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태웅│“우직하고, 요령없고, 요즘은 내가 김유신 같기도” -1

“사람들과 처음부터 썩 친해지지는 못한다”고 말한 엄태웅은 스스로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있다. 그는 천성적으로 상대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재지도 가리지도 않고 ‘척’ 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약점까지 먼저 털어놓고 쑥스럽다는 듯 “으흐흣” 하고 웃어버리는 엄태웅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어느새 긴장감은 사라지고 이야기 자체에 몰두하게 된다. 그래서 길에서 데려온 유기견 ‘춘희’와의 에피소드를 한껏 즐거운 얼굴로 들려주던 그는 인터뷰를 마친 뒤 잠시 벗어놓았던 ‘포스’를 다시 장착하고 무적의 군신 김유신이 되어 전장으로 떠나갔다.

오늘 촬영을 준비하고 있는 신은 어떤 내용인가.
엄태웅 : 비담(김남길)의 난을 앞두고 있다. 가서 진압을 해야지. (웃음)

“김유신은 근래 보기 드물게 우직한 캐릭터”
엄태웅│“우직하고, 요령없고, 요즘은 내가 김유신 같기도” -1
몇 년 전부터 사극에 출연하고 싶다고 말해 왔는데 결국 을 하게 됐다. 김유신은 워낙 잘 알려진 위인이고 대중이 갖고 있는 이미지도 확실한 인물이었는데 그 큰 역할을 맡아 연기하는 건 어땠나.
엄태웅 : 남자 배우니까 언젠가는 사극을 하게 될 거라 생각했다. 김유신이라는 역할을 만났을 때는 분명 재미있겠다 싶으면서도 아쉬움은 있었다. 이 작품이 딱 김유신 장군에 대한 사실적인 얘기를 그렸다기보다는 이라는 드라마 안에서 김유신은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캐릭터를 표현하는 것도 막막하고 대사도 많이 헷갈렸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편해지고 힘도 붙었다. 무엇보다 굉장히 재밌는 드라마였고, 덕분에 다음에 또 사극을 한다면 좀 더 빨리 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무술이나 승마 같은 기술적인 부분 외에 사극에 적응하는 데 더 필요한 것들도 있었나.
엄태웅 : 처음에는 시대와 상관없이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연기의 기술, 아니 기술이라기보다는 분위기를 맞추는 게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나 스스로 좀 어색하더라도 사극의 세계를 이루는 규율 같은 게 있는데, 이를테면 아주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서로 대사를 주고받다가 어느 순간 한 사람이 “~그랬냐?” 같은 요즘 말투를 쓰면 뭔가 이상해지는 거지.

영화 을 비롯해 현대극에서 연기해온 캐릭터들이 보통 사람들보다도 좀 더 자유롭거나 개성이 뚜렷한 편이었는데 김유신은 어릴 때부터 ‘바른 생활’ 그 자체인 인물이다 보니 그 변화를 표현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엄태웅 : 그렇다. 에는 현대극에 갖다놔도 튀지 않을 만큼 자유분방한 캐릭터들도 있지만 김유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고, 나 이전에 어린 김유신(이현우)의 캐릭터가 잡혀 있다 보니 처음에는 움직일 곳이 없었다. 몸도 항상 굳어 있고. 그런 것들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지나면서 그 안에서의 움직임을 찾아내 편해질 수 있었다. 지금 와서는 그런 것들이 김유신이란 캐릭터를 흔들림 없이 갈 수 있게 만들어줬다는 생각이 든다. 근래 보기 드물게 우직한 캐릭터였고, 그건 끝까지 마찬가지일 것 같다.

우직함에 대해 얘기했는데 실제로도 요령이 별로 없는 성격으로 안다. (웃음)
엄태웅 : 뭘 해도 재빠르게는 잘 못 한다. (웃음) ‘요령껏 하라’고들 하는데 그렇게 하면서 감정을 다 표현할 수 있다면 최고의 연기자겠지만 내가 그렇지 못하다 보니 진짜처럼 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 때문에 액션 팀 분들이 많이 다치기도 했다. 굉장히 미안했지만 그 분들도 일이고 나도 일이니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다 나도 많이 다쳤지만 손가락을 찧거나 살갗이 벗겨진 것 정도로는 뭐라 하지 못했다. 손가락이 하나쯤 잘린다면 모를까.

그런 김유신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화랑 시절 목검으로 만 번 베기 수련을 하는 장면이었는데 실제 촬영은 어땠나.
엄태웅 : 말이 만 번이지 그냥 좀 하면 되려니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목검으로 바위를 치는 장면은 전날 밤을 새고 아침부터 의정부에 있는 산에서 찍었는데, 나는 목검이 그렇게 쉽게 부러지는 건 줄 몰랐다. (웃음) 준비했던 목검들이 다 부러져 버리는 바람에 소품 팀에서 차타고 시내 나가서 다시 사오면서 ‘좀 요령껏 하라’고 하던데 그래도 될 만큼의 무술 실력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게 아니니까 진짜로 할 수밖에 없었다. 하도 내리쳤더니 손은 얼얼하고 손바닥은 까지고, 다음 날이 되니 뒷머리부터 울릴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장면이 대단한 명장면이나 김유신이 멋있게 나온 신은 아니었지만 열심히는 했던 것 같다.

“다른 작품에 비해 김유신에서 빠져나오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
엄태웅│“우직하고, 요령없고, 요즘은 내가 김유신 같기도” -1 초반에는 캐릭터와 연기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사극이라는 장르에 적응하는 것 뿐 아니라 김유신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엄태웅 : 사실은 시작할 때 굉장히 혼란스러웠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가장 부끄럽다. 배우는 작품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캐릭터에 대한 중심을 잡고 그 흐름대로 움직여야 하는데 잘 모르겠는 순간들이 있었다. 왜 김유신이 갑자기 나약하게 눈물을 흘려야 하는가 같은 것들이었는데, 그것도 내가 요령이 없어서 그렇다. 배우는 납득이 안 가도 연기를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마음속으로 납득이 안 되면 죽어도 안 되는 편이다. 그러니까 아직 멀었다 싶기도 했고, 그래서 혼란스럽고 흔들렸던 장면들이 있다. 촬영 일정이 너무 빡빡하다 보니 내 입장에서 답을 더 적극적으로 찾지 못했던 게 굉장히 후회스럽고.

이제 상장군이 된 김유신의 입장에서 초기 화랑 시절의 김유신을 바라보면 어떤가.
엄태웅 : 요즘도 가끔 쉬는 날이 있으면 을 처음부터 다시 보는데, 굉장히 재미있다. 우리가 어릴 때를 돌이켜 보면 ‘지금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그 땐 왜 그게 그렇게까지 힘들었을까’ 싶은 것처럼 화랑 시절의 김유신은 지금의 김유신보다 많이 흔들렸고, 감정적으로도 놓고 싶지 않은 게 많았던 것 같다. 덕만(이요원)에 대한 연모 같은 감정도. 어쩌면 그 때의 혼란은 내가 나 자신을 믿지 못했던 데서도 드러났던 것 같고, 대신 이 60부작이 넘는 작품 안에서 김유신도 조금씩 어설픔을 벗고 여물어가며 ‘큰’ 사람으로 성장했다는 생각이 든다.

김유신도 덕만을 연모했지만 의 멜로는 삼각관계라기보다는 비담과 덕만을 중심으로 그려졌다.
엄태웅 : 58회에서 비담과 국혼이 정해진 덕만에게 유신이 축하한다고 말하는 신이 있는데 대본이 나왔을 때부터 공감을 많이 했다. 사실 그동안에는 유신도 덕만을 놓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야기가 비담과 덕만의 사랑으로 가는 걸 보며 ‘음…뭘까, 뭘까. 왜 이게 이렇게 되지?’ 라는 의문을 갖기도 했는데 그건 그냥 나의 생각이었고, 드라마 속의 유신은 이미 미실의 책략에 의해 결혼을 했을 때부터 남녀 간의 감정을 놓고 대의를 향해 갔던 거다. 다행히 그걸 깨달았기 때문에 상대를 진심으로 위하는 유신의 감정이 정말 가슴에 와 닿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알았고, 덕만에게 내가 해줄 수 없는 것을 다른 이로부터 위로받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신을 찍고 나서 굉장히 마음이 아프면서도 편했다. 김유신의 인간적인 깊이를 새삼 느꼈고, 내가 그 김유신을 연기한 게 정말 좋았다.

작품을 준비하는 기간까지 하면 2009년을 거의 김유신으로만 살았다. 영화나 미니 시리즈에 주로 출연했기 때문에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을 텐데 어땠나.
엄태웅 : 사실 내가 처음부터 사람들과 썩 편하게 친해지지는 못한다. 촬영장도 낯설고. 전에도 항상 좋은 사람들과 일했지만 16부작은 서로 “어? 어. 아, 예에…” 하다가 끝나고 (웃음) 그나마 길게 했던 24부작에서도 사람들과 친해지니까 끝났는데 에서는 그런 드라마를 두세 개 합쳐놓은 길이의 작업을 하다 보니 스태프, 배우들과 정말 많이 친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안 해 봤는데 요즘은 가끔 내가 김유신 같기도 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웃음) 난 원래 작품이나 캐릭터에서 굉장히 빨리 빠져나오는 편인데 김유신에서 빠져나오는 데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 같다.

뭔가에 적응하고 빠져드는 데 시간이 걸린다면 아직도 적응이 잘 안 된다고 느껴지는 건 어떤 것들인가.
엄태웅 : 사람들의 마음. 많은 분들이 나를 사랑하고 좋아해서 표현해 주시는 걸 잘 알면서도 쑥스러워서 자꾸 피하게 된다. 팬들은 물론 식당 같은 데서도 나한테 오셔서 뭐 욕을 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 좋아요. 잘 보고 있어요” 하시는 분들에게 “예, 감사합니다” 하고 받으면 서로 편하고 좋을 걸, 마음은 고마운데 괜히 고개 푹 숙이면서 “…아, 예에…” 하게 된다. 가시고 나면 ‘이게 아닌데…’하고 후회하고, 아마 이렇게 감정의 소통이 느려서 내 연기가 더딘 것 같기도 하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