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 20년 진행 양희은 “긴 세월의 짝사랑”···편지 5만8천통에 담긴 위로와 공감(종합)

[텐아시아=유청희 기자]

서경석(왼쪽부터), 박금선 작가, 양희은, 강희구 연출이 4일 오후 서울 상암동 MBC 골든마우스홀에서 진행된 MBC 라디오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 기자간담회에 참석했다./wizard333@

“예전에는 주로 손편지가 많았습니다. 가정폭력에 대한 SOS 편지가 많이 왔어요. 특히 봄에 많이 왔습니다. 그런데 2008년 즈음에 관련법이 생기면서 그런 종류의 사연은 많이 줄어들었어요. 그런데 또 그 무렵에는 외국인 노동자 여성의 사연이 많이 오더군요. 요즘에는 ‘부모님 기다려주세요. 제가 취직할게요’ 이런 젊은 친구들 사연들, 그리고 자영업자들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사연이 자주 옵니다.”

1993년부터 MBC 라디오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이하 ‘여성시대’)를 맡고 있는 박금선 작가는 4일 서울 상암동 MBC에서 열린 ‘여성시대’ 양희은 진행 20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긴 세월, 쌓이고 쌓인 사연들이 역사가 됐다.

매일 오전 9시 5분 방송되는 ‘여성시대’는 ‘임국희의 여성살롱’으로 출발했던 40여년 역사의 장수 프로그램이다. 1975년 UN에서 ‘세계여성의 해’를 선포하자 MBC 라디오가 ‘여성’이 들어가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주부를 비롯해 다양한 사람들의 편지를 매개로 한 청취자 참여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얻었던 ‘여성 살롱’은 1988년 지금의 ‘여성시대’로 간판을 바꿔 달고 31년째 청취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양희은은 1999년 6월 7일 처음 ‘여성시대’의 마이크를 잡았다. 오는 7일이면 진행한 지 20주년이다. 그가 DJ 석에 앉은 뒤로 방송된 편지만 해도 5만8000여 통, 1만4600시간 동안 방송했다.

양희은은 “20주년을 목표로 시작했다면 결코 오지 못했을 시간”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그는 “한 1, 2년 생각하고 오다가 이렇게 됐다. 밖에서 보면 ‘와, 20년이야!라고 하겠지만, 막상 하는 사람은 그냥 하루 하루가 쌓인 거다. ‘여성시대’라는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따고 또 따고 그러면서 공부하는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MBC라디오 ‘여성시대’ 진행자 양희은./조준원 기자 wizard333@

양희은은 ‘여성시대’의 향후 계획을 묻자 “없다”고 잘라 말했다. 대신 청취자 사연의 무거움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는 “연예계 생활을 40년 넘게 하면서 단 한번도 ‘뭘 해야겠다’는 게 없었다. ‘새 노래를 불러야겠다’라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노래도 20대 때만 할 줄 알았는데, 60대 후반까지 하고 있다. 그걸 생각하면 계획이란 게 뭘까 싶다”면서 “‘여성시대’의 사연은 가볍게 날려 읽는 것보다는 감성을 눌러서 적은 사연들이 많았다. 초반에는 그게 내 갱년기 시절과 겹쳐서 많이 힘들었다. ‘이걸 언제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고 털어놨다.

양희은은  “’여성시대’가 여성이라는 단어를 내민다는 건, 아픔이 많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왜 프로그램에서 ‘여성시대’ 코너는 6일을 하고 ‘남성시대’는 하루를 하느냐는 얘기도 들었다. 나중에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박금선 작가가 4일 오후 서울 상암동 MBC 골든마우스홀에서 열린 MBC 라디오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 기자간담회에 참석했다. /조준원 기자 wizard333@

라디오의 시대도, 손 편지의 시대도 지났다. 하지만 ‘여성시대’ 제작진은 라디오를 통해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나눈다는 것의 의미를 강조했다. 박 작가는 “확실히 예전에는 손편지가 많았다”면서 “요즘은 SNS, 메신저 등 자신의 감정을 즉각적으로 해소할 장치들이 많다. 그렇지만 여전히 누군가에게 말을 하기 위해 편지가 온다”고 했다.

특히 양희은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의 의미를 강조했다. 그는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했던 걸 털어놓으면 자기객관화가 가능해지지않나. 그렇게 말을 하다 보면 매 맞는 아내는 쉼터로 나갈 용기가 생기게 된다”고 했다. 이어 “(20년동안 사연을 읽으면서)그렇게 안 보이는 연대가, 안 보이는 어깨동무가 거대하게 만들어지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고 있다. 그런 면에서 라디오가 갖는 힘이 있다. ‘저런 어려움 나도 뭔지 알아’ 하면서 ‘여성시대’가 위로와 힘을 주는 것 같다”고 했다.

강희구 PD는  “라디오에 추억 사연도 많이 오지만, 요즘은 아이에 대한 사연들이 많이 온다. 근로 사건과 관련한 문제가 오기도 한다. 그런 아픔이 다 사연에 녹아서 느껴진다”면서 “어떨 때는 우리가 시사프로그램 같은 느낌도 든다. 그렇지만 또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여성시대’는 음악프로그램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된다면 성공한 연출”이라고 했다.

서경석은 4년째 양희은과 함께하고 있다. 그는 “양희은의 다섯 번째 남자다. 그 누구의 ‘다섯 번째 남자’도 되고 싶지 않았는데, 그게 양희은이라면 50번째 남자라고 해도 좋다”고  말했다. 이어 “(양희은을 보고) 어마어마한 프로 정신을 배웠다. 시간 관념 철저하시고, 절대 식사시간을 미루지도, 당기지도 않으신다”면서 철저함을 20년 유지의 원동력이라고 짚었다.

MBC 라디오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의 DJ를 맡은 양희은(왼쪽), 서경석./조준원 기자 wizard333@

서경석은 ‘남자 DJ들이 주기적으로 바뀌는 데 어떻게 버틸 것이냐’는 질문에 오래 버티고 싶다는 의지를 밝혀 웃음을 자아냈다. 이와 달리 양희은은 “남자 출연자들이 주기적으로 바뀐 건, 그들이 더 좋은 자리를 찾아 떠난 것”이라면서 “그때마다 ‘내가 팔자가 센가?’ ‘왜 아침에 만나는 남자들이 다섯 명이나 바뀔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양희은은 때가 되면 물러날 것이라는 생각도 밝혔다. 그는 “나는 자유로운 게 좋아서 ‘여성시대’와 계약도 안 했다. 그냥 그만두면 그만두는 것”이라면서 자신이 ‘여성시대’를 그만둘 때는 ‘DJ를 권력의 자리로 생각할 때’라고 설명했다.

양희은은 “‘여성시대’라는 자리를 자신의 힘으로 알고 있고, 누구에게 충고하고 편지를 쓴 당사자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게 더 많아지면 이 자리를 놔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부탁했다. 내가 그렇게 되면  ‘마이크 내려놓고 나오세요’라고 말해달라고”라고 설명했다.

양희은은 “20주년 맞은 소회는 사실 없다. 서른 살 후반 즈음에 내가 뭔가를 해서 20주년이 됐다면 의미가 또 다르겠지만, 지금의 내가 라디오 20년 했다는 건,  그만큼 ‘여성시대’를 사랑해왔다는 뜻인 것 같다. 힘들고 너무 지치고, 콘서트랑 같이 겸할 때도 힘들고. 그러면서도 ‘여성시대’를 해왔다는 것은 긴 세월의 짝사랑이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유청희 기자 chungvsky@ten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