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명고> vs <30분 다큐>

<자명고> SBS 월-화 밤 10시 마지막회
사극의 흐름과 시청자 반응을 쫓다 보면, 종종 사극이 정치 커뮤니케이션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극의 주인공이 백성을 설득하는 정치인이라면, 그에게 열광하는 시청자들은 심정적으로 그의 백성인 것이다. 이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하는 비결은 간단하다. 일찍이 <자명고>의 고구려 대신 을두지(이영범)가 왕에게 아뢰던 말, “백성은 울기 좋아하고 감동받기 좋아한다”는 원칙에 충실하면 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자명고>는 이 원칙을 시종일관 배제했다. 사극의 백성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정치인의 의롭고 인간적인 언행이건만, <자명고>의 세계에서 연민이나 자비심 같은 인간적 감정은 군주의 덕목이 아니라 지배자의 치명적 결격사유였다. 호동(정경호)에게 눈먼 라희(박민영)의 사랑은 그녀를 대역 죄인으로 죽게 했고,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자명(정려원)은 조국의 원수 호동을 끝내 베지 못했으며, 왕이 되기엔 너무 인간적이었던 호동은 자명과의 동반자살로 비극적 사랑을 완성했다. 대무신왕(문성근)이 지배하는 세계는 끝까지 디스토피아였다. 마음 여리고 처세에 서툰 젊은이에게는 비참한 죽음만이, 호동의 계모 송매설수(성현아)처럼 독을 품고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더 독하고 모진 투쟁이 기다리는 곳. <자명고>의 인물묘사와 전개는 인간의 편에 선 사람들이 몰락하고 권력욕의 화신이 살아남는 현실정치 세계와 많이 닮았다. 하지만 감동과 눈물에 목마른 브라운관 너머 고단한 세상의 백성들에게는 이 드라마의 생소한 줄거리와 우울한 현실묘사, 기타 형식상의 미비점들을 포용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백성의 외면은 드라마의 생명까지 단축시켰으니, 역사 속 낙랑국을 따르기라도 하듯 묻혀버린 이야기들의 운명이 비감할 따름이다.
글 김은영

<30분 다큐> KBS2 월-금 오후 8시 30분
털실로 시작하는 오프닝이 예사롭지 않았다. 의학적이면서 페미니즘의 성격도 띠고 건강미용 상식까지 두루 섭렵한 ‘털이 뭐길래!’는 발랄한 제목만큼이나 어디로 튈지 모를 재미가 가득했다. 노출이 많은 여름철 다이어트와 함께 여성의 화두가 되는 털 관리. 피부조직의 한 가지인 털이 보습과 피부를 보호하는 기능을 가졌다는 의학적인 해석을 내리며 동시에 매일 한두 시간씩 털 관리를 하는 여성들, 다양한 방법으로 제모를 하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어느새 여성에게 머리털을 제외한 털은 미용의 대상이 된 상황. 그 기저에 깔린 여성과 남성, 심지어 의사마저도 여성의 털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회 인식을 보여준다. 사실 여성의 털에 대한 터부는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이어진 장대한 역사를 자랑한다고 한다. 중세는 마녀가 악마와 통한 증거가 털이었고, 서구에서는 1930년대부터 관습이 됐다고 한다. 그 터부를 깨고 싶었던 것일까? 그 어떤 방송보다 겨드랑이를 유독 많이 보여준다. 제모 받거나 인터뷰 하는 여성들은 물론이고 수영장을 찾아가 비키니 입은 아름다운 여성들의 겨드랑이만 찾아다닌다. 스타 농구선수인 김효범, 강혁, 이규섭도 슛 모션이나 얼굴이 아닌 자신의 겨드랑이가 클로즈업됐다는 사실을 알면 놀랄 것이다. 수염 난 남자 PD가 왁싱을 받는 여성들 사이에 앉아 약품으로 떼어낸 털을 들고 인터뷰를 한다. <멋지다 마사루>의 미역이 연상되는 장면이다. 여성의 털이 지저분해 보인다는 관습 앞에 장미의 가시, 체모를 대하는 시선을 바꿔보자며 맺음말을 던진다. 그러나 기실 ‘겨털’ 백화점과 같은, 혹은 겨드랑이 페티시를 충족시키는 괴작의 탄생이었다.
글 김교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