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리│둘리, 아직 쌍문동에 살아있다

거의 모든 한국인은 둘리를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모든’ 둘리를 안다고 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1983년 4월 김수정 작가가 <보물섬>에서 연재를 시작한 <아기공룡 둘리>의 둘리를 기억하지만, 1983년생들은 동명의 TV 애니메이션이나 극장판 애니메이션 <얼음별 대모험>에서 둘리를 만났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소년챔프>의 <BS(베이비사우르스) 돌리>의 둘리를 기억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요즘 아이들은 SBS에서 1월 8일부터 매주 목요일 오후4시에 새로운 둘리를 만날 것이다. 둘리는 장르와 시대를 옮겨가며 재탄생했고, 탄생 26년째인 지금도 캐릭터 상품으로,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으로 산다. 이것은 한국 만화 역사상 유일무이한 영광이다. 하지만, 이 영광에는 몰락의 역사가 함께한다.

둘리, 1980년대판 <가족의 발견>

자, 다시. 우리는 모두 둘리를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 중 ‘오리지널’ 둘리를 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보물섬>에 연재되던 <아기공룡 둘리>는 연재 종료된 지 10년이 훨씬 넘었다. 그 시대에 만화책을 읽은 사람을 제외하면, 지금 사람들은 몇 편의 애니메이션과 캐릭터 상품을 통해 둘리를 접한다. 그리고 그 둘리는 만화 속의 둘리와 매우 다르다.
애니메이션 속에서 둘리는 고길동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는 장난꾸러기이자, ‘요리보고 저리봐도 알 수 없는’ 귀엽기만한 캐릭터다. 또한 시공을 초월하며 모험을 펼치는 <얼음별 대모험> 속의 귀여운 둘리다. 물론 <보물섬>의 둘리도 그랬다. 그러나 동시에 둘리는 세상에서 인간의 일상에 가장 잘 적응한 공룡이었다. 둘리는 밥 한 그릇 더 먹으려고 고길동에게 아부를 떨 줄 알았고, 넉살좋은 눈웃음으로 곤란한 상황을 모면할 줄 알았다. 지금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고길동이 둘리를 기르느라 애먹은 것만 기억할 뿐, 희동이를 ‘업어 키운’ 것이 둘리라는 것은 잊는다. 그건 <아기공룡 둘리>의 잊혀진 퍼즐 조각이다. 김수정 작가가 심의 문제로 아이를 공룡으로 바꾼 것에서 둘리가 탄생했다는 일화가 보여주듯, <아기공룡 둘리>는 사실상 아이의 시선에서 본 한 가정의 이야기였다. 부모와 모두 헤어진 둘리, 도우너, 또치, 희동이가 고길동과 같이 살면서 그와 한 가족이 되는 일종의 대안가족 이야기가 <아기공룡 둘리>였다.

특히 <아기공룡 둘리>의 가족관은 그 당시 비슷한 스타일의 <로봇 찌빠>나 <고봉이와 페페>와는 정반대였다. 두 작품은 <아기공룡 둘리>처럼 평범한 가족에 로봇이나 외계인 같은 생명체를 등장시키긴 했지만, 그 작품 속에서 그들의 가족은 이상적인 서민 가정이었다. 안정된 직장이 있는 인자한 아버지, 꼼꼼하고 착한 어머니, 말썽꾸러기지만 착하고 씩씩한 아들. 반면 <아기공룡 둘리>의 가족들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 고길동은 늘 빠듯한 월급 때문에 고민하고, 둘리가 마법으로 프로야구 선수가 되자 둘리가 번 돈을 빼앗으려 머리를 굴린다. 반면 둘리 일행은 끊임없이 고길동을 괴롭혀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1980년대에 <아기공룡 둘리>는 가족이 따뜻한 정만으로 살지 않음을, 때론 협상과 거짓말과 폭력을 동원할 수도 있는 관계라는 것을 코미디로 풀어냈다.

둘리를 안다고? 당신이 아는 둘리는 잊어라

그래서 <아기공룡 둘리>는 아동용이면서도 아동용만화가 아니었다. 가족의 징글징글한 모습들을 코미디로 용해시킨 이 만화는 어른들에게는 성인용이었으되, 아이들에게는 그들의 현실과 판타지가 겹쳐있는 세상이었다. 그들은 부모에게 구박당할 때 고길동과 둘리의 관계를 자신에 대입했고, 판타지가 필요할 때는 마법을 부리는 둘리와 함께 집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절묘한 균형 속에서 <아기공룡 둘리>는 아이들이 깊게 몰입하면서, 동시에 꿈을 꿀 수 있는 만화가 됐다. 특히 김수정 작가가 1년 단위로 <아기공룡 둘리>의 흐름을 조절하며 일상과 판타지를 넘나든 것은 지금 봐도 놀랍다. 그는 매해 연말연초 사이에 두세 달 정도 연재되는 스케일이 큰 판타지적인 사건들을 집어넣고, 그 사이에는 소소한 에피소드를 배열하며, 6개월쯤 한 번씩 새로운 캐릭터들 (꼴뚜기 왕자나 램프의 할아버지 같은)을 등장시켰다. 마치 지금의 ‘미드’를 연상시키는 이런 에피소드 배열방식은 아이들이 <아기공룡 둘리>를 판타지와 그들 눈높이에서 본 가족 드라마 양쪽으로 즐기도록 만들었다. <아기공룡 둘리>, <쩔그렁 쩔그렁 요요>, <일곱 개의 숟가락> 등 김수정 작가의 가족 이야기와 직장인 만화였던 <날자 고도리>에서 보여준 서민들의 일상에 대한 코믹한 묘사, 그리고 <아기공룡 둘리>와 <아리아리동동>의 판타지가 결합해 한국 가정의 일상과 1억 년 전 공룡시대의 판타지가 공존하는 걸작이 탄생했다.

이는 지금도 <아기공룡 둘리>의 팬들이 둘리를 잊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최규석 작가는 <아기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통해 나락으로 떨어진 어른 둘리의 이야기를 그렸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현실과 판타지의 가교 역할을 했던 둘리에 대한 가장 정확한 오마주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김수정 작가는 <BS 돌리>를 통해 어른이 돼 돈 걱정에 시달리는 둘리의 이야기를 그렸다. 그리고 그 때의 어린 독자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아기공룡 둘리>의 에피소드를 곱씹으며 둘리를 기억한다. 어른이 된 <아기공룡 둘리>의 독자들이 둘리 대신 고길동에게 시선을 주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조금씩 둘리가 아닌 고길동의 나이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보물섬>같은 월간 만화잡지가 1990년대 일본 만화의 공습에 잘 버틸 수 있었다면, 또는 <아기공룡 둘리>가 미국처럼 다양한 형태의 코믹스로 발간될 수 있었다면, <아기공룡 둘리>는 자신의 팬과 함께 성장하는 만화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둘리는 그의 일상을 잘라낸 ‘아동용’ 애니메이션의 캐릭터가 됐다. 사람들을 열광시킨 그 때의 콘텐츠들은 사라지고, 캐릭터의 이미지만 남았다. 어디서나 어울리는 귀여운 공룡. 그렇게 둘리는 진짜 ‘아동용’이 됐다.

그래서 새로운 애니메이션 <아기공룡 둘리>는 ‘둘리 리턴즈’일 수도 있다. 김수정 작가가 직접 감독을 맡은 이 애니메이션은 둘리의 모습을 만화의 그림체와 가장 가깝게 그렸다. 둘리의 넉살맞은 눈웃음도 그대로 살렸다. 물론, 둘리에게 “밉냐고? 미운 정도면 말을 안해!”라며 폭언을 쏟아 부으면서도 둘리를 떼놓지 못하는 고길동과 둘리 일행의 징글징글한 어떤 관계도 계속된다. 물론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다르고, 20여년 전의 원작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은 아직 요즘의 호흡을 다 따라잡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기공룡 둘리>는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 캐릭터가 되는 대신 그 때의 아이들을 즐겁게 했던 둘리의 모습을 복원시킨다. 그건 둘리가 캐릭터 숍에서 벗어나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드디어, 우리 모두 알 때가 됐다. 진짜 아이들을 꿈꾸게 만들었던 그 둘리를.

글. 강명석 (two@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