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희, 그래도 ‘우는 여자’는 남았다(인터뷰)

김민희
상반기 기대작이었던 이정범 감독의 ‘우는 남자’가 흥행에 실패했다는 것은 이제 주지의 사실이다. 100억이라는 거대 예산이 투입된 영화의 아쉬운 실패는 감독은 물론 이 영화에 참여한 제작자와 배우, 그리고 스태프들에게 적지 않은 생채기를 안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는 남자’가 김민희 개인에게는 의미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크게 흥행해도 정작 배우는 기억에 남지 않는 영화가 있고, 흥행에서 힘을 쓰지 못해도 배우의 잔상은 오래 머무는 영화가 있다면, ‘우는 남자’에서 모경을 연기한 김민희는 후자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잃은 아픔을 조용히 삼키며 바스러져 가는 영화 속 모경을 보고 있자면, 더 이상 김민희 앞에 ‘연기 재발견’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것이 민폐임을 직감적으로 깨닫게 된다. 오랜 시간 스타일 아이콘이라는 이미지 속에 포박 당했던 김민희는 견고했던 그 벽을 스스로 허물고 나와 어느새 충무로의 든든한 허리가 됐다. 서두르거나 조급하지 않고, 자신만의 템포로 뚜벅뚜벅 걷고 있는 김민희를 만났다. 예상대로 연기에 대한 욕심이 많고, 예상한 것 이상으로 차분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맑은 여자’였다.

Q. 이정범 감독님은 ‘우는 남자’가 전작 ‘아저씨’와 비교가 될 거라는 걸 인지하면서 작업을 했다고 했어요. 배우입장에서는 어땠나요? 배우 역시 ‘아저씨’ 감독의 차기작이라는 시선과 내내 싸워야 했을 텐데요.
김민희:
‘아저씨’가 워낙 흥행한 작품이기 때문에 비교는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영화가 오픈하면 ‘우는 남자’ 자체로 평가 받으리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비교가 꼭 나쁜 건 아니라고 봤고요. 다른 말로 하면 관심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Q. 김민희 연기에 대한 호평이 많아요.
김민희:
감사하죠. 그런데, 영화 어떻게 보셨어요?

Q. 음… 솔직히 말하면 조금 아쉬웠어요.
김민희:
아…그래도 너무 이상하다는 건 아니죠? 그냥 아쉬움인 거죠? (웃음)

Q. (웃음) 되물어야겠네요. 완성된 ‘우는 남자’, 어떻게 봤나요?
김민희:
저는 잘 봤어요. 관객들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할리우드에 뒤지지 않는 총기 액션이 나오지 않았나 싶고요. 감정적인 여운이 많이 남는 영화라서 여성분들도 충분히 좋아하실 것 같아요. 드라마와 액션이 적절하게 조화돼서 저는 만족해요.

김민희

Q. ‘우는 남자’의 모경은 분위기 상으로 ‘화차’의 차경선과 비슷해 보이는 인물이에요.
김민희:
‘화차’ 차경선, 참 매력적이죠. 분위기는 비슷한데, 연기하는 입장에서 모경과 경선은 너무나 다른 캐릭터예요. 모경은 최대한 감정에 솔직해야 하는 인물이에요. 감정에 진심을 담아서 연기하지 않으면 관객을 설득시킬 수 없는 캐릭터죠. 반면 경선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유령 같은 인물이기 때문에 만들어 가는 재미가 있었어요.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색을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기에 배우가 관여할 수 있는 여지가 컸죠. 그러다보니 처음 시나리오를 딱 봤을 때, 흥미가 컸던 인물은 ‘화차’의 경선이었어요.

Q. ‘화차’의 차경선, ‘연애의 온도’의 장영, ‘우는 남자’의 모경. 최근 연기한 캐릭터들은 모두 개성도 존재감도 강해요. 최근 작품만 놓고 보면, 김민희가 어려운 감정연기를 선호하나 싶은 생각이 들죠.
김민희:
일부러 어려운 걸 선택하지는 않아요. 가장 중요한 것은 캐릭터에 대한 끌림과 설렘이에요. 아무리 좋아 보이는 작품이라도, 내가 만들어 낼 게 없다고 생각되는 캐릭터가 있어요. 그런 캐릭터에는 흥미가 안 생겨요. 주위에서 ‘그 영화는 해야 한다’고 아무리 저를 설득해도, 캐릭터에 끌리지 않으면 선택을 주저하게 되요. ‘우는 남자’의 경우 감독님에게도 끌렸고, 어떤 액션이 나올지도 궁금했고, 그 안의 모경이라는 캐릭터도 기대가 됐어요. 영화 안에서 모경의 역할이 명확하게 있었거든요. 어떻게든 내가 표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Q. 구체적으로 모경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낀 건가요?
김민희:
모경 자체가매력이라기보다는, ‘어떻게든 표현해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끌렸어요. 첫 등장부터 아이를 잃은 상실감을 가지고 시작하는 인물이잖아요. 그러다보니 허락된 변화의 폭이 넓지 않았는데, 그 안에서 고민하면서 조금씩 변화를 주려고 노력한 것이 오히려 연기에 대한 성취감과 재미를 줬던 것 같아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지만 눈에는 생기가 없는 여자, 움직이고 있지만 죽어 있는 것 같은 여자의 느낌을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Q. ‘서프라이즈’ ‘뜨거운 것이 좋아’ 등 초반에는 생기발랄한 캐릭터를 많이 연기했어요. ‘화차’를 기점으로 차분한 캐릭터를 자주 보여주고 있는데 이젠 살짝 헷갈리네요. 어느 쪽이 김민희와 조금 더 가까운지.
김민희:
제 진짜 모습이요? 발랄한 성격은 아니에요. 차분하고 조용한 편이에요. 아주 어렸을 때는 너무 내성적이어서 말도 거의 안 했어요. 지금도 말수가 많지는 않은데, 인터뷰니까 열심히 해야죠. 하하하.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하는 쪽보다 듣는 쪽이에요.

김민희

Q. 10대 때 CF와 잡지 모델로 일을 시작했어요. 당시의 김민희는 발랄하고 통통 튀는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어필됐죠. 방금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본래의 성격과 밖으로 보여 지는 이미지 사이에서의 괴리는 없었나요?
김민희:
그때는 너무 어려서 모든 것이 다 어리둥절했었던 것 같아요. 일찍 데뷔하면서 연기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잘하지 못하고 넘어갔던 부분도 있었고요. 그러다가 20대 중반이 돼서야 내 길이 배우라는 확신을 가졌는데, 그때도 너무나 어렸고 연기적으로는 신인이었기에 조심하는 부분이 많았어요. 내 생각을 얘기하지 못하고 움츠러드는 부분들이 있었죠. 지금은 그런 부분들이 많이 편해졌어요.

Q. ‘여배우들’에서 호흡을 맞춘 윤여정 선생님이 민희는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가끔씩 깬다고, 4차원처럼 못 알아듣는 소리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김민희:
하하하. 저는 제가 굉장히 평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김민희는 독특할 거라고, 기대하시는 것 같아요. 저도 나름 유머코드가 있기는 해요. 잘 먹히지는 않는데, 좋아해주시는 분들은 또 굉장히 재미있어 하세요. 아마 윤여정 선생님도 그걸 아셨나 봐요. 제 유머코드요? 하하하. 저는 유머가 조금 진지해서, 그걸 농담인 줄 모르고 지나가는 분들이 많아요. ‘연애의 온도’를 함께 한 노덕 감독님의 경우 그런 제 유머코드를 굉장히 잘 캐치하세요. 그래서 저보고 “민희씨 나중에 코미디 한 번 하세요” 그러더라고요.

Q. ‘굿바이 솔로’를 기점으로 연기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느낌이 있어요.
김민희:
너무 이른 시기에 주인공 타이틀을 부여받았어요.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에서 인기덕분에 ‘순수의 시대’라는 드라마 여주인공이 된 거예요. 그때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했어요.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들이 저를 움츠려들게 했고, ‘나는 그냥 연기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는 판단을 하게 했죠. 그러면서 일부러 더 뒤로 발을 뺐던 것 같아요. 그런 상황에서 만난 작품이 ‘굿바이 솔로’에요. 작은 역할이었는데, 작업을 하면서 너무 재미있었어요. 연기를 계속 하고 싶다,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죠. 결과적으로 평가도 좋았고요. 그때의 칭찬이 저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내가 재능이 없지는 않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해 줬으니까요. 그때 이후로 정말 차근차근 쌓아 온 것 같아요.

Q. 배우의 재능이라는 게 타고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만들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김민희:
천재적으로 타고난 분들이 있어요. ‘배우지 않았는데 어쩜 저렇게 잘하지?’ 하는 친구들이 분명히 있죠.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고 생각해요. 중요한 것은 타고났든 뒤늦게 별견하든 그 재능을 어떻게 쓰느냐가 아닐까 싶어요.
김민희

Q. 2008년 이후 쭉 영화만 하고 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김민희:
2008년 드라마 ‘연애결혼’이라는 작품이 많은 사랑을 못 받았어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듯, 제겐 모든 작품이 소중한데, 그렇다고 해서 결과가 모두 좋을 수는 없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받은 영향이 없지 않아요. 드라마보다 사랑 받고 관심 받는 쪽이 영화였고, 좋은 결과를 얻으면서 영화 쪽에서 계속 러브콜을 받았어요. 제가 인정을 받고 싶었다기보다는, 영화 쪽에서 먼저 저를 인정해 줬던 거예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저를 반겨주는 쪽에서 더 열심히 하게 된 거죠.

Q. 작품을 고를 때 어느 정도 다음 단계를 생각하며 가는 편인가요, 아니면 그때그때 끌리는 것에 몸을 맡기는 편인가요?
김민희:
작품을 만난다는 건, 굉장한 인연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원한다고 해서 모든 게 이루어지진 않죠. 그래서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보고요. 또 원하는 것만 기다렸다가, 자칫 정말 좋은 것을 놓칠 수도 있어요. 작품이 그리 많지 않은 여배우들의 경우 특히나 더 그렇죠. 그래서 저는 들어오는 시나리오 안에서 베스트를 찾으려고 노력해요. 그 시나리오로 최고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거죠.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Q. 영화인들 사이에서 김민희의 영화 고르는 선구안이 좋다는 얘기가 종종 들려요. 작품 선택의 기준이 있나요?
김민희:
제 주장이 많이 들어갈 수 있는 작품을 선호해요. 제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캐릭터로 연기를 하고, 그 캐릭터를 통해 관객들에게 사랑 받을 때, 그때의 쾌감은 정말 짜릿하죠.

Q. ‘우는 남자’ 현장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고 들었어요.
김민희:
영화를 찍는 내내 내가 이렇게 감정을 꺼내는 게 힘들었나, 생각을 많이 했어요. 쉽게 꺼내서 쓸 수 있는 일상적인 감정이 아니었던 거죠.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그 부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어려워도 그런 감정을 연기해 내는 게 또 배우로서의 즐거움이고 쾌감이잖아요. 그리고 현장에서 제가 역할의 감정에 집중하면 감독님과 스태프들도 각자 역할에 집중하면서 제 감정이 흐트러지지 않게 해줬어요. 서로가 맡은 역할을 책임감 있게 너무 잘 해주고 있을 때, 굳이 웃고 떠들지 않아도, 현장에서 생겨나는 에너지는 굉장히 크죠. 그런 점에서 즐거운 현장이었어요.
김민희

Q. 그나저나, 모경이 어딘가에 살아있다면 그녀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김민희:
피폐한 삶을 살고 있을 것 같아요. 그게 너무 안타까워요. ‘사죄하려는 곤의 마음이 모경에게 어떻게 가 닿았을까’, ‘곤이 모경에게 사죄하고 얻으려 했던 것은, 이런 결과가 아니었을 텐데…’ 서로가 서로를 보지 못했지만 굉장히 얽혀 있었던 그 시간들이 너무 안타깝더라고요. 그래서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참 자리를 뜨지 못했어요. 제가 여운이 남는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라, 특히 더 마음에 와 닿았던 것 같아요.

Q. 그럼 김민희는 어때요. ‘우는 남자’를 보낸 후 김민희는 어디로 가고 있나요.
김민희:
현실에 충실하려고 해요. 매 작품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면서요. 많은 분들이 물어보세요.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으냐고. 그건 자연스럽게 필모가 쌓이면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어요.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에요.

글.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제공. 딜라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