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민│연기라는 십자가를 짊어진 구도자

공허한 눈동자가 힘겹게 움직이고, 그 움직임에 따라 컴퓨터는 한 글자 한 글자를 적어나간다. 루게릭병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남자가 그렇게 어렵사리 작성해 애인에게 보여준 글귀는 ‘죽여줘’다. 하지만 여전히 빛나지 않는 눈동자에 이미 죽음의 그림자는 드리워 있다. 눈빛으로 말을 한다는, 흔하게 쓰이지만 실제로 경험하기 어려운 수사는 이렇게 영화 <내 사랑 내 곁에>에서 김명민이 연기한 죽기 직전의 백종우를 통해 온전한 무게감을 되찾는다. 그리고 동시에 누구나 다 한다는 눈빛 연기라는 어휘 역시 김명민을 통해 그 진정한 의미를 드러낸다. 아니 정확히 말해 관객으로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마침내 새로운 포지션에 당도한 배우

사실 <내 사랑 내 곁에>를 보며 공평무사하게 스토리의 흐름만을 따라가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온 몸이 굳고 근육이 빠져나가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루게릭병이 과연 김명민이라는 배우를 통해 어떻게 형상화될지에 대한 궁금증이 계속해서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크랭크인 당시에도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건 그가 불치병에 도전한다는 사실이었고, 제작보고회 당시 모든 초점은 연기를 위한 그의 살인적 감량에 모아졌다. 그가 김명민이기 때문이다. 이순신과 장준혁, 강마에를 통해 우리는 연기자가 정말로 다른 인격을 창조해내는 기적 같은 순간을 경험했다. 때문에 백종우가 죽는 과정을 보면서 김명민이 죽음을 연기하는 과정을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해 죽음의 과정을, 서서히 수척해지고 몸이 굳어가는 과정을 그대로 따라가는 김명민의 연기는 전작의 강마에를 연상케 하는 장악력을 보여주진 못한다. 그의 연기력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뜻이 아니다. 아니, 앞서 말한 눈의 움직임을 비롯해 손가락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재활 훈련 중 핀을 놓치는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 앙상하게 마른 그의 몸은 거의 다큐멘터리 수준의 리얼리티를 획득한다. 다만 그것이 전작들에서처럼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극적 효과를 만들어내지 못할 뿐이다. 기본적으로 종우의 죽음이 아닌, 그에 대한 지수(하지원)의 헌신적 사랑이 플롯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대신 주변으로 살짝 물러난 그의 연기는 과거의 작품에서 볼 수 없던 포지션에 이른다.

김명민이 다른 인격을 창조해내는 기적 같은 순간

돌이켜 보건데 김명민은 작품의 주제의식 자체를 관통하고 플롯을 장악하는 진정한 의미의 주인공을 연기할 때 가장 가공할 흡인력을 발휘했다. 그에게 ‘명민좌’라는 호칭을 붙여준 MBC <하얀 거탑> 장준혁과 MBC <베토벤 바이러스> 강마에는 단순한 주인공이 아니라 드라마 전체를 이끄는 집도의자 지휘자다. 때문에 그가 장준혁의 진짜 의사 같은 손놀림과 현역 지휘자가 인정하는 강마에의 지휘 실력에 대해 “드라마로 들어가는 본질”이라고 설명하는 건 정확한 표현이다. 천재 외과의사의 뛰어난 수술 능력이 드라마 안에서 완벽하게 형상화 될 때 “저, 장준혁입니다”라는 대사 안의 오만함과 정치적 야심 역시 리얼리티를 확보하며 그와 연결된 명인대학병원 안의 다양한 정치적 암투 역시 생생한 질감을 얻는다. 입지전적 엘리트인 강마에에 대한 동경과 반발의 자장 안에서 현실감을 얻은 석란시향 단원들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그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드라마의 세계에선 어색하기 그지없는 “똥. 덩. 어. 리” 같은 대사조차 그 상황과 캐릭터에 꼭 들어맞게 느껴진다. 김명민이 장악한 드라마라는 무대는 현실의 불완전한 모방으로서의 리얼리티가 아닌, 드라마 자체의 극적 리얼리티로 움직이고 관객은 거기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그의 연기가 정점을 이룬 작품들이 동시에 마스터피스로 기억되는 것은 그래서다. 그에 반해 음모에 휘말린 피해자가 된 <리턴>에선 마취되지 않은 아내를 수술해서 죽게 했다는 자책감에 눈물, 콧물을 흘리며 오열하는 열연을 보였음에도 음모와 반전이 난무하는 플롯 안에서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고, 스스로도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진” 작품으로 꼽는 <무방비 도시>에선 장준혁을 기억하는 팬들의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내 사랑 내 곁에>는 마스터피스로 분류하긴 조금 어려운 범작임에도 김명민의 필모그래피 안에서만큼은 상당히 흥미로운 작품이다. 그는 여기서 장준혁이나 강마에처럼 플롯의 중추를 담당하는 건 아니지만 그 둘처럼 기존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던 백종우라는 캐릭터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지수가 조금은 뜬금없이 자신의 손과 발을 묶고 몸부림치다가 루게릭병의 괴로움을 깨닫고 눈물을 흘릴 때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건 실제로 굳어있는 백종우의 육체가 보여주는 리얼리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스스로 극을 끌고 나가지 않았을 때 김명민의 메소드 연기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즉 그가 과거 주연으로서 드라마 캐릭터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처럼, 소위 감초 연기라 말하는 조연 배우들의 미니멀한 자연스러움과는 다른 존재감의 서포터의 영역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것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이처럼 전혀 다른 포지션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김명민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무한에 근접한다는 뜻일 것이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