기대에 많이 못 미치고 스스로 많이 실망하면서 되게 좌절감에 빠져있었다. 누구나 잘하는 걸 할 때 신나고 더 잘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하지만 를 하면서 조금 달라진 건 있다. 물론 연기가 180도 달라져 잘하게 된 건 아니지만 평소 연기자로서 불리한 성격이라 생각했던 부분이 조금 바뀌고 내 안에 있던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이라는 걸 발견할 때도 있었다.

감정이 더 풍부해진 건가.
김태희 : 그럼. 나이도 들고 하니까. 정말 연기하면서 인간이 되어 간다는 걸 느꼈다. 그 전에는 무생물 같았다. (웃음)

연기를 통해 인생이 더 풍성해지고 즐거워진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김태희 : 인생은 풍성해졌다. 즐거워지진 않았다. (웃음) 전에는 그냥 뒤돌아보지 않고 낙천적으로 가던 것이 이제는 우울한 감정도 생기고 또 그 덕분에 기쁨을 크게 느끼기도 한다. 슬픔을 알아야 작은 것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않나.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