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 “건재해줘서 고맙다고? 아직 갈 길이 멀다”(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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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을 빼놓고 한국 헤비메탈의 역사를 논할 수 없다. 8장의 앨범은 그들이 ‘한국 헤비메탈의 거장’임을 말해준다. 음반의 무게보다 묵직한 것은 쉼 없이 무대에 오른 블랙홀의 행보다. 국내 헤비메탈 밴드 중 블랙홀처럼 전국을 ‘군 단위’로 돌며 억척스럽게 공연을 한 팀은 찾아볼 수 없다. 리더 주상균이 대학교 교내 밴드로 블랙홀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이 1985년. 1989년에 1집 ‘미러클(Miracle)’을 발표한 후 사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블랙홀은 지치지 않는 열정 그리고 음악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활동에 임해왔다. 최근 9년 만에 발표한 신보 ‘호프(Hope)’에서 느껴지는 것은 바로 오랜 세월 다져온 앙상블과 베테랑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음악적 내공이다. ‘밴드’는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세월이 쌓이는 만큼 내공이 축적되는 법. 그것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블랙홀이다. ‘한국 메탈이 척박하다’라는 흔한 말은 블랙홀 앞에서 핑계에 불과하다. 무소의 뿔처럼 달려온 블랙홀의 주상균(기타·보컬), 정병희(베이스), 이원재(기타), 이관욱(드럼)을 지난 18일 양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Q. 재작년부터 새 앨범이 나온다고 들었는데 앨범이 늦어졌다. 신곡이 아닌 손에 잡히는 음반은 무려 9년 만이다.
주상균: 전작인 8집 ‘히어로(Hero)’ 이후 정말 충실함이 단긴 앨범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 최근 몇 년간 우리가 해봤던 음악이 아닌, 새롭게 해봤으면 하는 스타일의 곡들을 만들었다. 그것들이 하나로 모이니 ‘희망’이라는 단어로 일맥상통하게 묶이더라. 그래서 ‘호프’라는 제목을 달았다.
정병희: 기다려준 팬들에게 너무 죄송하다. 우리가 활동을 멈추고 있었다면 지난 9년이 길게 느껴졌을 수 있을 텐데, 사실 우리는 쉬지 않고 공연을 해 와서 이렇게 긴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올해가 데뷔 25주년인데 그저 그런 기념음반식의 앨범을 내고 싶진 않았다. 제대로 된 블랙홀을 보여주고 싶었다. 블랙홀 시즌2처럼 다시 태어난 느낌이다.
주상균: 난 팬들이 이렇게 절실하게 고대하고 있는지 몰랐다.(웃음)
정병희: 역시 음악 하는 이들에게 음반은 참 중요하다. 우리도 어렸을 때 좋아하는 밴드의 새 앨범을 학수고대했잖아. 그런 감정들이 새록새록 다시 떠오른다.

Q. 리더 주상균은 새 앨범을 낸 시점에서 블랙홀을 30년 가까이 이끌어온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주상균: 그런 것 전혀 없다. 일단 팀은 내가 이끄는 것이 아니고 멤버들이 다 같이 똘똘 뭉쳐서 가는 것이다. 그리고 지나간 세월을 잘 되돌아보지 않는다. 우리는 그냥 연습 생각뿐이다. 25주년 이런 건 옆에서 누가 알려줘야 알게 된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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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지금의 멤버들이 뭉친 지도 길게는 20년 넘은 세월이 흐른 것으로 알고 있다. 처음 만난 순간이 기억나나?
정병희: 내가 상균 형을 먼저 알았다. 서문악기사에서 연주하는 것을 처음 봤다. 당시 블랙홀이 3인조였는데 상균이 형이 혼자 기타를 엄청 화려하게 연주하는 거다. 그걸 보고 저 사람하고는 음악 하면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블랙홀이 베이스가 빠져서 처음에 아는 사람을 통해 도와주러 갔는데 헬로윈의 ‘이글 플라이 프리(Eagle Fly Free)’라는 엄청 어려운 곡을 카피해오라는 거야. 야, 이거 정말 힘들겠더라! 도와주러 갔다가 여기까지 온 것이지. 그게 1990년이다.
이원재: 난 원래 나름대로 앨범을 준비하던 차였는데 블랙홀 4집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녹음 때 코러스를 도와주러 갔었다. 그때 블랙홀이 3인조라 공연에서는 기타를 도와줬는데 자연스럽게 기타리스트로 합류하게 됐다.
이관욱: 2002년부터 함께 했으니 12년이 됐다. 대학가요제 출전 동기인 이원재의 권유로 인해서 들어왔다. 이원재와는 블랙테트라로 함께 대학가요제에 나갔었다.
주상균: 각 멤버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끝까지 계속 가야한다는 말 한 번 해본 적 없다.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함께 오게 됐다.

Q. 블랙홀의 음악 특성상 트윈 기타가 생명이다.
주상균: 음악적 역량은 기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성품이라고 생각한다. 원재는 음악적 성정은 말할 것도 없고 성품도 좋다. 원재와 항상 기타 톤에 대해 상의한다. 우리는 비슷한 음역대의 기타를 쓰고, 이펙터도 같은 것을 사용한다. 이펙터를 교체할 때는 둘이 함께 바꾼다. 사운드를 같이 가야 하니까.

Q. 주상균은 보컬보다 기타리스트로서 정체성이 더 강하다고 알고 있다.
주상균: 사실이다. 난 기타리스트다. 보컬도 악기의 일부, 팀 사운드의 일부라고 본다.

Q. 이번 앨범을 내기 전에 블랙홀의 지난 8장의 음반을 모두 연주하는 기획 릴레이 공연 ‘히스토리’를 개최했다. 공연 회차마다 하나의 앨범을 모두 연주했다. 어떻게 기획하게 됐나?
주상균: 그런 공연이 한 번쯤 필요하다 생각했다. 우리처럼 긴 세월 활동해온 팀은 팀의 역사를 제대로 짚어줄 필요가 있다. 20년 넘게 활동해오다보니 우리가 만든 기타 리프에 당시 유행하는 코드, 세월의 흔적이 모두 담겨 있다. 더 직접적인 이유는 팬들 때문이다. 우리가 활동이 저조하던 2010년에 팬들이 자기들끼리 돈을 모아 브이홀(라이브클럽)에서 단독공연을 열어 준 적이 있다. 팬들이 홍보도 직접 하고 우리 개런티까지 챙겨줬다. 그때 너무 감동을 받아서 팬들에게 나름의 선물을 주기 위해 ‘히스토리’를 기획하게 됐다.

Q. 1집부터 8집까지 모든 곡을 연주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이원재: 처음 해보는 곡들도 있어서 엄청 고생했다. 새 앨범 시즌에는 신곡 위주로 공연을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늘 하던 레퍼토리 위주로 연주를 한다. 그런데 첫곡부터 마지막곡 까지 트랙별로 연주를 하려니까. 20년 만에 처음 하는 곡들도 있더라. 힘들었던 만큼 우리한테도 팬들한테도 뜻 깊은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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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호프’에는 8집 이후 싱글로 발표한 4곡과 신곡 5곡이 담겼다. 음악적으로 시도해보고자 한 것이 있다면?
주상균: 이번 앨범은 콘셉트를 미리 짜고 곡을 만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각각의 곡 스타일에 집중을 했다. 평소 우리가 가치를 두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가령, 멜로디는 좋은데 너무 상투적이었던 것들. 또 우리가 헤비메탈이기 때문에 거부했던 것들. 그런 것들을 우리 음악에 받아들여보고자 했다.

Q. 메탈이기 때문에 거부했던 것은 전자음악을 도입한 ‘유니버스(Universe)’를 말하는 것인가?
주상균: 전자음악 요소를 도입한 것은 2008년 싱글 ‘E.C.I.C’, ‘더 프레스 디프레스(The Press Depress)’가 먼저였다. ‘유니버스’는 가장 최근에 만든 곡이다. 이번 앨범을 정리하는 곡이 하나 필요했다. 다른 곡들이 시대를 담은 비망록과 같은 곡이라면 ‘유니버스’는 우리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관념적인 곡이다.

Q. 설명한 것처럼 블랙홀의 곡들은 비망록처럼 시대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곡들이 많다. 블랙홀처럼 정치 역사에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록밴드도 드물다.
주상균: 블래홀 노래는 우리 주변의 이야기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응당 다뤄야 할 것, 바꿔나가야 할 것을 노래할 뿐이다. 알아도 모른 척, 몰라도 아는 척 한발씩 빼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세상이 안 바뀌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계속 노래해야 한다.

Q. 신곡 ‘단기 4252년 3월 1일’은 동학농민운동을 다룬 2집의 ‘녹두꽃 필 때에’와 4집 ‘잊혀진 전쟁’의 연장선상의 곡으로 3·1운동을 재조명하고 있다.
주상균: 최근 역사 왜곡이 너무 심하지 않나? 역사의 정통성에 대해 짚어보고 싶었다. 3·1운동에 대한 노래가 하나 없더라.

Q. ‘그 길은 외롭지 않습니다’는 팬 50여 명이 코러스로 참여했다.
주상균: 오랜 세월 함께 해온 팬들과 함께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팬들이 합창단 못지않게 불러줘서 너무 뿌듯한 순간이었다.
정병희: 전국, 심지어 미국에서도 팬이 와서 녹음해 참여를 했다.
이원재: 우리 팬들이 각별하다. 다른 팀들이 무척 부러워한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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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블랙홀은 꾸준한 공연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데뷔 후 쉬지 않고 무대에 올랐는데 지금까지 몇 회의 공연을 한지 혹시 셈을 해볼 수 있나?
정병희: 세보지 않아 모르겠다.(웃음) 한 번 전국을 돌면 정말 쉬지 않고 공연했다. 하루에 몇회 씩 한 적도 있다.
주상균: 이동하는 차 창문에 빨래를 말리면서 이동하기도 했다. 냄새가 대단했지.(웃음)

Q. 특별히 기억에 남는 지역이 있나?
주상균: 하나 꼽기 어렵다. 경상북도 김천, 문경과 같은 곳에 가도 우리 앨범을 가지고 있는 팬들이 있다. 관객들이 너무 좋아하니까. 나중에는 시에서 군 단위로 공연을 확대했다. 우리를 처음 보는 팬들이 환호를 보낼 때에는 가슴이 뭉클하지.

Q. 최근 80~90년대 활동했던 헤비메탈 밴드들이 재결합하는 움직임이 있다. 블랙홀은 꾸준히 공연해온 거의 유일한 팀이 아닌가? 비결이 있나?
정병희: 하나의 단체라는 것이 사람이 문제가 없으면 길게 갈 수 있다. 돈도 중요하지만 사람끼리 잘 맞으면 극복할 수 있다. 우리는 멤버들끼리 음악적, 성격적인 앙상블이 잘 맞아떨어진 거다. 상균 형이 끌어주고, 우리가 밀어주고.
주상균: 밴드는 가족과 같다.

Q. 평단에서는 블랙홀을 유럽풍 멜로딕 스피드 메탈에 한국적인 정서를 이상적으로 배합한 밴드로 평가하곤 한다. 동의하나?
정병희: 우리는 메탈 말고도 다양한 음악을 듣는다. 블랙홀 장점은 멜로디가 아름답다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스피드메탈부터 올드 팝의 정서까지 가능한 팀이다. 메탈의 화려한 연주, 풍성한 화음, 서정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소들이 우리 안에 있다. 연주하다보면 정신이 없다.

Q. 최근 후배들 중 인상적인 팀이 있다면?
주상균: 브로큰 발렌타인이 느낌이 좋았다.

Q. 블랙홀은 해외의 전설적인 메탈 뮤지션들도 많이 만났다. 추억이 많겠다.
주상균: 주다스 프리스트가 첫 내한공연을 왔을 때 우리가 인터뷰를 직접 했었다. 너무나 겸손해서 가슴이 뭉클했다. 마이클 쉥커를 만났을 때에는 그가 쉬는 시간에도 기타를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을 보고 반성을 하게 됐다. 확실히 진짜 뮤지션들에게 있어서 연습은 삶 그 자체다. 그러니까 긴장 없이 릴렉스하게 연주할 수 있는 거겠지.

Q. 3월 29일 올림픽공원 K-아트홀에서 앨범 발매 기념 공연을 연다. 이번 공연에는 상당한 장비가 투입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주상균: 이번 공연과 앨범은 의미가 정말 크다. 이번에 새 소속사 윈엔터테인먼트와 함께 하면서 블랙홀은 크루와 함께 움직이는 체제를 갖추게 됐다. 우리를 위한 음향, 조명이 소속사를 통해 한 팀으로 활동하면서 공연도 보다 체계적으로 준비할 수 있게 됐다. 블랙홀 시즌2의 느낌이다.
김주현 프로듀서: 블랙홀이란 팀의 멤버가 열 명 넘게 늘어난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블랙홀을 20년 넘게 지켜봐온 음향, 조명 엔지니어들이 이번 공연을 위해 뭉쳤다.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다. 록 공연도 짜임새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노래만 들려주기보다는 멋진 무대를 연출해야 한다.
정병희: 후배들이 ‘블랙홀 선배들이 건재해 계셔서 항상 고맙다’는 말을 하곤 하는데, 우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공연도 그런 본보기가 됐으면 한다.

글.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제공. 윈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