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인칭 관찰자 시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귀가 쫑긋거리는 옛날 옛적에

[텐아시아=박미영 작가]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스틸컷./ 사진제공=소니 픽쳐스

*이 글에는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보채면 레퍼토리는 늘 하나였다. 바로 ‘똥 된장’이다. 서당 훈장이던 외할머니의 아버지, 즉 외증조부는 여자라는 이유로 글자를 단 한 자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렇게 총명한 맏딸의 눈을 가렸다. 숱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밑천이자 통로인 글을 말이다. ‘똥 된장’은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간 할아버지가 냇가에 내지른 똥이, 같은 시간 냇가에서 빨래를 하던 할머니가 된장으로 오인하는 바람에 그날 저녁 밥상에 올라간다는 내용이다. 나의 외할머니는 입담이 좋았다. 당시의 내가 똥, 방귀 등의 원초적 소재에 빵빵 터질 나이이기도 했지만, 외할머니의 구성진 입을 통하면 매양 서사가 덜어지거나 더해지면서 맛깔나는 이야기로 둔갑했다. 그래도 외할머니의 첫 단어 선택은 늘 같았다. ‘옛날 옛적에…’.

1969년 할리우드.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은 한물간 액션스타다. NBC 서부극 ‘바운티 로’의 현상금 사냥꾼 제이크 케이힐로 인기를 누렸지만, ‘바운티 로’를 종영까지 시키고 선택한 영화는 이후 그를 내리막길로 몰았다. 릭이 5년을 개고생해서 올라가서 10년을 제자리걸음하고 다다른 곳이 바로 비탈인 셈이다. 풋풋한 신예에게 얻어맞는 악역으로 배우의 삶을 유지하지만 그마저도 아슬하다. 항상 릭과 동행하는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 분)는 과거 릭의 스턴트 대역이었다. 현재는 릭의 위험한 촬영을 대신하는 일보다 일상의 짐을 덜어주는 매니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릭의 이웃집으로 전 세계에서 제일 핫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과 그의 아내이자 배우인 샤론 테이트(마고 로비 분)가 이사를 온다. 릭은 이들 부부와 인연을 맺고 싶지만 그닥 공을 들이지도 않는다. 서부극 촬영장에서 릭은 촬영 전에 먹으면 늘어진다고 점심까지 거르는 8살 아역 배우를 만난다. 리얼리티를 살리려고 촬영장에서는 배역명만 쓸 만큼 프로 의식도 강한 소녀다. 소녀는 월트 디즈니 전기를 읽으면서 디즈니는 50년, 100년 꼴로 나타나는 천재라고 극찬한다. 릭은 자신이 지금 읽는 서부물은 왕년엔 잘 나갔던 한 야생마 조련사가 스스로가 쓸모없어진 현실을 자각하는 내용이라고 소개한다. 책 속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을 한 릭은 그만 울컥하고 만다. 그리고 자신을 달래는 소녀에게 예고한다. “너도 15년 후엔 울게 될 거야.”

릭의 집에서 망가진 TV 안테나를 고치고 나서던 클리프는 거푸 마주치는 히피 걸 푸시캣(마거릿 퀄리 분)을 차에 태워준다. ‘맨슨 패밀리’의 일원인 푸시캣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스판 영화농장’으로 안내한다. 사실 클리프에게도 익숙한 곳이다. 8년 전 스턴트맨으로 촬영하러 갔던 곳이기에. 그곳에서 클리프는 기이하고 야릇하고 무례한 맨슨 패밀리에게 뜨거운 주먹맛을 보여준다.

6개월 후. 릭은 할리우드의 원로 에이전트 마빈 슈워즈(알 파치노 분)가 다리를 놓아준 이탈리아에 가서 4편의 헐거운 서부 영화를 찍는다. 모처럼 클리프도 스턴트 대역을 하며 바쁜 시간을 보낸다. 이탈리아인 아내도 생긴 릭은 귀국 전에 경제적 형편 때문에 클리프에게 더 이상 고용할 수 없다고 고한다. 우리의 여정은 끝난 것 같다고. 두 남자는 귀국하자마자 거나하게 취해서 석별의 정을 나눈다. 그날 밤,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릭의 집으로 향한다.

지난달 25일 개봉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Once Upon a Time… in Hollywood)’는 1969년 할리우드 뿐 아니라 전 세계를 충격에 빠트렸던 ‘샤론 테이트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쿠엔틴 타란티노의 직조틀에서 새로운 서사로 탈바꿈했다. 비록 허구일지라도 실화의 통각점이었던 배우 샤론 테이트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맨슨 패밀리를 응징하는 순간은 통쾌감까지 느끼게 한다. 전작들처럼 그의 이야기 배치나 완급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또한 영화 속의 영화나 영화 속의 드라마를 보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타란티노 특유의 핏물 범벅이나 몸부림치는 장면도 빠지지 않는다.

배우와 스턴트 대역으로 9년을 함께한 릭과 클리프는 친형제보다도 가깝고, 아내보다는 살짝 먼 관계다. 릭은 빨대를 더블로 꽂은 채 술을 홀짝거리고, 노래를 부를 때는 가벼운 발재간을 부리고, 거울 속 자신을 보며 대사를 까먹은 것에 대해 구제불능이라며 나무란다. 릭은 액션 배우지만 대놓고 뼈 때리는 말에 칭얼거리는 여린 남자다. 클리프는 트레일러에서 애견 브랜디와 단 둘이 살고, 시내에서도 스피드를 즐긴다. 참전 용사인 그에게 아내를 죽이고 빠져나간 인간이라는 소문이 낙인처럼 찍혀있지만 개의치 않는다. 자신을 향해 좋은 친구 같다는 평가에는 노력 중이라는 답으로 응수하는 쾌남이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의 아름다운 투샷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두 배우는 중년에 접어들었지만 아직도 가죽 재킷과 청재킷이 잘 어울리고, 패인 주름마저도 근사하다. 무엇보다 한껏 무르익은 두 배우의 연기가 특별한 케미를 발산한다.

마고 로비는 비극적 실화의 주인공인 샤론 테이트에 완벽한 호흡을 불어넣었다. 샤론은 귀엽고 작고 재능 있는 12살처럼 보이는 남자를 좋아하고, 낯선 이에게도 호의를 베풀 줄 아고, 상큼발랄하고, 흥이 넘치는 여자다. 특히 극장에 걸린 자신의 영화를 보러 갈 때 광채를 띤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매표소 직원에게 스스로를 소개하고, 자신의 연기에 반응하는 관객들의 모습을 아이처럼 감응하는 순간마다. 앞좌석에 올린 마고 로비의 시커먼 맨발바닥마저 귀여울 만큼 샤론 테이트를 사랑스럽게 빚어냈다.

극 중에서 8살 아역 배우가 월트 디즈니를 50년, 100년 꼴로 나타나는 천재라고 칭했다. 나 역시 쿠엔틴 타란티노가 그러한 천재라고 생각한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9번째 영화인 이번 작품에서는 영화를 향한 그의 지극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10번째 영화가 끝이라는 타란티노의 은퇴 선언은 못내 슬프다. 똑같이 ‘옛날 옛적에…’로 이야기를 시작할지라도, 귀를 쫑긋거리게 하는 이야기꾼이 어디 흔하단 말인가….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박미영 영화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한 작가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진위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