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인칭 관찰자 시점] ‘조커’를 삼킨 와킨 피닉스의 비감 어린 연기

[텐아시아=박미영 작가]

영화 ‘조커’ 스틸컷.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이 글에는 조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다크 나이트’(2008)에서 조커(히스 레저 분)는 자신의 양 입가로 번지듯 남겨진 흉터에 대해 여러 버전의 서사로 설명한다. 개중에 무엇이 허구고 무엇이 진실인지 알 턱이 없지만 훅 밀려오는 서사가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 날건달이었어. 하루는 평소보다 더 미쳐 날뛰었고, 엄마는 방어하려고 칼을 들었어. 아버지는 그게 심히 못마땅했고, 내가 보는 앞에서 엄마를 찔러 죽였지. 낄낄대면서. 그리고 내게 묻더군. 왜 심각한 표정이야? 그리곤 다가와서 칼을 내 입에 넣고는 웃게 만들어주마, 라고 했지.” 조커의 얼굴에서 처연한 표정이 안개처럼 일었다. 그 이후로 ‘다크 나이트’의 주인공은 조커였다. 적어도 나에게는.

보라색 수트를 입은 조커는 이름도 지문도 DNA와 치아 기록도 없는 흔적이 없는 사내였다. 조커는 고담시를 자신의 도시로 여겼고, 자신에게든 상대에게든 살갗을 뚫고 파고드는 고통을 즐겼고, 악당에게도 격조가 필요하다고 역설했고, 돈보다 세상의 몰락을 절대시했다. 매력적인 빌런은 영웅을 키우고, 서사를 파고들면서 비범한 결을 남긴다. 히스 레저가 분한 조커는 주인공인 배트맨(크리스천 베일 분) 뿐만 아니라 관객의 숨통까지 조이는 치명적인 매력의 빌런이었다. 지난달, 토드 필립스의 ‘조커’ 예고편을 보았다. 고작 몇 분 안에서도 심장이 마구 뛰었다. 선홍색 수트를 입은 조커, 즉 와킨 피닉스가 빚어낸 아찔한 밀도감이었다.

1981년 고담시. 슈퍼 쥐 떼가 득실거리고, 장티푸스가 퍼지고, 몇 주째 미화원들이 파업 중이라서 쓰레기까지 넘쳐난다. 돈도 일도 끊긴 가난한 시민들은 분노로 끓어오른다. 고담의 토박이인 광대 아서 플렉(와킨 피닉스 분)은 낡은 아파트에서 밤마다 노쇠한 어머니 페니 플렉(프랜시스 콘로이 분)과 함께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니로 분)의 TV 토크쇼를 보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다. 페니는 사업가 토마스 웨인(브래트 컬렌 분)의 집에서 30년 전 가정부로 일했던 인연을 가지고 줄곧 편지를 보낸다. 자신의 초라한 삶을 알면 도움을 줄 거라고 기대하지만 답신이 있어야 할 우편함은 텅 비어있다.

페니는 아서를 늘 ‘해피’라고 부른다. 너는 웃음을 주려고 태어났다고, 늘 웃으라고 하면서. 정작 아서는 거리에서는 10대 청소년들에게, 지하철에서는 직장인들에게, 직장에서는 동료 광대들에게 놀림감이나 웃음거리일 뿐이다. 우연히 그에게 쥐어진 총 한 자루가 지하철에서 첫 살인으로 이어진다. 시장 출마를 앞두고 TV에 출연한 토마스 웨인은 광대 모습을 한 살인 사건 용의자를 향해 힐난한다. 얼굴을 보일 용기가 없는 비열한 자, 한낱 광대에 불과하다고.

정신 질환을 앓는 아서는 무려 일곱 가지 약을 복용하면서도 그마저도 더 늘리고 싶은 지경이다. 우울한 것이 싫어서. 그리고 애써 참으려고 해도 기분과 상관없이 웃음이 터진다. 그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을 꿈꾸지만 다른 사람들과 웃음의 포인트마저 다르다. 시의 지원으로 무료 상담을 받는데 담당 사회복지사의 권유로 일기를 쓴다. 그는 일상도 적고, 조크도 적는 노트에 이런 글귀를 쓴다. ‘내 죽음이 내 삶보다 더 가치 있기를.’

아서가 꼽는 정신 질환의 제일 나쁜 점은 사람들 앞에서 아닌 척하는 것이다. 시의 지원이 끊겨서 마지막 상담이 되는 날,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말을 귀담아서 들은 적이 없는 사회복지사에게 아닌 척하지 않고 거침없이 털어놓는다. “난 평생 존재감이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이젠 아냐. 사람들이 날 알아보기 시작했어.” 한편, 코미디 클럽의 스탠드 코미디 동영상 덕분에 토크쇼에 출연하게 된 아서는 머레이에게 부탁한다. “무대에서 나를 ‘조커’로 불러줄래요?”

지난 2일 개봉한 ‘조커’는 슈퍼히어로 영화로는 최초로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DC 익스텐디드 유니버스에 속하지 않는 독립된 작품으로서 DC 코믹스를 대표할 만큼 강렬한 악당 조커의 탄생에 집중했다. 그래서 ‘조커’는 팀 버튼의 ‘배트맨’(1989), 크리스토퍼 놀런의 ‘다크 나이트’(2008), 데이비드 에이어의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보다는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1976) ‘코미디의 왕’(1983)이 떠오르는 작품이다. 만화와 영화 속에서 80년 가까이 유지된 교집합인 ‘믿을 수 없는 화자’는 반영되었다. 또한 DC 시리즈의 연결고리인 고담시, 토마스 웨인, 알프레드 집사, 아캄 주립병원 등도 등장한다.

‘더 행오버’(2009) ‘듀 데이트’(2010) ‘행오버 2’(2011)의 토드 필립스가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결말을 포함해서 젊은 시절 페니의 사진 뒤에 미소가 아름답다는 토마스 웨인을 의미하는 듯한 이니셜 ‘T. W.’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곁가지들이 뻗어있는 작품이다. 로렌스 셔 촬영감독은 65 알렉사 카메라로 음울한 풍경의 고담시와 그 안에서 침잠하는 조커를 담아낸다. 힐드루 구드나도티르 음악감독은 음악의 중심에 첼로를 둔 관현악으로 조커의 조마조마한 감정선을 건드린다. 인간의 목소리와 가장 닮은 악기로 불리는 첼로가 조커의 발걸음에 묵직하게 드리워진다.

고담시는 폭동으로 불타기 직전부터 시민들의 곪은 상처에서 발화 직전의 상태다. 그 암울한 도시에서 웃음을 전파하는 것이 꿈이었던 아서가 활개 치는 킬러 광대 조커로 태동하는 과정은 처연하고 서늘하다. 아서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싱글맘 소피(재지 비츠 분)와의 따뜻했던 순간도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망상임을 알아차린 순간, 살면서 단 1분도 행복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아서가 비극인 줄로만 알았던 자신의 삶이 코미디였던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아서가 아니다. 조커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와킨 피닉스는 하루에 사과 하나로 23kg을 감량하면서까지 조커의 메마른 외양을 빚어냈다. 연민, 공감, 배려가 사라진 사회에서 도시의 축축한 습기를 온몸으로 먹은 듯한 조커로 스크린에 등장해서 어마무시한 존재감을 발한다. 리들리 스콧의 ‘글래디에이터’(2000), 폴 토머스 앤더슨의 ‘마스터’(2012), 스파이크 존즈의 ‘그녀’(2013), 린 램지의 ‘너는 여기에 없었다’(2017)에서 그러했듯 쿨럭이는 감정들로 부글거린다.

‘조커’를 삼킨 와킨 피닉스의 비감 어린 연기는 찰나의 눈 끔벅거림에도, 천진한 어린아이와 주름진 노인의 표정이 오르내리는 얼굴에도, 툭 불거진 등뼈에도, 거리를 펄럭이며 질주하거나 냉장고 안으로 온몸을 욱여넣을 때도, 첫 살인 후 어두운 심연으로부터 조커가 꺼내지는 순간에도 스크린을 여백 없이 꽉 채운다. 마치 비명처럼, 탄식처럼, 울음처럼 흩날리는 웃음소리도.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박미영 영화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한 작가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진위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