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정도전’③ 정현민 작가, “결국 진정성의 문제였다”(인터뷰)

정현민

하수상한 시절에 걸맞은 참으로 범상치 않은 작품이었다. 지난 1월 4일 첫 전파를 탄 KBS1 ‘정도전’(극본 정현민, 연출 강병택, 이재훈) 매회 자체 최고시청률을 경신하며 KBS 사극의 역사를 새로 썼다.

시청률도 시청률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시청자들의 체감 반응이다. 이미 기정사실화 된 역사적 사실을 다룬다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중·장년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사극은 ‘정도전’의 인기와 함께 입지를 새로이 다졌다.

‘정도전’의 인기에는 촌철살인의 대사로 매 방송분을 수놓은 정현민 작가의 공이 컸다는 게 공통적인 평가다. 앞서 10여 년간의 국회 보좌관 경력이 알려지며 관심을 끌었던 그는 현실 정치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대사로 이인임(박영규), 정몽주(임호) 등의 인물을 다시 살려내며 호평받았다.

그런 그에게 ‘정도전’을 물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눌수록 추측은 확신에 가까워졌다. 이 드라마, 결코 가볍게 볼만한 작품은 아니었다.

Q. 작품의 인기와 함께 화제의 중심에 섰다. 소감이 어떤가.
정현민 작가: 다른 건 몰라도 지인들이 다 보고 있다는 게 인기가 있기는 했나 보다, 하하하. 시청자 여러분에게 정말 감사하다. 진정성이 통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만으로 작가로서 큰 힘을 얻었다.

Q.  첫 번째 사극이 아닌가. 집필하며 어떤 부분에 집중했나.
정현민 작가: 두 가지다. 정통 사극은 단순히 드라마적 가치만을 추구하면 안 된다. 적어도 공영방송의 대하드라마라면 드라마적 재미와 공익적인 가치, 역사에 대한 존중을 가져가야 한다. 이 두 가지를 포기하지 않고 역사에 충실한 정통사극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물론 허구와 작가의 해석은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작가가 전지자인 것처럼 과도한 해석을 하지 않았다. 인물의 핵심적인 정체성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컸다.

Q. ‘정도전’의 반응을 보니 생각보다 정통 사극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생각도 든다.
정현민 작가: 초반부 방송 반응을 보고 깨달았다. 생각보다 많은 분이 정통 사극을 원하고 계시더라. 그 지점을 놓치면 죽도 밥도 안 되겠다고 느꼈다.

Q. 현실과 접점이 많다는 점은 장점이자 약점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역성혁명을 놓고 다소 과격하게 ‘쿠데타 미화 드라마’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정현민 작가: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정도전이라는 인물을 놓고 별도로 해석을 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충실하게 구현만 해놓으면 해석은 보는 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도전의 시선으로 본 여말선초는 ‘민생’이고 ‘양극화’였다. 그 시선에 초점을 맞추고 심플하게 쓰고자 했다.

KBS1 '정도전' 방송 화면 캡처

KBS1 ‘정도전’ 방송 화면 캡처

Q. 온라인상의 반응도 여타 사극과 달리 상당히 다채롭다. 결과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해석할 여지가 많았던 텍스트였다는 느낌이다.
정현민 작가: 처음부터 의도한 부분은 아닌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거 뭔가 나오겠구나’ 싶은 마음은 들었다. 본래 나는 이야기 구성에 특출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한계에 봉착했다. 6개월간 1주일에 두 편씩 써내려간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더라. 물론 그 와중에 내가 일부러 넣은 텍스트도 있다. 예를 들어 이지란(선동혁)이 이숙번(조순창)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 그렇다. 나름대로 KBS1 ‘용의 눈물’에 대한 오마주였고, 선동혁 선생에게도 선물을 주고 싶었다. 아, 또 있다면 위화도회군 때 최영(서인석)과 이성계(유동근)의 일기토가 거기에 속한다. 야사에만 나오는 내용인데, 극성을 살리기 위해 넣었다. 그 두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억지로 만든 상황은 아니다.

Q. 정통사극을 표방한 ‘정도전’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현대적 사극이었다.
정현민 작가: 대하드라마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지 못하면 시청자를 만족시킬 수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처음부터 목표를 미니시리즈와 대하드라마의 중간 지점으로 잡았다. 인물 간의 대립각을 중심으로 가면서 드라마적 사실과 역사적 사실을 개연성을 키워나갔다. 그 과정에 사건과 인물을 취사선택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일주일에 4일 정도는 이야기를 짜는 데 할애했다. 사료를 컴퓨터 옆에 두고 계속해서 들여다봐도 한 줄도 쓸 수 없었던 날이 많았다. 그만큼 고심 끝에 나온 콘텐츠라는 이야기이다.

Q. 대립구도로 갈 수 있었던 데는 캐릭터의 힘이 컸다. 비중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캐릭터를 살려내는 힘이 탁월하더라. 소칭 ‘밑밥을 깐다’고 하는 그런 것 말이다, 하하.
정현민 작가: 정확하다, 하하. 분량을 작더라도 캐릭터는 명확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기획 단계에서 인물을 모두 세팅하고 나니까 ‘이 드라마 되겠다’ 싶었다. 정도전(조재현)과 정몽주(임호)가 친구라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매력적이지 않나. 나름대로 극의 3부로 나눠서 전개해보고자 했다. 1부는 정도전이 역성혁명의 대의를 깨닫는 ‘천명’, 2부는 정몽주가 죽을 때까지의 이야기를 다룬 ‘역류’, 3부는 ‘순교’, 이런 식이었다. 이 소주제 안에 각각의 인물을 배치하는 게 숙제였다.

Q. 그렇게 배치된 인물들 속에는 나름의 공통점도 발견되더라. 개인적으로는 ‘인간애(人間愛)’가 제1의 메시지인 듯한 느낌도 받았다.
정현민 작가: 나는 그렇게밖에 쓸 수 없는 사람이다. 결국, 드라마는 사람을 보여주는 이야기이지 않나. 그 안에 진정성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Q. 정도전과 양지(강예솔)의 이야기도 그런 맥락이었나. 사실 이 부분은 ‘사족’이었다고 평가하는 분들도 있다.
정현민 작가: ‘정도전’ 기획단계에서 가장 큰 고민은 ‘성리학 근본주의자를 어떻게 드라마적인 인물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 해답은 ‘성장형 캐릭터’에 있었다. 그래서 가상의 인물 양지가 필요했다.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귀향으로 보낸 정도전의 삶을 보여줘야 했고, 그가 괴물을 죽이기 위해 괴물이 되기를 결심하는 과정이 설득력 없게 그려지면 이 드라마는 끝이라고 결론 내렸다. 양지는 이름부터가 굉장한 메시지를 가진 인물이다. 맹자의 ‘성선설’에 나오는 게 바로 ‘양지(良志)’이다. 양지는 집단성을 띄고 있는, 즉 백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여성 캐릭터였기도 하고. 정도전이 양지를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건 상당히 함의가 강한 이야기였던 셈이다.

Q. 그 대목에서 당위성은 획득했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정도전의 역할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도 많았나. 워낙 다른 인물들의 비중이 늘다 보니 그런 느낌이 더했던 것 같기도 하고.
정현민 작가: ‘정도전’의 타이틀롤이 정도전이라고 해서 이게 소위 ‘원톱 드라마’라고 부르는 그런 류의 작품은 아니다. 초점을 맞춘 부분은 정도전이 아니라 ‘정도전의 시각’으로 본 여말선초이다. 그 사람의 정신과 사상이 난세를 혁파해나가는 과정이 작품의 중심과 닿아있던 거다. 어쩌면 이 시대가 원하는 인물은 최영도, 이성계, 정몽주도 아닌 정도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시대정신을 견인할 수 있는 창조적 발상과 실천력을 갖춘 인물이 정도전이기 때문이다.

KBS1 '정도전'에서 정도전 역을 맡은 조재현

KBS1 ‘정도전’에서 정도전 역을 맡은 조재현

Q. 정도전이 판을 바라보는 시선은 역사적 기록이기도 하지만, 곧 당신의 시선이기도 하다. 그 지점에서 국회 보좌관 경력이 빛을 발했을 것 같다.
정현민 작가: 아마 그 경험이 없었다면 ‘정도전’과 같은 대하드라마를 집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거다. 나도 작품을 쓰면서 깨달은 부분이다. 작가들은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 되레 연애를 많이 해보면 로맨스를 못 쓴다고. 오히려 사랑에 대한 신비감을 가진 이들이 더 잘 쓴다는 이야기이다. 나도 그럴 줄 알았다. 나는 정치에 판타지가 없었거든. 근데 그게 사극이라서 가능했던 것 같다. 국회에서 양자의 의견을 모두 들어볼 수 있었다는 게 참 의미 깊은 경험이었다. 그 균형 감각이 인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녹아나더라. 사실 내가 정말 전하고 싶은 이야기도 단순한 선악 구도에 있지는 않았다. 현실 정치가 그러하듯이 ‘누구의 말이 더 현실에 적합한 논리를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였다.

Q. 정말 그렇다. 갈등관계를 기본 틀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들의 갈등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마음이 아니라 신념의 충돌로부터 기인한 것들이었다.
정현민 작가: 요즘과 같이 다양한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많은 시대에는 그런 마음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어렵고 조심스러웠지만, 각자의 입장을 충실하게 구현해나가는 인물들을 만들고 싶었다.

Q. 그런 측면에서 정도전의 마지막에 대한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역사적 기록도 판이한 부분이지 않나.
정현민 작가: 의연하게 죽었을지도 모르고, 조선왕조실록에서 기록한 것처럼 비굴하게 죽었을지도 모른다. 실제 역사를 알 도리가 없으니까. 다만 우리는 현재의 시점에서 기록에 대해 해석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완전히 드라마의 역할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드라마는 드라마적으로 구현된 캐릭터가 어떤 상황을 선택하도록 함으로써 그런 메시지를 넌지시 전할 수는 있다고 본다. 마지막 회의 결말은 그런 측면에서 이해해주시면 좋겠다. 역사 속 정도전이 아니라 ‘정도전’ 속 정도전의 선택으로 말이다.

Q. 이번 작품이 뜨거웠던 만큼 차기작에 대한 기대감도 높다. 다음에도 사극인가.
정현민 작가: 결코 사극은 아닐 거다, 하하하. 지금 내가 또 사극을 한다면 자기복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완전히 이번 작품의 느낌을 잊고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을 때까지는 사극을 하지 않을 것이다. 차기작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고심 중이다. 하지만 기본적인 나의 성향은 바뀌지 않을 거다. 절대 악이나 절대 선이 없이 치열한 논리 전을 펼치는, 그런 복합적인 대립을 그릴 거다. 사람은 쉽게 안 변하니까,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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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정도전’② ‘사극 장인’ 유동근, 대하드라마의 미래를 말하다(인터뷰)

 

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제공.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