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내 영화의 원전이 된 영화들

이상한 등장이었다. 90년대 말 홍상수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라는 문제작을 들고 나타났을 때 그는 분명 같은 언어를 쓰고 있지만, 전혀 다른 말투를 가진 전학생 같았다. 이후 <강원도의 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로 이어지는 그의 작품을 만나면서 누군가는 그에게 열광했고 누군가는 그를 불편해 했다. 마치 숨기고 싶은 알몸을 들킨 것처럼 당황스러운 순간들, 분명 우리 속에서 나왔지만 감히 스크린 위에서 재현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적나라한 치부들. 그의 영화 속에서 인간의 행동이란 일관성의 지배아래 놓이지 않는 것이었고,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사건의 사실과 진술은 종종 엇갈렸으며, 사람들간의 대화는 자주 엇박을 탔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의 입에서 “와, 진짜 웃긴다”라는 말이 들렸다. 치밀하고 다소 냉정한 인간 행태분석의 사례들처럼 보였던 예전 작품에 비해 최근 홍상수의 영화는 좀 더 편하다.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주인공의 동선을 따르는 구조는 갈수록 더 단순해졌고, 길 위에서 마주하는 사람들간의 대화에는 난데없는 유머가 맴돈다. 그렇게 홍상수로 가는 길은 좀 더 흥미롭고 재미있어졌다. 물론 그렇게 방심해서 웃는 순간 뒤통수를 얼얼하게 가격하는 한마디는 여전하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딱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해요.”

“제가 관객의 입장에서 그 영화 좋다,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는… 결국 만드는 사람이 자신에게 솔직했구나 느꼈을 때 인 것 같아요. 매체와 그 사람과의 친숙한 과정과 관계 속에서 나온 영화라는 느낌을 받을 때 좋더라고요.” 홍상수 감독이 추천하는 5편의 영화는 보기에 따라 ‘머리 아픈 예술 영화 패키지’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영화를 20대 후반까지 다 본 것 같아요. 그 이후에 영화를 아예 안본 건 아니고, 동시대에 만들어지는 영화가 나쁘다가 아니라 저한테 맞는 영화가 있는 것 같아요. 제 영화의 원전이 되고 원류가 되는 영화는 모두 그 때 본 영화였으니까요.” 그러니 다음에 소개하는 이 영화들은 이렇게 부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착각했던 남자, 홍상수 ‘창세기’로 들어가는 비밀의 열쇠라고.


1. <어느 시골 본당 신부의 일기> (Journal d`un cure de champagne)
1950년ㅣ로베르 브레송

“스물여덟이었나, 시카고예술대학에서 공부하던 중에 봤는데 너무나 큰 영감을 받았던 정말 아름다운 영화였어요. 당시는 극영화에 회의를 느껴서 실험영화 쪽으로 시도를 하고 있었는데, 이 영화는 다시 내러티브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어요. 그 사람이 쓴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을 보면 브레송은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영화의 요소들을 사고하고 종합한 사람이었지요. 저에게 영화라는 매체를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입니다.”

어느 시골성당, 한 신부가 일기를 써내려 간다. 그의 기록을 통해 보여지는 동네 사람들은 어린 소녀부터 어른들까지 어딘가 절망적인 표정과 함께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충실하고, 아름다운” 눈을 가진 젊은 신부는 적막함과 외로움, 병든 육신, 신을 향한 끊임없는 질문 속에 시달리며 점점 쇠약해져 간다.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소설을 각색한 로베르 브레송의 대표작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2. <오데트> (Ordet)
1955년ㅣ칼 테오드르 드레이어

“좀 이상한 영화지요. 사람들이 실내에서만 왔다 갔다 하고, 죽었던 사람이 끝에 별다른 설명 없이 다시 살아나니까요.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런 스토리의 종교적인 측면은 아니에요. 이 영화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이나 대사, 화면의 연결 같은 것들은 순전히 리얼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형식주의적이지도 않는 독특하고 강한 힘과 리듬이 있어요. 보는 중간 중간 힘들어지기도 하지만 (웃음) 참고 보다 보면 무언가 강하고 시원한 것이 확 와 닿는 순간이 있는 그런 영화예요.”

황량한 시골 마을, 평생을 신실한 믿음으로 세 아들을 키워오던 보르겐가의 늙은 아버지는 혼란스럽다. 가장 똑똑했던 둘째 아들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현신이라 믿으며 미쳐가고, 막내아들은 종교적으로 대립되는 재단사 집안의 딸과 결혼하려고 한다. 이런 가족의 혼란을 어머니처럼 다독이던 며느리 잉거 마저 출산도중 죽게 되자 아버지의 신앙심은 돌연 방향감각을 잃는다. 카이 뭉크의 <말씀>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잔다르크의 수난> 등으로 알려진 덴마크 출신 칼 드레이어 감독의 최고작으로 손꼽힌다. 제3회 서울 충무로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3. <탐욕> (Greed)
1925년ㅣ에릭 본 스트로하임

“아, <탐욕>이 있었지, 생각하면 그냥 든든해져요. 내 마음 속에 기둥처럼 서 있는 영화랄까. 8시간이 넘는다는 원본을 보지도 못했고, 원작을 읽어본 적도 없지만 그 놀라운 디테일을 살리기 위해 감독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가 느껴져요.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음악이 깔려있어서 인지 무성영화인지도 모르고 볼만큼 재미있었어요. 보통의 무성영화보다 삶에 훨씬 근접한 시선이 느껴지고 그 묘사가 소박하고 충실해요. 감독인 에리히 본 스트로하임의 개인사를 봤을 때 약간 사기꾼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웃음) 영화만은 목숨을 걸고 만든 사람 같습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던 샌프란시스코의 한 치과의사. 어느 날 그의 아내가 복권에 당첨되면서 이 갑작스러운 부와 그에 따른 탐욕은 이 부부를 파멸의 길로 이끈다. 드라마를 전달하는데 ‘소리’가 필수요소가 아님을 알려주는 파워풀한 무성영화로 프랭크 노리스의 1899년 작 소설 <맥티그>를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4. <라탈랑트> (L`Atalante)
1934년ㅣ장 비고

“그냥 너무 좋지 않습니까? 20년 전쯤에 처음 봤는데 보고 난 후에 뚝하고 눈물을 흘렸을 정도였어요. 화면전체를 배우에 대한 사랑과 앵글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채웠다는 생각이 들어요. 관능적인 것이 얼마나 위태로우면서도 아름다운가를, 그걸 지키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애써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예요. 그리고 한 장면 한 장면이 애정과 사랑이 넘쳐나기도 하고요. 그런 느낌을 이야기나 대사에 의지하기보다 오로지 카메라와 배우의 어떤 만남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으로 드러냈다는 점이 정말 훌륭한 것이죠.”

갓 결혼한 신부와 함께 항해를 떠나는 라탈랑트 호의 젊은 선장. 그러나 둘 만의 공간에서 행복해 하는 것도 잠시, 신부는 새로운 땅과 낯선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어느 날 홀로 파리의 거리로 발을 내 딛는다. 사라진 아내를 찾아 밤거리를 헤매는 남자, 잠깐의 탈출 속에 남편에 대한 사랑을 다시 깨닫고 회귀하는 여자. <품행제로> 같은 문제작을 세상에 내놓고 스물아홉에 폐혈증으로 요절한 감독 장 비고의 유작이자 현존하는 최고의 멜로드라마.

5. <녹색 광선> (Le Rayon Vert)
1986년ㅣ에릭 로메르

“에릭 로메르의 영화는 대부분 좋아하는데 특히 <녹색광선>을 좋아해요. 로메르는 뭔가 대단한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강박이 하나도 없었던 사람이에요. 오직 그 때 자기 곁에 있는 배우들의 표정과 몸짓, 자기가 살고 있는 공간, 자기를 둘러싼 공기와 날씨, 그리고 사람들이 주고받는 작은 감정의 결, 그런 걸 영화에 담았던 사람이지요. 그 사람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 공간에서 같이 숨 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녹색광선>에는 로메르의 그런 좋은 점이 가장 잘 느껴져요.”

바다는 가끔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순간 녹색빛을 뿜어낸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자주 찾아오는 순간이 아니다. 여름휴가를 맞이하지만 젊은 아가씨 델핀느는 함께 여행을 떠날 친구도 애인도 없다. 친구 집에서 잠시 머물지만 그곳에서도 마치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겉돌 뿐이다. 결국 우울과 슬픔으로 가득 찬 휴가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그녀는 역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함께 바다에 앉는다. 그리고 그들의 눈앞에 거짓말처럼 녹색광선이 내려온다. 자주 찾아오지 않아서 더욱 소중한 그 빛이. 1986년 베니스국제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


“촬영하면 오히려 몸이 더 좋아진다”

“<하하하> 촬영을 시작했을 땐 건강이 좀 많이 안 좋았어요. … 스트레스, 그런 거 때문이겠죠. 그런데 촬영하면서 오히려 몸이 좋아졌어요.” 얼마 전 촬영을 마친 <하하하>(夏夏夏)는 그저 “며칠 통영에 머물렀는데 여기서 영화를 찍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영화다. 춘천에서 경주로 제천에서 제주로, 이번엔 통영까지 “홍상수의 <6시 내 고향>이라도 찍을 셈이냐”고 물었더니 그제서야 지금까지의 조심스러운 말투를 풀고 허허허, 웃는다. 고현정, 김태우, 하정우 등 쟁쟁한 배우들이 노 개런티로 출연해 화제를 모았던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이어지는 10번째 장편영화 <하하하> 역시 문소리, 김상경, 예지원, 유준상 등 흥미로운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캐스팅 노하우가 있다거나, 작정을 하고 캐스팅을 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기본적인 이야기 틀이 세워지고 나면 우연히 만났거나 들었던 어떤 배우의 얼굴이 떠오르는 식이예요. 유준상 씨도 <해변의 여인> 때 아 이런 사람이구나 하다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찍으면서 이 사람에 대한 느낌이 뭔가 더 온 게 있었어요. 그래서 이번에 <하하하>를 같이 하자고 했던 거고.” 지난 8월 4일 제 62회 로카르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스위스로 날아간 홍상수 감독은 귀국 후 10월까지 <하하하>의 편집과 후반작업에 집중할 예정이다. 그렇게 통영에서 보낸 한 철, 이 남자의 여름, 여름, 여름 일기장은 내년 상반기쯤 관객들 앞에 펼쳐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