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매혹적인 공포영화들

서태지를 좋아하던 소녀는 가수가 되기 위해 괌에서 서울로 날아왔다. 그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무대가 좋았던 소녀는 올리비아 핫세라는 별명을 얻고, 뒤이어 나올 수많은 걸그룹들에 앞선 이름이 되었다. 그렇게 원더걸스, 소녀시대, 2NE1 이전에 SES로 누구보다 화려한 10대를 보낸 유진은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레 아이돌이라는 신기루를 성공적으로 지워냈다. 불장난 같은 첫사랑 때문에 미혼모가 된 세진 (MBC <원더풀 라이프>), 요리사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연변처녀 봉순 (MBC <진짜 진짜 좋아해>), 남편과 사별한 뒤 취직하려고 애쓰는 나영(KBS <아빠셋 엄마하나>)까지 유진은 대중과 가장 가까운 드라마 안에서 촌스러워 보이기까지 한 모습으로 요정의 날개를 벗어던졌다. 그렇게 친근하고 편한 이미지로 가수 출신 연기자들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던 연기력 논란도 영리하게 넘겼다.

드라마로 차근차근 배우라는 수식어에 실릴 무게를 만들어온 유진은 영화 <그 남자의 책 198쪽>을 통해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원래 담백한 영화들을 좋아했어요. 일상적인 담담한 이야기요.” 10대 이후 단 한 번도 평범한 또래의 삶을 체험해보지 못한 그녀가 역설적으로 가장 돋보였던 것은 끅끅 트림하고, 혼자서 순대국에 소주를 잘도 먹는 씩씩한 은수를 통해서였다. 실연의 상처에 휘청거리는 남자의 곁에서 자신의 상처도, 그의 상처도 어루만질 줄 아는 속 깊은 도서관 사서는 이제는 요정보다 배우의 수식어가 좀 더 잘 어울리는 유진을 대변했다. 배우로 첫걸음을 내딛은 지도 벌써 10년. 유진은 “원래 타고나길 낙천적이고 느긋한 성격” 덕에 특별히 방황한 적도 없이, 너무 욕심 부리지도 않고 천천히 그 시간을 걸어왔다. “재미있는 영화라면 무서운 것도 가리지 않고 꼭 찾아본다”는 담대하기까지 한 유진이 당신에게 추천하는 영화는 공포영화들이다.

1. <디센트> (The Descent)
2005년 │ 닐 마샬

“하도 무섭단 입소문을 많이 들어서 꼭 극장에서 보려고 했던 작품이에요. 아쉽게도 집에서 DVD로 봤는데, 아 역시 극장에서 볼 걸 하는 후회가 들 정도로 무서우면서도 좋았어요. 어떤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봤는데 굉장히 강렬했어요. 우선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긴장감이 크고 그 잔영이 계속 남아요. 전 원래 공포영화를 보는 순간은 무서워도 보고 기억에 남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보고나서 며칠 동안 그 허여멀건한 괴물들이 자꾸 생각나서 섬뜩섬뜩 했어요.”

교통사고로 딸과 남편을 잃은 사라(슈어나 맥도널드)를 위해 동굴탐험을 제안한 친구들. 그러나 익스트림 스포츠로 마음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려는 강한 여자들의 시도는 참극을 맞이한다. 이름 모를 원시 동굴에서 길을 잃고, 친구들은 한 명씩 의문의 존재에게 공격을 받는다. 실제 폐쇄공포증을 느낄 만큼 CG 없이도 동굴을 완벽하게 재현한 세트는 피범벅이 된 괴생명체와 여자들의 사투보다 더 숨 막힌다. 영화가 최종적으로 끝나는 순간까지 한시도 신경줄을 늦출 수 없는 긴장의 지뢰밭들이 펼쳐진다. <쏘우>, <큐브> 등 클리셰에 잠식당하지 않은 신선한 공포영화들을 선보인 ‘라이언스 게이트’사의 작품이다.

2. <장화 홍련> (A Tale Of Two Sisters)
2003년 │ 김지운

“참 예쁜 공포영화죠? (웃음) 소품이나 세트가 보통의 공포영화들과 다르게 너무 섬세하고 아름다웠어요. 그래서 너무 무서웠지만 시각적인 즐거움을 극적으로 체험했던 거 같아요. 결말까지 이어지는 이야기 전개도 세련됐구요. 원래 색감이 좋은 영화에 끌리는데 <장화홍련>이 딱 그랬어요. 물론 문근영 씨와 임수정 씨의 연기도 훌륭해서 기억이 오래 남는 영화예요.”

<달콤한 인생>, <놈놈놈>을 통해 남자들의 세계를 스타일리시하게 그려낸 김지운 감독은 사실 무섭지만 웃긴 <조용한 가족>, 무섭지만 아름다운 <장화홍련>으로 무서운 이야기에 일가견이 있다. 어린 두 딸, 방관자 같은 아버지, 아름답지만 어딘가 기괴한 계모가 한 집에 살게 되면서 집안에는 짙은 어둠이 깔린다. <달콤한 인생>에서 에스프레소를 홀짝이는 선우, <놈놈놈>의 만두를 우적거리는 이상한 놈 등으로 먹는 모습으로 인물의 성격과 이야기를 조율해 보이는 감독답게 <장화홍련>에서도 비스킷을 먹는 계모(염정아), 가족식사 자리에서 히스테리를 부리는 수미(임수정)의 모습으로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섬세하게 주조했다.

3. <식스 센스> (The Sixth Sense)
1999년 │ M. 나이트 샤말란

“<식스센스>는 자타공인 반전영화의 시작이었죠. 당시에는 너무나 귀여웠던 할리 조엘 오스먼트도 어쩜 꼬마가 저렇게 연기를 잘할까 싶었구요. 원래는 영화의 반전에 별로 신경 쓰는 편이 아니었어요. 좀 밋밋하다고 생각되는 담백한 영화들을 좋아해요. 그래서 좋아하는 영화중에 일본영화가 많기도 하구요. 그런데 <식스센스>를 보고 난 이후에는 반전의 미덕을 알게 됐달까요? 반전은 영화를 흥미롭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오프라인과 온라인 가릴 것 없이 너도나도 <식스 센스>의 스포일러를 유포하던 때가 있었다. 그만큼 이 영화에서 마지막 반전은 그때까지 관객이 보아왔던 영화의 모든 내용을 엎어버릴 만큼 강력한 것이지만, 그것을 빼고서도 <식스 센스>는 솜씨 있게 공포를 조련해낸 영화다.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귀신들의 이미지는 혼자 있는 것을 두렵게 만들고, 액션 없이도 묵직한 존재감을 만들어낸 브루스 윌리스도 흥미롭다. 이후로도 꾸준히 <언브레이커블>, <해프닝> 등의 문제작들을 만들어온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출세작.

4. <디 아더스> (The Others)
2001년 │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이 영화도 반전이 있는 영화네요. 그만큼 공포영화에서 반전은 빼놓을 수 없는 것 같아요. 사실 어렸을 때는 스티븐 킹 소설도 많이 보고, 무서운 영화들을 자주 봤는데 좀 커서는 즐겨 보진 않았거든요. 뭐랄까, 영화 속의 공포가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랄까? 그런데 <디 아더스>는 슬프면서도 아 충분히 저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좋았어요. 겁에 질려있으면서도 그게 역설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무섭게 하는 니콜 키드먼 연기도 너무 좋았구요.”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햇빛에 노출되면 안 되는 희귀병에 걸린 아이들까지 건사해야 하는 그레이스(니콜 키드먼). 그러나 아픈 아이들만큼이나 연약한 그녀를 도와주던 하인들은 갑자기 사라지고, 낡은 저택에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아이들은 자꾸 헛것을 보고, 그레이스에게도 환청까지 들린다. 아무래도 귀신이 들린 것 같은 집. 그레이스는 기도로 난관을 이겨내고, 집과 아이들을 지키려고 하지만 점점 그 집착이 그녀를 잡아먹는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들을 괴롭히던 존재와 마주치면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알게 된다.

5. <더 홀> (The Hole)
2001년 │ 닉 햄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도라 버치의 광기어린 모습도 인상 깊었지만 키이라 나이틀리 때문에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영화예요. 키이라 나이틀리가 영화 초반에 잠깐 등장하는데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예뻐 보였는지. 그 때는 지금처럼 유명하지 않아서 영화 보는 내내 ‘아까 그 여자애는 대체 누구야’ 이랬다니까요. (웃음) 물론 집착에서 모든 게 비롯된 이야기나 아이들이 한정된 공간인 지하에 갇혀서 벌어지는 사건들도 특이했구요.”

공포영화와 10대는 뗄 수 없는 관계다. <13일 밤의 금요일>, <데스티네이션> 등 수많은 공포영화의 희생양이자 최후의 생존자는 모두 소년, 소녀들이었다. 어리지도 젊지도 않은 아슬아슬한 나이는 불안한 공기를 만들어 내야하는 공포영화와 닮아있다. 리즈(도라 버치)는 짝사랑하는 학교 킹카와 지하 벙커에서 비밀스러운 파티를 할 기회를 잡지만 사랑이 샘솟아야할 그곳은 살육의 현장으로 뒤바뀐다. 원하는 것에 맹목적으로 빠져드는 10대 소녀의 집착은 그 자체로 공포영화의 훌륭한 소재가 되었다.

“이제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요가학원>은 공포영화지만 촬영하는 내내 재미있었어요. 전에 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이니까요. 저는 도전을 즐기는 편이거든요. 이 영화를 끝내고 나니까 선택의 폭도 더 넓어진 거 같고, 이제 좀 더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린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는 바람에 외모에 집착하게 되는 <요가학원>의 쇼핑호스트 효정으로 여름 공포영화 대열에 선 유진. 언뜻 서른을 목전에 둔 실제 유진의 상황과 겹쳐진다. “전 효정이처럼 소심하진 않지만 여자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아름다워지고픈 끝없는 욕망 같은 거요. 그걸 그려낸 영화라 무섭기도 하지만 관객들, 특히 여자 분들은 정말 공감 많이 하실 거예요.” 이제는 말을 가려서 하는 아이돌에서 아름다워지고픈 욕망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20대 후반의 여배우. 느긋한데다 소심하지도 않고, 공포영화도 즐겨보는 이 담대한 아가씨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