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으로 돌아온 김흥수, “내가 만든 포장지 안에 살지 않겠다”(인터뷰)

김흥수가 '야경꾼일지'에서 전혀 다른 얼굴로 돌아온다

김흥수가 ‘야경꾼일지’에서 전혀 다른 얼굴로 돌아온다

오랜 세월은 어찌할 수 없나보다. 쌓인 세월만큼 사람은 노련해지고 만다. 진심으로 임했을 때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1999년에 데뷔했으니, 우스갯소리로 디너쇼를 열어도 될 연차가 돼버린 배우 김흥수는  세월을 그냥 고이 흘려만 보낸 사람이 아니었다. 어느 날 우연히 배우의 길에 들어섰고, 어린 나이에 갑작스레 접한 배우의 삶은 고단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혼나고 욕 먹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채우다 반짝 듣게 된 칭찬이 그를 춤추게 했다. 그러다보니 어느 날인가 노희경 작가로부터 ‘일생 최대의 발견’이라는 극찬을 들은 배우로 성장하게 됐다. 하지만 또 한 번 찾아온 슬럼프. 긴 시간 외길을 고집했으니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있기 마련이지만, 그것을 안다하더라도 막상 내리막길과 마주할 때 쓰라림이 쉽게 가실 리는 없다.

그 와중 그는 군대를 가게 됐다.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당연히 할 수 있었던 일’의 가치가 절실하게 와 닿았다. 다시 돌아온 필드, 익숙한 그곳이 주는 긴장감은 같은 듯 다르다. 단막극으로 몸을 푼 배우 김흥수는 8월 MBC 드라마 ‘야경꾼일지’에서 처음으로 곤룡포를 입게 됐다. 연산군을 떠올리게 하는 가상의 폭군, 기산군을 만나기 앞서 용포 속 감춰진 배우 김흥수를 만나보았다.

강렬한 악인으로의 변신을 앞둔 배우의 감출 수 없는 열정의 민낯을 느꼈다. 그리고 김흥수의 또 다른 얼굴도 보였다.

그가 맡은 기산군은 콤플렉스 덩어리의 폭군이다

그가 맡은 기산군은 콤플렉스 덩어리의 폭군이다

Q. 사극 분장을 오랜만에 해보니 어떤 기분이 들었나.
김흥수 : 사극은 ‘해신'(2005) 이후 처음이다. 그 때는 노예의 느낌이 나는 장수였는데, 이제는 임금을 연기하게 됐다. 용포를 입는데 ‘입어도 되나?’ 싶은 반감이 느껴지더라. 지금까지 주로 방황하는 청춘이나 가난한 캐릭터를 연기했었다. 그래서인지 높은 신분의 캐릭터를 연기하면 불편하다. 자신감도 없다.

Q. 의외의 소감이다. 그래도 배우로서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캐릭터일 텐데, 설레는 기분은 없나.
김흥수 : 설렌다. 최근 단막극에서 사이코패스를 연기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폭군 캐릭터다. 시기와 질투를 품은 복잡한 인물이다. 난 내가 평생 착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이상하게 최근에는 악역이 많이 들어온다. 오히려 착한 역이 잘 안 어울린다는 이야기마저 듣는다. 그래서 더 도전하는 기분이 든다.

Q. 듣고 보니 정말 지금의 얼굴에는 과거 천진한 얼굴이 흔적을 감춘 느낌이다. 수염을 길러 느낌이 달라진 걸까.
김흥수 : ‘완벽한 스파이’라는 단막극을 찍고 군대를 갔다. 그 작품에서 수염을 처음 기르게 됐다. 생각보다 낯설지 않더라. 그러다 군대 가서 다시 자르긴 했지만, 그 기억 때문에 또 사극 때문에 군 제대 이후 다시 길러보았다. 수염 덕분에 나를 둘러싼 고정적인 이미지가 풀린 듯해 기분이 좋다. 제대로 된 악역을 연기하고 싶은 욕심은 있었으니까.

Q. 기산군은 콤플렉스를 가진 인물인데, 혹시 콤플렉스가 있다면.
김흥수 : 큰 키!. 데뷔 시절 연기 못해서 혼나는 건 참을 수 있었는데, ‘키가 왜 그렇게 커’라며 혼을 내실 때는 되게 속상했다. ‘왜 생긴 것 갖고 그래’ 이런 심정. 촬영 때도 다리 벌리고 찍는 것은 기본이다. 감정신에서 그러면 스트레스도 된다. 또 한 편 민폐가 된 것 같은 기분도 든다. 키는 여전히 콤플렉스인 것 같다.

김흥수는 189cm 큰 키가 콤플렉스라고 말했다.

김흥수는 189cm 큰 키가 콤플렉스라고 말했다.

Q. 군 제대 후 인터뷰들을 보면 군대 가기 직전이 슬럼프였던 것 같더라. 지금은 극복을 한 것인가.
김흥수 : 어렸을 때 멋모르고 막 연기할 때는 신선한 연기가 나왔고, 감독님들께도 또 시청자들께도 그런 거친 연기로 좋은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잘못된 생각들에 꽂혀있었고, 연기적인 발전이 별로 없었다. 다시 돌아봐도 그렇게 열심히 살지 않았다. 사실 스물 네 살까지만 하더라도 그야말로 연기에 미쳐있었는데, 어느 순간 내 성장이 멈춰있더라. 자연스럽게 연기도 점점 못하게 되고. 그러다 군대를 갔다. 지금 내가 극복을 했느냐 아니냐를 판단하기에는 이른 것 같다. 다만 군대에 있을 때, 갈망이 엄청나게 심해졌다. 이번 역으로 그 갈망을 풀 수 있었으면 한다. 기존에 했던 캐릭터가 아니라 어려울 테지만, 발전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믿음도 있다.

Q. 옛날이야기도 해보고 싶다. 사실 김흥수 하면 오늘날 30대들은 ‘학교2’에서의 모습도 눈에 선하다. 그만큼 인상적이었다. 모델 활동을 하다 데뷔작이 바로 이 드라마였다.
김흥수 :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공부가 하기 싫어 모델이 됐고, 우연히 연기도 하게 됐다. 그 당시만하더라도 배우의 꿈도 없었고, 연기를 하다 늘 욕먹고 혼나다보니 ‘내가 못하는 일’이라고 아예 선을 그어버렸다. 10개월이 정말 지옥 같았다. 그런데 ‘학교2’를 하면서 다른 섭외들이 또 들어오더라. 그렇게 또 다른 작품으로 뻗어가게 됐다. 또 혼났다, 하하. ‘아니, 그렇게 혼을 낼 거면 나를 왜 써’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매니저가 자꾸 하라니 어쩔 수 없이 했지. 언제부턴가는 욕먹는 것에 이골이 나고, 아예 마음이 편해지더라.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연기가 된다 싶은 순간이 찾아왔다. 처음으로 칭찬도 들었다. 갑자기 더 하고 싶어졌다. 또 칭찬을 듣고 싶어졌고. 처음으로 잘 해보고 싶은 꿈이 생겼다.

Q. 김흥수의 터닝 포인트는 역시 노희경 작가의 ‘꽃보다 아름다워’다. 당시 노희경 작가가 엄청난 극찬을 보냈고, 시청자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김흥수 : 아, 그 작품은 정말 스토리가 길다. 원래 그 역할은 류승범 형에게 먼저 갔었는데, 스케줄 문제로 공석이 돼버렸고 결국 내게로 왔다. 다른 촬영으로 지방 가던 길이었다. 매니저가 ‘지금 결정해. 이 작품 하고 싶으면 차를 돌려야 돼’라며 ‘꽃보다 아름다워’ 대본을 줬다. ‘형, 나 이거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아’라며 차를 돌렸다. 촬영 펑크 내고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오디션에 간 것이다. 오디션에서 노희경 선생님과 감독님이 매의 눈으로 나를 살펴보셨고, 엄청 긴장해서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간절함이 통한 것인지 내가 됐다고 하더라. 선배님들 보면서 정말 ‘누가 되지 말아야지’하며 임했다. 살이 7kg가 빠졌다. 촌스러울 정도로 진지하게 임했다. 감정신을 찍기 전날이면 전날부터 긴장해서 대본만 팠다. 연기할 때 해가 될까 밥도 안 먹고 예민하게 살았다. 그 작품이 내 연기 인생을 많이 바꾸었다.

김흥수는 과거 노희경 작가의 작품으로 첫 터닝포인트를 맞았다

김흥수는 과거 노희경 작가의 작품으로 첫 터닝포인트를 맞았다

Q. 모델 출신 배우 1세대들, 당신을 포함해 배두나 신민아 등등이 지금 모두 관록 있는 배우가 됐다. 지켜보는 동시대인으로서 같이 성장해온 기분마저 든다.
김흥수 : 나 역시 신기하다. ‘쎄씨’ ‘키키’ 모델을 같이 하던 배두나, 신민아, 김민희, 김효진 모두 지금 깊이 있는 배우가 됐다. 그 이후에 조인성, 강동원, 조완선 등 모델 출신 배우들이 쭉 잘 됐었고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Q. 옛 생각을 하면 감회가 새롭겠다.
김흥수 : ‘학교2’ 때만 하더라도 촬영장에 개인매니저가 오는 시대가 아니라 KBS 별관에서 새벽 5시에 모여 함께 버스타고 연기하러 갔었다. 그 때 같이 연기했던 배우들이 하지원, 김민희, 김래원, 심지호 등 이다. 그렇게 함께 연기했던 동료들이 모두 스타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Q. 배우들뿐이겠나. 이제는 어떤 현장을 가더라도 아는 얼굴이 있을 것 같다.
김흥수 : 그렇지. 스태프들 중 거의 한 번씩은 작품을 같이 했던 분들이 많다. 그런게 너무 좋다. 배우 안에서는 선생님들과 젊은 연기자들의 가교 역할을 하게 된다. 어릴 때 데뷔해서 선생님들을 잘 따르고 챙기는 습관이 들었다. 내 무기가 어느 새 붙임성이 돼버렸다.

그리고 '야경꾼일지'는 그에게 어떤 작품으로 기록될까

그리고 ‘야경꾼일지’는 그에게 어떤 작품으로 기록될까

Q. 그런데 그렇게 긴 시간 한 우물을 파왔는데, 어떤가. 노력은 늘 배신하지 않던가.
김흥수 : 늘 느끼는 것이 운칠기삼이다. 때로는 운이 많이 따라준다는 생각도 들고 또 때로는 운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이쪽 일
이지 않나. 어떻게 보면 사람의 마음을 사야하는 직업인데, 어떨 때는 그게 가능하지만 또 어떨 때는 아무리 고심한 끝에 연기를 해도 냉정한 평가를 받게 되고만
다.

Q. 스스로에게 냉정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까지 객관적 이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김흥수 : 연기 생활을 하다보면, 주변에서 나쁜 소리를 하지 않는다. 늘 ‘내가 가는 길이 옳다’라고만 말한다. 어느 순간 대우 받는 것이 당연해지기도 하고, 그
러면 꼭 실수하게 된다. 나는 보수적인 편이라 그런지 그런 배우들을 보면서 ‘절대 저렇게 되지는 말자’ 했다. 또 자기 위치나 자기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상처도 덜 받는다. 예를 들어, ‘내가 주연을 할 수 없는 위치’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면 같이 일하는 사람과 소통도 더 원활하게 할 수 있다. 내 신조 중 하나가
내가 만든 포장지 안에서 살지 말자는 것이다. 내용물이 커져야지 포장지가 커지면 안 된다.

Q. 15년의 관록이 느껴지는 명언이다.
김흥수 : 아, 그런데 정말 믿겨지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1999년도 같다.

글. 배선영 sypova@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