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정도전’② ‘사극 장인’ 유동근, 대하드라마의 미래를 말하다(인터뷰)

유동근

하수상한 시절에 걸맞은 참으로 범상치 않은 작품이었다. 지난 1월 4일 첫 전파를 탄 KBS1 ‘정도전’(극본 정현민, 연출 강병택, 이재훈) 매회 자체 최고시청률을 경신하며 KBS 사극의 역사를 새로 썼다.

시청률도 시청률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시청자들의 체감 반응이다. 이미 기정사실화 된 역사적 사실을 다룬다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중·장년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사극은 ‘정도전’의 인기와 함께 입지를 새로이 다졌다.

그 뜨거운 반응의 중심에는 이성계 역으로 열연을 펼친 배우 유동근이 있다. 그는 앞서 KBS1 ‘용의 눈물’(1996)에서 이방원 역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터여서 연기 변신에 관심이 집중됐다. 이미 다수 사극을 통해 ‘사극 장인’이라는 칭호를 얻은 그이지만, 그에게도 ‘정도전’의 이성계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현대적 터치가 가미된 극본 속 이성계는 다채로운 감정을 담아야 하는 무척이나 입체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작품을 마치기 얼마 전 인터뷰를 마주한 유동근은 ‘정도전’을 ‘배우로서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던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와 함께 연기 경력 34년의 배우마저 겸손하게 만든 ‘정도전’을 논하는 시간은 ‘사극의 역사’를 훑듯 압축적이고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

Q. ‘정도전’은 정말 이례적이다 싶을 정도로 뜨거운 인기를 누리고 있다. 최근의 인기를 실감하는가.
유동근: 촬영에 돌입한 이후에 대부분 현장에만 있다 보니 사실 잘 모르겠다. 물론 풍문으로나마 들어서 ‘정도전’을 많은 시청자가 사랑해주셨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아, 얼마 전에 문경에서 촬영할 때는 등산을 온 가족이 이성계의 사투리를 따라 하시더라. 그때 조금 느꼈던 것 같다, 허허.

Q. 당신과 ‘정도전’ 이야기를 나누려면 ‘용의 눈물’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용의 눈물’ 때는 이방원 역을 맡았고, 이번에는 이성계 역으로 열연을 펼쳤다. 감회가 남달랐겠다.
유동근: 내가 고(故) 김무생 선배가 어떻게 해냈는지를 가까이서 봐온 사람이니까. 작품 들어가기 전부터 두려움이 앞섰다. 선배가 구축한 인물에서 벗어나 나만의 캐릭터를 만들 수 있을지 걱정도 됐고.

Q. 결과적으로는 ‘유동근만의 이성계’가 탄생했다는 평가가 많다. 거기에는 독특한 사투리 대사도 일조했다.
유동근: 고생을 많이 했다. 함경도 사투리는 너무나도 생소했으니까. 처음에 ‘정도전’ 시놉시스를 봤을 때만 해도 ‘사투리 안 쓰면 안 되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연습을 해보니까 정말 잘 안 되더라고, 허허. 어려움이 많았지만, 백경윤 교수(단국대학교 교수, 탈북자 출신으로 ‘정도전’, SBS ‘닥터 이방인’ 등의 사투리 연기를 지도했다)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다. 일대일로 훈련을 받으면서, 매일 몇 시간씩 사투리를 연습했다.

Q. 이성계 역이 굉장히 접근하기 어려운 캐릭터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비중도 컸고 담아내야 할 감정의 폭도 컸다.
유동근: 작가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할 수 있었다. 젊은 작가의 접근 방식이 새롭게 느껴졌다. ‘용의 눈물’은 위화도회군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정도전’은 ‘변방의 촌뜨기’일 때부터의 모습을 그려내야 한다. 거기에 황산대첩, 위화도회군 등 ‘정도전’에서 중요한 변곡점을 담당하는 부분들이 연기하기에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왔다. 응축된 대본과 그것을 효율적으로 운반해낸 강병택 PD의 리더십이 이번 작업을 가능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Q. 다른 인터뷰를 보니 강 PD에 대한 칭찬이 참 많더라. 배우로서 그런 느낌을 받는 지점이 어디였는지 꼭 물어보고 싶었다.
유동근: 모두에게 출연 분량을 떠나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할 만한 여지를 주는 연출자다. 배우로서는 작업이 재밌어질 수밖에 없지. 가장 인상적인 것은 사람들에게 역할을 완전히 맡기는 리더십이다. 예전에는 연출이 모든 업무를 담당했다. 어떻게 보면 기계적인 측면이 있었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공정인데 방송을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이 있었던 거지. 근데 강 PD는 과감하게 모두 맡기더라. 예컨대 무술팀에게도 완전히 업무를 맡긴 뒤 그 결과물에 대해 가타부타 이야기하지 않더라. 자율성이 생기니 일하는 사람들도 신명이 날 수밖에. 참 여러모로 함께 작업하며 깨달은 게 많다.

Q.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정도전’에서의 이성계는 너무나도 순수한 인물이다. 그 순수함이라는 게 사실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 중 하나가 아닌가.
유동근: 이렇게 어려운 이성계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처음에는 ‘무장(武將)’이라는 생각만 했을 뿐이지. 그래서 ‘위화도회군을 통해 정권을 잡고 왕이 돼야지’하는 생각만 했었다, 이 못난 사람(내가)이. 허허허. 막상 작업에 들어가니까 내가 생각했던 이성계와는 확연히 달랐다. ‘인간 이성계’를 그려내야 하는데 그게 보통 일은 아니지 않나. 계속해서 공부하고 더 깊게 파고들어야 했다. 배우로서는 감사한 일이다, 그런 작업을 하게 된다는 게.

KBS1 '정도전' 방송 화면 캡처

KBS1 ‘정도전’ 방송 화면 캡처

Q. 후반부로 가면서 이성계, 정몽주(임호), 정도전(조재현)의 삼각관계도 점점 복합적인 양상으로 변해갔다.
유동근: 세 남자에게 공통점이 있다. 모두 불행한 남자들이라는 것. 끝까지 고려를 지켜야 했던 정몽주와 힘없는 남자 정도전과 이성계. 이들의 관계 속에는 동료를 잃는 상실감과 권력 무상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야 했다. ‘정도전’을 요약하자면 세 남자의 아픔과 불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Q. 개인적으로 정몽주가 최후를 맞기 전에 그의 발을 붙잡고 애원할 때는 지켜보며 숨을 쉴 수가 없더라.
유동근: 그 신은 임호가 참 잘했다. 아픔을 다 쏟아내지 않는 절제력과 집중력이 빛났다. 이성계는 오히려 쏟아내는 입장이니 마음이라도 편하지 않나. 이성계를 두고 문지방을 넘어서는 정몽주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Q. 최근 임호와 인터뷰를 해보니 그 장면에서 눈물을 참느라 정말 힘들었다고 하더라) 임호가 나간 뒤에도 나는 방 안에서 계속 그 아픔을 표현하고 있었다. 임호는 무대 밖에서도 힘들었을 거다. 무대 뒤에서의 감정은 배우만 느낄 수 있는 축복이자 불행이다.

Q. 그만큼 응축된 감정이 한 번에 폭발하는 느낌을 받았다. 철저하게 감정선을 구축해오지 않았다면 연출할 수 없었던 장면이다.
유동근: 연기는 반복된 훈련 속에 다듬어지는 거다. 우리 몸이 악기기 때문에 소리의 질감이라는 건 훈련을 통해 다듬어지는 것이지. 어렵지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그 소리를 만들어내 보고 싶었다. 항상 갖고 있는 생각이다, 머리보다는 가슴이 앞서야 한다는 것. 특히 이런 대하드라마를 만났을 때는 그간 갈고닦은 능력이 있어야만 원하는 감정을 원하는 수준으로 전달할 수 있다.

Q. 정몽주도 그렇지만, 이토록 모든 배역이 힘을 받은 사극은 드물었던 것 같다.
유동근: 대사와 연출의 힘이다. 그야말로 연기자들이 흠뻑 젖었다. 나는 항상 ‘내가 여기서 못하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현장에 들어갔다. 모두가 온 힘을 다해 연기하고 만들고 있으니 내가 못하면 자연스레 죄인이 되는 거지 뭐, 허허허. 아마 생각은 다 비슷했을 거다.

Q. 최근 사극이 침체기를 겪었던 터라 ‘정도전’의 인기가 더 극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유동근: 사극의 제자리걸음이 몇 년간 반복됐다. 그런 측면에서 ‘정도전’은 대하드라마의 새로운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고 본다.

Q. 그 길이라 함은.
유동근: 대하드라마라고 해서 굳이 100부작, 150부작을 할 필요가 있을까. 사극의 미래는 응축된 메시지와 철저한 준비에 있다. 사극의 가치가 소중한 만큼 더 잘 만들 수 있도록 배우를 양성하고 기획·준비 기간을 보장하는 ‘선순환 고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정도전’에서도 갑자기 이인임, 최영, 정몽주가 튀어나온 게 아니다. 모두 철저한 준비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유동근

Q. ‘선순환 고리’라는 단어가 참 인상적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을 말하는 건가.
유동근: 이제 연출, 작가, 연기자는 철저히 서비스 위주로 가야 한다고 본다. 작가는 연출에게 서비스를, 연출은 연기자와 제작진에게 서비스를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내부적으로 자생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사극에 잘 맞는 배우들을 계속해서 캐스팅해야 실력 있는 선배들이 후배들도 가르쳐주고 그러지 않겠나, 그래야만 어린 연기자가 배우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모두가 손발이 맞아가는 상황이 와야지만, 시청자들도 단순히 ‘평가’하는 시선으로만 작품을 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사극의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제대로 구현해야만 시청자들도 그 과정을 봐줄 거라는 생각이다.

Q. 어느덧 연기 경력 34년 차이다. 여전히 자신을 낮추고, 드라마 제작 전반에 대한 관심을 쏟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유동근: 연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저 재주만 있으면 되는지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 연기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니었다. 근데 아쉽게도 그 깨달음이 빨리 오지는 않는다. 후배들이 그 시행착오를 조금이나마 덜 겪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드라마 제작도 마찬가지다.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고민만이 드라마를 발전하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잊지 못할 ‘정도전’① 사극의 진화는 계속된다
잊지 못할 ‘정도전’③ 정현민 작가, “결국 진정성의 문제였다”(인터뷰)

 

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제공.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