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평이 추천하는 이 작품] 칠흑 같은 햇살, 찬란한 파경 ‘미드소마’

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를 통해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영화 ‘미드소마’ 포스터. /사진제공=영화사 찬란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대낮에 비행기를 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잠수함을 타고 있는 것 같은 어둠을 경험하게 된다. 영화 ‘유전’(2017)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아리 에스터 감독은 신작 ‘미드소마’(2019)를 통해 동시대 누구와도 다른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낸 것 같다. 그는 수면을 유영하다가 심연으로 불쑥 잠수하는 법을 알고 있다. 머리를 멍하게 만드는 어퍼컷을 몇 번쯤 날리고, 날아드는 주먹을 제법 유연하게 피하는 세련되고 아름다운 몸짓도 보여줄 줄 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관객을 그로기 상태에 빠뜨릴 수도 있다. 물론 감성이 맞을 경우에만 말이다.

대니(플로렌스 퓨 분)는 정신이 불안정한 여동생 때문에 가족을 잃고 신경안정제에 의지해 힘겨운 시간을 보낸다. 그런 그녀가 버거워 헤어지고 싶지만 차마 놓아버리지는 못하는 남자친구 크리스티안(잭 레이너 분)은 스웨덴 교환학생 펠레와 스웨덴 시골 마을 호르가에서 열리는 축제 미드소마에 참여해 휴가를 보내기로 한다. 우연히 대니 역시 여행에 동참한다. 도착한 마을은 백야가 한창이다. 하얀 옷을 입고 맞아주는 마을 사람들과 그 뒤로 펼쳐진 아름다운 자연 속에는 갈등도 아픔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안식과 같은 축제 속에서 둘 사이의 균열은 파국이 된다.

영화 ‘미드소마’의 한 장면. /사진제공=영화사 찬란

호르가 마을은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그 속에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악행들이 율법이 되어 일상적으로 유지되는 곳이다. ‘미드소마’는 낯선 풍습으로 유지되는 공동체 속에 스며든 이방인들이 악행과 같은 폭력에 길들여지고 어느 순간 자발적으로 구속되는 과정을 내밀하게 바라본다.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인다는 마을의 풍습이 대부분 이방인들의 정서와 반하지만 대니는 유사 가족과 같은 이들 공동체에 손쉽게 동화된다. 이는 사람들이 유사 종교에 빠져들며 광신도가 되어가는 과정과 유사해 보인다. 유일하게 의지하는 크리스티안은 그녀를 계속 밀어내지만 호르가 마을 공동체는 그녀의 슬픔에 동화돼 한 마음으로 통곡해주기 때문에 대니는 점점 공동체에 흡수돼 간다.

이 속에서 에스터 감독은 폭력적이고 미스터리한 관계, 개방돼 있지만 감옥 같은 광야의 폐쇄성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낯선 장소에서 겪는 이방인의 두려움과 불안, 달아나려고 하지만 어느새 폭력에 길들여지는 아이러니까지 담아낸다. 긴 상영시간 동안 고어에 가까운 잔혹한 표현 때문에 불편할 수 있지만, 잔인하고 자극적인 속도를 원하는 관객들에게 ‘미드소마’는 그 속도가 너무 느려 불안정한 영화이기도 하다.

호르가 마을에서 처음 환각에 빠진 대니는 줄곧 수면제에 의지한다. 호르가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어디까지가 환각인지, 불면 속 악몽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 지는 지점이 있다. 하지만 극복하기 힘든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대니의 입장에서 보면 환각은 극복하기 어려운 현재의 통증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대니의 감정들이 빼곡하게 쌓이다가 5월의 여왕이 되면서 폭발하는 엔딩 장면은 반전에 가까운 충격과 섬뜩하고 서늘한 정서를 전달한다. ‘미드소마’는 주술과 같은 믿음을 지닌 공동체의 공포를 이야기하지만 대니의 시점을 중심으로 새롭게 읽어보면 파경을 맞이한 한 여인이 만들어내는 잔혹 멜로로 읽힌다. 그래서 이 영화, 처연하고 아프다.

최재훈(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