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오키, “내 음악이 재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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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오키는 2013년 한국 재즈계에서 가장 뜨거운 이름 중 하나였다. 김오키(오키나와 김, 본명 김영훈)라는 이름부터 음악, 외모, 앨범재킷, 그리고 백댄서 출신이라는 이력까지 뭐 하나 예사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물론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연주였다. 작년 여름 김오키의 앨범 ‘케루빔의 분노(Cherubim’s Wrath)를 처음 들었을 때 마치 성난 사자처럼 불어제끼는 괴성과 같은 테너색소폰 연주에 깜짝 놀랐다. 조세희 작가의 소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는 음악들에서는 앨범 제목처럼 분노마저 느껴졌다. 이것은 한국토양에서 나오기 힘든 연주, 즉 갑자기 ‘빵’하고 튀어 나온 것이었다. 최근 한국 재즈연주자들의 앨범 발매가 급격히 늘고 있고, 그런 양적 성장은 질적 성장으로 이어지는 법이라지만, 김오키의 연주는 그런 논리에 따라 나온 앨범이 절대 아니었다. 이것은 시류와 상관없이 개인의 의지와 노력(또는 투지)으로 인해 나온 결과물이었다. 김오키와 그의 밴드 ‘동양청년’은 한국 땅에서 어떻게 이런 음악을 하게 됐을까? 달려가 직접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궁금한 앨범이었다.

이런 김오키의 음악에 대해 아방가르드 재즈다, 프리뮤직이다, 구상앨범이다, 혹은 아마추어에 불과하다 등등 여러 말들도 많았다. ‘색소폰 두 달 배웠다’라는 신화와 같은 이야기도 돌았다. 확실한 것은 김오키의 음악이 절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음악은 아니며, 뚜렷한 메시지와 함께 엄청난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사실은 김오키가 자신과 비슷한 역량의, 또는 자신보다 숙련된 연주자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음반 ‘케루빔의 분노’에 대해 재즈 평론가 황덕호 씨는 “이 음반은 한국 아방가르드 재즈의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만든, 한층 심화시킨 작품”이라며 “아방가르드란 메인스트림의 입지가 확고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분명히 전달된다고 할 때, 국내의 아방가르드 재즈는 이제야 공허한 기법이 아니라 온전한 육체를 가질 수 있는 시점에 왔음을 이 음반은 말해주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 말처럼 김오키가 맨땅에 헤딩하듯이 녹음한 이 음반은 의미 없는 주먹질로 끝나지 않고, 청자에게 큰 울림을 전해줬다. 그리고 그 울림이 재즈 팬, 재즈 평론가, 연주자, 일반 음악팬들에게 각기 다른 의미로 전달됐다는 것이 재미있다. 2013년이 가기 전에 김오키를 만나야 했다. 작년 12월 18일 텐아시아 스튜디오에서 김오키를 만났다.

Q. 비보이 출신으로 알고 있다. 최근 Mnet ‘댄싱9’으로 유명해진 댄서 하휘동과도 친한 사이라고 하던데?
김오키: 춤출 때 알고 지낸 동생이다.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방송 댄서를 할 때 휘동이가 ‘우노’라는 팀의 대타 멤버로 우리 연습실에 왔었다. 그때 처음 보고 친해졌다.

Q. 비보이는 언제부터 하게 됐나? 젝스키스, 구본승 등의 백댄서부터 ‘스트릿 댄서’로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다.
김오키: 고등학교 때부터 했다. 원래 춤보다 음악을 더 좋아했다. 어린 시절에 AFKN을 통해 팝을 많이 접했다. 백인 래퍼 바닐라 아이스(Vanilla Ice)와 같은 힙합 전 단계의 음악을 들으며 열광했다. 우연히 ‘소울 트레인(Soul Train, 흑인 음악 프로그램)’이라는 프로그램을 봤는데 거기에 나오는 펑키(funky)한 흑인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고교 때 춤추는 친구들을 만나 흑인음악 이야기도 나누고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Q. 프로 댄서 생활까지 했다. 젝키, 구본승의 백댄서부터 스트릿 댄서 등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다.
김오키: 댄서보다는 뮤지션이 되고 싶었다.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주변 친구들이 이태원에 가면 배울 수 있다고 해서 이태원 나이트를 통해 방송 댄스계로 진출하게 됐다. 몸치인데 연습을 정말 많이 했다. 지하 연습실에서 잠 안 자고 연습하다가 누우면 자고, 눈 뜨면 연습하고, 그런 생활의 반복이었다. 군대 다녀오고 나서도 댄서 생활을 했는데, 내 음악이 너무 하고 싶었다. 그래서 테너색소폰을 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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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촬영에서 댄스 동작을 요구하자 “정말 오랜만에 해본다”며 몇 가지 춤을 선보인 김오키

Q. 왜 테너색소폰이었나? 재즈를 하기 위해서였나?
김오키: 재즈를 하고 싶어서 색소폰을 선택한 것이다. 사실 난 지금도 재즈를 못한다. 재즈를 잘 모를 때 베이스를 연주하는 친동생을 통해 존 콜트레인의 음반 ‘익스프레션(Expression)’을 들었는데 그게 너무 좋았다. 그때는 재즈 스탠더드도 잘 모를 때였다. 원래는 펑키한 흑인음악, 춤추기 좋은 음악을 좋아했다. 그런데 존 콜트레인에게는 정말 대단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뭔가 다른 차원의 음악이었다. 그때부터 고민을 많이 했다. 처음 색소폰을 배우려고 결심한 것은 캐논볼 애덜리의 리더 작 ‘썸씽 엘즈(Something Else)’ 때문이었다. 거기에 실린 ‘어텀 리브스(Autumn Leaves)’에서 마일스 데이비스가 부는 트럼펫이 색소폰 소리인줄 알고, 색소폰을 배우러 간 것이다.

Q. 누구나 재즈를 처음 들을 때에는 트럼펫과 색소폰 소리를 구분하기 힘드니까.
김오키: 그렇게 스물다섯살 때 처음 색소폰을 배우게 됐다.

Q. 색소폰을 달랑 두 달 배웠다는 이야기가 있더라.
김오키: 과장된 거다. 처음 학원에서 운지법, 스케일, 소리 내는 법 등을 두 달 정도 배웠다는 말이다. 이후 여기저기서 만난 연주자들에게서 많이 배웠다. 연주 하면서 만나는 전공자들에게도 배우고, 외국인들에게 배웠다. 재즈 기타리스트 CJ 김(김찬준) 형을 만나서 오랫동안 함께 연주하면서 재즈를 많이 배웠다. CBS라디오 ‘0시의 재즈’에서 CJ 김의 연주를 듣고 반했었는데 어느 날 연습실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친해지게 됐다. 찬준이 형에게서 정말 많이 배웠다.

Q. 최근에는 대학에서 재즈를 배우는 것이 보통이다. 유학을 가기도 한다. 그런 길을 생각해보지는 않았나?
김오키: 사실 실용음악과 시험을 한 번 봤는데 떨어졌다. 기본기가 없으니까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서 혼자 연습을 많이 했고, 직장인 밴드부터 주한 미국인들로 이루어진 팀까지 다양한 형태의 밴드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같이 하는 연주자들의 레벨이 점점 높아지기 시작하더라. 일반 라이브클럽에서 연주를 했고, 재즈클럽에 서게 된 것은 2008~2009년 쯤 대학로 ‘천년동안도’가 처음이었다. 최근에는 내가 떨어진 실용음악과의 학과장님과 함께 연주를 하기도 했다. 일반 재즈 연주자들은 내 연주를 신기하게 봤던 것 같다. 이상한 소리가 나오니까.(웃음) 같이 연주하는 연주자들이 “김오키는 학교 같은 곳에 가지 않고 혼자 하는 것이 좋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스타일을 헤칠 수 있다”고 말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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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주변인들에게 재즈를 배웠다고 해도, 비밥에서의 임프로비제이션, 앙상블 등을 익히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김오키: 난 지금도 비밥을 잘 못한다. 난 비밥 연주자가 아니고, 재즈 연주자도 아니니까.

Q. 그래도 결국 프리 성향의 아방가르드 재즈 앨범을 내게 됐지 않았나? 프리 재즈에는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됐나?
김오키: 존 콜트레인, 강태환, 박재천 등의 프리재즈를 음반과 영상으로 접하다가 실제로 접하게 된 것은 SMFM(프리 타악기 연주자 박재천이 주도하는 프로젝트로 재즈연주자 60여명이 동시에 한 무대에 오르는 집단즉흥 오케스트라)을 하면서부터다. 그 후로 프리로 가기 시작했다. 정말 너무 좋았다. SMFM을 처음 했을 때부터 ‘와 이거 죽인다! 이것만 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 후부터 박재천 선생님 연습실에 찾아가 많이 여쭤봤다. SMFM을 하기 전에는 스탄 게츠, 주트 심스와 같이 부드러운 소리를 내보려 노력도 했다. 그런데 성격에 너무 안 맞았다. 난 파로아 샌더스의 연주를 가장 많이 들었다. 그의 사자울음소리와 같은 톤을 따라하곤 했다.

Q. 성격도 연주처럼 괴팍한가?
김오키: 성격이 급하다. 답답한 것을 못 참는다. 에너지가 속에 부글부글 끓는데 이것을 숨기고 연주하려니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박재천 선생님이 자유롭게 연주하는 것에 대해 조언을 많이 해주셨다.

Q. 오키나와 여행에서 깨달은 바 있어서 이름을 김오키로 지은 것으로 알고 있다.
김오키: 2005년경에 음악과 일반 직장 사이에서 고민하던 시기에 너무 힘들어 막연히 여행을 떠난 게 오키나와였다. 공항에 내리니 정말 습했고 일본 같지 않았다. 길을 걷는데 카혼(타악기)을 두드리는 사람이 보였다. 마침 내가 색소폰을 들고 있으니까 연주자냐고 묻더라. 함께 연주를 하는데 지나가는 취객들이 돈을 주고 소니 롤린스를 연주해달라고 하는데 그런 분위기가 좋았다. 그렇게 밤 8시부터 새벽까지 함께 연주를 하고 놀았다. 연주를 마치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한국과 일본의 지난 역사에 대해 사과를 하더라. 오키나와는 류크왕국이라는 독립국이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통치를 받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처럼 일본, 미국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더라. 오키나와는 골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평화를 좋아하고 싸우는 걸 싫어한다. 오키나와 사투리 중에 난쿠루 나이사(なんくるないさ, 될 대로 되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우연히 오키나와의 재즈뮤지션들도 많이 만났다. 일본에 도착한 다음날 찾아간 재즈 클럽에 마침 오키나와의 대가 연주자의 생일잔치가 열려서 지역 연주자들이 잔뜩 모였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정이 갔다. 만나는 사람마다 따듯하게 대해줘서 한국에서 상처받았던 것을 오키나와에서 치료받는 느낌이었다. 그런 둥글둥글한 삶이 좋았다. 한국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따듯함이었다. 오키나와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김오키라는 예명까지 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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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재킷 속 김오키

Q. 데뷔앨범 ‘케루빔의 분노’는 어떻게 녹음하게 됐나?
김오키: SMFM을 하면서 성배 형(베이시스트 김성배)과 친해지게 됐다. 서촌에 ‘일일’이라는 카페에서 같이 연주를 하자고 했고, 그러다보니 함께 팀을 하게 됐다. 일일에 처음 간 것이 작년 가을쯤이었는데 얼른 녹음을 하자고 해서 음반 레코딩까지 하게 됐다. 원래는 내 음반을 대중에게 들려줄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냥 나 혼자 소장하려 했는데 일이 커졌다.

Q. 음반이 ‘일일사운드’에서 나왔다.
김오키: 성배 형과 함께 만든 레이블이다. 성배 형의 앨범 ‘페퍼 맨(Pepper Man)’과 내 앨범 ‘케루빔의 분노’를 녹음하는데 우리 앨범을 받아줄 레이블이 없을 것 같아서 일일사운드를 직접 만들게 됐다. 우리가 제작부터 유통까지 직접 한다. 기존 레이블에서 소개하지 못한 실험적인 음악을 만들어 소개해보고 싶었다. 지금 김성준 퀄텟(김성준, 한웅원, 스킴, 준킴)의 음반, 준킴의 새 앨범이 준비 중이다.

Q. 앨범재킷 배경은 어디인가?
김오키: 안양 덕천마을의 초등학교 때 살던 집이다. 지금은 철거촌이 됐다.

Q. 본인 앨범 제목은 왜 ‘케루빔의 분노’인가?
김오키: 약자들이 분노했을 때 어떤 마음일까 생각해봤다. 이 음반은 조세희의 소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모티브로 했다. 어느 날 라디오문학관에서 ‘난쏘공’을 듣는데 너무 가슴이 아파서 음악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꼽추’부터 ‘영희마음 옥희마음’까지는 ‘난쏘공’의 내용 순서대로 진행된다. ‘꼽추’는 소설 속 난쟁이 아저씨 친구 꼽추에 대한 이야기, ‘칼날’은 ‘난쏘공’의 단락 ‘칼날’에서 아줌마가 난쟁이 아저씨를 부엌칼로 구하는 장면을 음악으로 만든 것이다. ‘영희마음 옥희마음’은 소설 마지막에 난쟁이가 죽은 것을 본 영희가 오빠에게 난쟁이 놀리는 사람 다 죽이라고 하는 장면에서 영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만든 곡이다.

Q. ‘오리온 스타 하우스’는 왜색이 느껴지는 곡이다.
김오키: 오리온 스타 하우스는 오키나와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이름이다. 오키나와에 사는 산신 연주자와 친하게 지냈는데, 그 친구에게 오키나와풍의 음악을 하나 만들 테니 노래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곡에 삽입된 파도소리는 내가 오키나와에서 직접 녹음한 거다.

Q. 마지막 곡 ‘독립하지 못한 해방에 의한 자유’는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무슨 의미인가?
김오키: ‘독립하지 못한 해방에 의한 자유’는 박재천 선생님이 항상 말씀하는 것이다. 선생님은 우리 재즈 뮤지션들이 음악적으로 해방은 했는데 독립을 하지 못했다고 말씀하시곤 한다. 무슨 뜻이냐면 이제 한국 재즈 뮤지션들도 자기 하고 싶은 음악을 연주할 수는 있게 됐지만, 그 연주를 들려줄 공간, 관객은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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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팀 이름은 왜 ‘동양청년’인가?
김오키: 재즈는 본래 미국의 음악이 아닌가? 내가 미국 본토의 흑인처럼 연주를 잘 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 사람이 지닌 개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동양인의 힘을 보여주자는 의미에서 동양청년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Q. ‘케루빔의 분노’는 김성배(베이스), 서경수(드럼), 배지훈(피아노)와 함께 퀄텟(4인조)로 녹음했나? 연주자들에게 특별히 주문한 것이 있나?
김오키: 곡이 가진 메시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연주하길 바랐다. 그래서 ‘난쏘공’ 책도 읽으라고 주문했다.

Q. 보컬이 없는 연주음악에 메시지를 넣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김오키: 난 재즈를 메시지의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재즈의 역사를 보면 흑인들이 받는 핍박, 불평등에 항거하고 것들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들이 있다. 재즈는 얼마든지 사회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음악이다.

Q. 지금 하는 ‘동양청년’은 음반 녹음 멤버와 다르다.
김오키: 드러머 서경수만 남고, 베이스는 김윤철, 기타리스트 준킴이 들어왔다. 원래 내가 하고자 했던 음악은 기타가 포함된 밴드였다. 기타를 통해 록의 느낌을 가미한 음악을 해보고 싶었다. 지금의 동양청년이 하는 음악이 내가 생각했던 사운드다. 난 재즈에 갇히기 싫다. 내가 하는 음악은 재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이 동양청년 2기인데 이 편성으로 3월경에 앨범을 녹음할 예정이다. 5월쯤에는 음반으로 공개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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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청년

Q. 예전 인터뷰를 보니 오히려 스탠더드 재즈보다도 쉬운 게 프리 재즈라고 말했더라.
김오키: 나에겐 그렇다. 스탠더드를 연주하는 비밥, 하드밥을 들으면 코드, 리듬을 분석하게 돼 공부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프리재즈를 연주하면 하나의 스토리가 그려진다. 그리고 이 연주자가 왜 이런 짓을 하는 지 생각을 해보게 된다.

Q. 혹시 나중에 비밥 앨범 낼 생각은 없나?
김오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Q. 파로아 샌더스, 조 헨더슨, 존 존 등의 톤(음색)을 좋아한다고 했다. 김오키가 추구하는 톤은 무엇인가?
김오키: 내 속에 담긴 목소리. 속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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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오키 음반 ‘Cherubim’s Wrath’의 속지. 김오키의 지인들이 브이자를 하고 있다.

Q. 음반 속지에 보면 수십 명의 사람들이 얼굴 양쪽으로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고 있는 사진이 들어있다.
김오키: 이 좁은 땅에서 서로 아웅다웅하지 말고 사랑과 평화를 실천해보자는 마음으로 찍은 사진이다. 친구들, 일본에서 사귄 친구들, 함께 했던 재즈 연주자들에게 포즈를 부탁해서 사진을 찍었다. 사실은 여고생들의 브이 포즈를 패러디한 것이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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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