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선│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영화들

10년이다. 하이틴 패션지의 표지를 도맡던 여고생이 스크린에서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지도. 그러나 김민선에게는 데뷔 10년차의 나이테나 정체(停滯)가 느껴지지 않는다. 기다란 필모그래피를 가늠할 수 없는, 이제 막 두어 작품을 끝낸 듯한 청량함. 그것은 10대 시절과 비교해 변화가 거의 없는 외모 덕분이기도 하지만 정상에 오른 뒤에도 감지되는 묘한 불안함에도 기인한다. 물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치기 어린 방황에서 나오는 불안감은 아니다. 정제되고 이미 완성된 서른의 여배우에게 예상되는 모범답안이 아닌 다음에 무엇을 보여줄지 알 수 없는 설렘이다.

“배우는 겁을 먹어선 안돼요. 소극적인 자세에선 소극적인 성장만이 있으니까요.”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무력하게 소리를 지르던 소녀가 <하류인생>에서 고단한 삶을 사는 깡패의 아내가 될 때까지 단지 김민선은 필모그래피를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사진을 찍고,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리며 자신을 채워왔다. 그리고 쉼 없이 채워 온 것들을 온전히 비울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김민선은 만개할 수 있었다.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던 <미인도>의 윤복을 위해 그녀는 “모든 것을 비우고” 오로지 윤복으로만 다시 채웠다. 그림에 눈을 뜨며 세상 밖으로 나왔던 윤복은 사랑에 눈을 뜨며 여인의 기쁨과 슬픔을 새로 그렸다. 그리고 김민선의 몸과 윤복의 불안이 일렁이던 눈은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한 여배우의 한 시절을 증명했다.

사랑에 빠진 여인의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각인시켰던 그녀는 ‘자극적인 사랑’, ‘짜릿한 사랑’, ‘치명적인 사랑’ 등으로 오감을 자극하는 <오감도>로 다시 사랑 이야기의 한 가운데에 섰다. “우연히 마주친 한 영화가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 믿는” 김민선이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를 얘기한다.


1. <더 리더> (The Reader)
2008년 │ 스티븐 달드리

“아무런 정보 없이 봤다가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았죠. (웃음) <더 리더>는 그 해의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고, 케이트 윈슬렛이란 배우를 다시 발견할 수 있게 했죠. 소년과 연상의 여인과의 사랑. 어쩌면 어떤 이에겐 추잡한 스캔들 혹은 성적인 문란으로 비춰 질 수 있겠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들의 사랑이 단순한 성의 이끌림만은 아니란 걸 아실 거예요. 그렇기에 편견 없이 본다면 가슴에 좋은 작품 하나 남길 수 있을 거예요.”

마이클(데이빗 크로스/랄프 파인즈)은 사춘기의 여름 날, 한나(케이트 윈슬렛)를 만난다. 소년은 책을 읽어주고 여자는 소년을 첫 경험으로 이끈다. <오딧세이>, <채털리 부인의 사랑>,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등의 이야기가 둘의 만남의 배경음악으로 흐른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갑자기 사라지고 이후 소년의 인생을 쥐고 흔들 첫사랑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시 마주친다. 5번이나 아카데미 후보에 지명되고도 수상에 실패했던 케이트 윈슬렛은 이 영화로 마침내 샴푸통이 아닌 진짜 트로피를 거머쥘 수 있었다.

2. <물랑루즈> (Moulin Rouge)
2001년 │ 바즈 루어만

“지금 눈앞에서 공연 중인 무대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예요. 화려한 색채와 강렬한 비트… 꽉 움켜쥔 남자 손 안에 가느다랗게 떨리는 창백한 여인의 손 같달까요? 샤틴(니콜 키드먼)의 야심 때문에 점차 파국으로 치닫게 되지만 그녀의 야심조차도 사랑스러워요. 샤틴의 마지막 대사를 아직도 기억해요. “우리 이야기를 글로 써줘요.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사랑하는 거예요.” 진부한 스토리에 너덜거릴 정도로 넌더리난 결말인데 이토록 슬픈 이유는 뭘까요?”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보다 다이아몬드를, 진심보다는 신분 상승을 꿈꾸던 물랑루즈 최고의 가수 샤틴. 돈 많은 귀족에게도 도도하던 그녀는 가난한 시인 크리스티앙(이안 맥그리거)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둘의 비극적인 사랑과 별개로 폴 메카트니, 엘튼 존, 티나 터너에서 마돈나까지 뮤지컬 버전으로 재탄생한 히트곡들을 듣는 귀는 한없이 즐겁다.

3. <연인> (L`Amant)
1992년 │ 장 자끄 아노

“텔레비전이 거실에 한 대만 있던 시절 모두가 잠든 시간에 불 꺼놓고 몰래 가슴 졸이며 봤어요. 누군가의 사랑 이야기를 훔쳐본다는 에로티시즘이 깔려있긴 하지만, 영화는 그보다 한발 더 앞서나가 소녀의 마음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게 만들어요. 가난한 프랑스 소녀와 돈 많은 중국인의 이루어질 수없는 사랑 이야기에 감각적인 베드 신까지. 그 당시 꽤 많은 논란을 생산했던 건 그만큼 좋은 영화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프랑스 식민지령의 베트남은 동양도 서양도 아닌 모호한 분위기를 풍긴다. 여기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대부호의 아들(양가휘)은 겉모습도 사고방식도 서구의 것과 닮아있다. 그런 그에게 프랑스 소녀(제인 마치)는 자연스럽게 끌리고, 구질구질한 현실을 탈출하고자 청년과의 성적인 관계에 점점 더 빠져든다. 시간이 많이 흘러, 몇 십 년 뒤 그녀는 파리의 눈 내리는 다락방에서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회상한다.

4. <피아노> (The Piano)
1993년 │ 제인 캠피온

“사랑하는 그 무엇을 자신보다 더 아낄 수 있으세요? 이런 물음이 영화를 다 보고 나니까 떠오르더라구요. 해변 가에 피아노 한 대와 두 모녀가 서있어요. 마중 오기로 했던 사람들은 안 오고 짐과 함께 기다리는 두 모녀의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위태롭고… 영화는 이 위태로움을 계속 끌고 나가요. 정적이지만 동적인, 강렬하지만 차가운 영화의 화법은 구구절절한 말보다 영상 그 자체로 제 시선을 사로잡았어요.”

칸 영화제와 아카데미의 여우주연상을 휩쓴 홀리 헌터의 호연이 압도적인 영화는 역설적이게도 말을 못하는 에이다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여섯 살 이후로 말문을 닫아 버린 에이다(홀리 헌터)에게 유일한 감정의 분출구는 피아노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동안은 자유로울 수 있기에 피아노를 되찾게 해준 베인스(하비 키텔)와의 사랑은 첫 만남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건반을 어루만지고 사랑을 나누는 에이다의 손은 남편과 베인스 사이를 오가며 위태롭게 흔들린다.

5. <라붐> (La Boum)
1980년 │ 클로드 피노토

“이렇게 주제곡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작품이 또 있을까요? 게다가 소피 마르소의 앳되고 풋풋한 모습은 여자인 제가 봐도 마음이 보송보송해져요. (웃음) 사실 이 영화가 사랑에 관해 새로운 시각을 갖고 있진 않아요. 오히려 전 소피 마르소의 성장기를 엿보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는데, 관객이 여배우에 대해 갖는 사랑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닐까 싶어요. 너무 예뻐서 그냥 그 시절에 머물러주길 원하지만 시간은 결국 소피 마르소를 그 시절과 떼어 놨잖아요.”

전지현과 정우성의 광고 삽입곡으로 익숙한 ‘Reality’는 먼저 <라붐>에서 어린 연인들의 가슴 떨리는 순간을 장식했다. 아직 소녀라고 하기에도 덜 자란 13살 빅(소피 마르소)과 친구들은 여름방학을 맞는다. 빅의 부모님은 갑작스레 별거를 시작하고, 빅은 첫사랑을 시작한다. 풋사랑을 하며 자라는 아이들의 모습이 마냥 싱그럽다. 소피 마르소가 한국의 책받침 시장을 독식하기 전 앳된 모습은 ‘천상의 피조물’의 완벽한 예시로 모자람이 없다.


“배종옥 선배님이 참여하는 데 안할 이유가 없었죠”

“기획이 재밌었어요. 모이기 힘든 감독님들이 힘을 모았고, 배종옥 선배님이 참여하는 데 안할 이유가 없었죠.” 다양한 커플들의 아슬아슬한 에로스를 그린 옴니버스 영화 <오감도>에서 김민선은 영화감독(김수로)을 유혹하는 여배우다. 괴팍한 감독의 버릇을 고치려는 재기발랄한 신인 배우는 그녀에게 “갈 길을 몰라 수없이 헤맸던 어설펐던 신인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이제는 <여고괴담> 후배들에게 “지금의 스포트라이트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속 깊은 조언을 해줄 만큼 단단하게 자란 김민선은 또 다른 반전을 준비하고 있다. “7월에 홍상수 감독님과 함께 작업 할 거예요. 나머지는 아직 비밀이구요. (웃음)” 홍상수 감독과 현실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누군가를 만들어갈 그녀가 어서 보고 싶다. 이제 막 절정에 오른 여배우가 보여줄 또 다른 만개한 모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