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원, ‘배우’라는 이름의 무게를 견디다(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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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CF 속 ‘오란씨 걸’로 분했던 고등학생 소녀는 MBC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MBN ‘왓츠 업’ 등의 드라마와 두 편의 공포영화(‘무서운 이야기’ 시리즈)를 거쳐, 2013년 SBS ‘상속자들’의 유라헬로 대중 앞에 섰다.

배우 김지원이 풍기는 묘한 분위기는 앳된 외모와 달리 연기자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그녀의 의외성에서 기인한다. 순정만화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얼굴만 본다면 ‘이제 막 연기를 시작한 신인배우구나’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가 데뷔 이래 쌓아온 작품 수만 해도 8편, 심지어 중학생 때부터 연습생 생활을 시작한 준비된 연기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언제나 도도할 것만 같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듯한 크고 선한 눈망울을 가진 그녀. 그런 인형 같은 외모는 되레 배우에게 악조건이 될 것만 같다는 오만과 편견 사이에 배우 김지원이 있었다.

Q. 본격 ‘격정 하이틴 로맨스’를 표방한 ‘상속자들’에서 처음으로 악역을 맡게 됐어요. 그간 작품을 통해 선보였던 청순가련한 역할과 달라 어려웠던 점은 없었나요?
김지원: 처음에는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 왠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듯한 느낌이 강했거든요. 근데 라헬이를 맡아 연기할수록 뭔가 내 안에 숨겨진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 같아요.

Q. 유라헬은 흔히 ‘악녀’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와는 느낌이 달랐던 것 같아요. 당신은 라헬의 어떤 부분에 매력을 느꼈나요.
김지원: 뻔한데 뻔하지 않은 게 ‘김은숙 작가의 힘’인 것 같아요. 오디션을 볼 때 가대본에 캐리어를 넘어뜨리며 “누구냐”고 소리치는 장면이 있었어요. 설정상 나이는 어리지만, 전혀 십대같지 않은 대사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그때 ‘아, 이건 내가 해야겠다’ 싶었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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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생애 첫 악녀 역할을 맡아 어떤 부분을 표현하기 위해 집중했나요.
김지원: 가장 신경을 쓴 것은 단순히 악녀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 은상(박신혜)과는 다른 종류의 슬픔을 보이도록 한 점이에요. 늘 도도하고 세련됐지만, 그 속에 아픔이 담긴…. 그게 시청자들이 라헬에게 공감할 수 있었던 부분이 아닐까요.

Q. 김탄(이민호)과 최영도(김우빈), 차은상은 말할 것도 없고 김원(최진혁), 이효신(강하늘) 등 모든 인물이 자신이 극복해 나가야 할 나름의 고민거리를 안고 있었죠. 라헬이 견뎌야 할 왕관의 무게란 무엇이었을까요.
김지원: 김탄의 무게가 서자의 슬픔, 은상은 삶의 무게, 최영도는 돈을 제외한 다른 것은 없는 공허함이었다면 라헬에게 왕관이란 자존심, 지위, 명예 그런 것들이 아니었을까요. 누군가에게는 그게 삶의 전부일 수도 있다는 것, 그게 포인트죠.

Q. 후반부로 갈수록 김탄과 붙는 신보다 영도와 함께하는 신이 많았어요. 개인적으로는 두 사람이 케미 돋는 모습을 지켜보는 데서 은근한 즐거움을 느꼈던 것 같아요(웃음).
김지원: 영도가 워낙 연기를 잘하니까, 저도 그 덕 좀 봤네요(웃음). 영도와 촬영할 때는 서로 연기를 주고받는 재미가 있었어요. 탄과 은상이 로맨스 담당이라면, 우리는 섹시 격정?(웃음) 대본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아무래도 한 그룹의 상속자로서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을 거고, 특히 영도는 어머니가 없고 나는 아버지가 없으니 공통분모가 있었던 셈이죠. 가족적인 부분에서 오는 동질감이 컸던 것 같아요. 아직도 우리 둘 부모의 결혼이 어긋난 뒤에도 영도가 “결혼이 파탄 나기 전까지 넌 내게 시스터다”라고 말했던 장면이 기억에 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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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결국 ‘상속자들’의 주인공들은 행복한 결말을 맞았어요. 라헬의 결말은 어떤가요. 더 풀어내고 싶었던 이야기는 없었나요.
김지원: 모든 결말이 결국 본인의 선택이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탄은 사랑을 위해 자신의 지위를 내려놓았지만, 원은 그러지 못했던 것처럼요. 라헬은 사랑도 못 받고 줄 사람도 없었지만, 마지막에 효신 선배를 만난 건 좋았어요. 분량상 라헬의 마음이 직접적으로 표현된 건 아니지만,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와 라헬이 가족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내용이 더 담겼으면 어땠을까 싶네요.

Q. ‘상속자들’ 속의 당신을 보면서 ‘참 연기가 많이 늘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칫하면 갈등을 조장하는 악녀로 그칠 수 있었던 라헬이 나름의 슬픔을 담고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모두 당신의 수훈이 아닐까 싶네요.
김지원: 연기는 하면 할수록 잘 모르겠어요. 원래 생각이 많아서 한 장면을 찍어도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연기하면서 처음으로 뭔가 시원한 느낌을 받았어요. ‘이렇게 하면 더 재밌구나’하는 것도 느꼈고요.

Q. 연기적으로 성장한 만큼 이번 작품을 통해 부족한 부분도 깨닫게 됐을 것 같아요.
김지원: ‘독한 역할을 맡아 한 신을 장악하는 연기를 선보일 수 있을까?’ 이 고민이 가장 컸어요. 초반에는 극의 흐름에 방해가 될까 봐 소극적으로 연기하기도 했고요. 지금도 앞선 방송분을 모니터하면서 그런 부분들을 고쳐나가려고 노력 중이에요.

Q. 원래 당신이 출연한 작품을 자주 모니터하는 편인가요.
김지원: 네, 몇 번씩 돌려보는 걸요(웃음). 가끔 궁금할 때가 있어요. 내가 어떤 마음으로 저 장면을 연기했을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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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CF ‘오란씨 걸’로 데뷔한 이듬해 장진 감독이 연출한 영화 ‘로맨틱 해븐’의 주연자리를 꿰찼고, 이후에도 공포영화 ‘무서운 이야기’ 시리즈 등 영화에도 꾸준히 출연해왔어요. 드라마와 영화 중 어떤 게 당신에게 잘 맞는 것 같은가요.
김지원: 영화는 가장 큰 장점이 급하지 않다는 거예요(웃음). 원래 연기할 때 만족할 때까지 찍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성격이라 이 점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또 드라마는 풀 샷, 투 샷, 버스트 샷 등 찍는 방법이 제한적이잖아요. 하지만 영화는 다양한 방법으로 세밀한 부분들까지 포착할 수 있죠. 영화가 제게 잘 맞는지는 몰라도 저는 영화가 좀 더 좋은 것 같아요.

Q. 데뷔한 건 2010년이지만, 중학생 때부터 연습생 생활을 했다고 들었어요. 어린 나이에 짜인 규칙대로 훈련을 받는 게 어렵지는 않았나요.
김지원: 그때는 연기만 배운 건 아니었어요. 노래, 연기, 피아노 등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배웠기에 즐거움이 있었죠. 또 공부를 딱히 잘한 것도 아니었기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는지도?(웃음) 가끔 힘들어서 울 때도 있었지만, ‘왜 난 이게 안 될까’하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생각은 안 했어요. 제가 원래 긍정적이거든요!

Q. 어릴 때 그렇게 긍정적이기는 쉽지 않을 텐데 정말 대단하네요(웃음). 부모님이 지원을 많이 해주셨나요.
김지원: 긍정적이려고 노력하는 거죠. 사실 제가 ‘쿠크다스 멘탈’이거든요. 부모님은 ‘지원이’에게 ‘지원’을 많이 해주셨죠(웃음). 물론 춤 연습 끝나고 “비욘세는 되는데 나는 왜 안 돼!” 하면서 울었을 때는 “그럴 거면 때려치워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어요(웃음). 하지만 연기자로 나선 뒤 열심히 하고 제가 연기에 애착을 보이니까 적극적으로 밀어주시더라고요. ‘로맨틱 해븐’ 때 시사회 티켓을 드리는데 어쩔 줄 몰라 하며 기뻐하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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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번 작품을 통해 좋은 모습을 보인 만큼 ‘상속자들’ 이후의 행보가 더 중요할 것 같아요.
김지원: 연기적으로는 앞으로 더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드리고 싶어요. 이번에 악녀로 재미를 느낀 만큼 라헬보다 더 독한 악녀도 좋을 것 같고, 기회가 된다면 ‘하이킥’ 때보다 더 밝고 푼수기 있는 역할도 맡아보고 싶어요.

Q. ‘김지원’은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나요.
김지원: 아직은 ‘배우’라는 말이 어색해요. 지금도 작품 활동을 하고 있지만, 이것도 제게는 무거운 왕관 같아요. 중요한 건 제가 앞으로 살아가며 그 무게를 견뎌낼 수 있는가 하는 거겠죠. ‘배우’라는 수식이 어색하지 않은 사람, 그게 지금 제가 꿈꾸고 있는 일이에요.

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