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평이 추천하는 이 작품] 난 바뀌지 않아요 ‘보이 이레이즈드’

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를 통해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영화 ‘보이 이레이즈드’ 포스터/사진제공=어나니머스 콘텐츠

지난 20~30년 간 동성애를 다룬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는 비단 미국, 유럽 같은 서구에서뿐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이런 유의 영화를 만들 때 언제나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사회 분위기를 고려하고 종교적 차원에서도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좀 더 설득력 있게, 그러면서도 좀 더 신중하게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이 이레이즈드’(Boy Erased)는 대단히 잘 만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미국 알칸사스 주의 어느 보수적인 그리스도인 가족에게 시련이 닥친다. 낸시(니콜 키드먼)와 마샬 이먼스(러셀 크로우) 부부에게 제리드(루카스 해지스)라는 아들이 하나 있다. 마샬은 성공한 자동차 판매상이자 매주 설교를 담당하고 침례교 전도사로 주위의 신망을 얻은 사람이다. 낸시도 미용사로 성공한 편이고 잘 성장해 대학까지 간 아들까지 있으니 유복한 중산층 가정이라 부르기에 적당하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아들의 고백을 접하고 부부는 혼란에 빠진다. 제리드가 스스로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마샬은 아는 목사에게 도움을 청했고 아내 낸시도 그 목사의 권고를 받아들여 이른바 ‘동성애 전환 치료 프로그램’을 운용하는 시설에 제리드를 넣기로 결정한다. 당연히 제리드의 동의를 얻었고 말이다. 시설은 프로그램의 특성상 철저한 보안이 필요하고 부모는 근처 호텔에 묵으면서 아침 일찍 자녀를 데려다주고 오후 5시에 데려오는 식으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그러니 시설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부모가 알 리 없는 것이다. 시설의 이름은 러브 인 액션(Love in Action)이다. 사업에 바쁜 마샬을 대신해 낸시가 이 일에 전념한다.

이 영화는 2016년 제랄드 콘리(Gerald Conley)가 자신의 체험담을 담아 출판한 동명의 기록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그래서 영화 내용에 상당한 신뢰가 갔고 이를 통해 감독이 대변하려는 동성애의 현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동성애가 비단 본인의 문제일 뿐 아니라 가족과 주변 사회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파장을 미친다는 점을 잘 알려주었다. ‘보이 이레이즈드’는 시설의 치료사인 빅터를 연기한 조엘 에저튼이 감독한 작품인데 그에게 이런 놀라운 재능이 있는지 짐작도 못했다. 이 영화로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영화제에서 각색상을 받았다. ‘워리어’(2011)에서처럼 근육질 격투기 선수 역이 제격이라 여겼는데…….

영화 ‘보이 이레이즈드’ 스틸/사진제공=어나니머스 콘텐츠

영화는 두 개의 층으로 이뤄져 있다. 하나는 전환 치유 프로그램의 부당함에 대한 고발이고, 다른 하나는 제리드가 어떻게 가족과 화해하는지 쫓아가는 것이다. 둘 다 긴장감이 넘쳤고 인물 설정마저 뛰어났다. 자아를 발견해나가는 제리드나, 아들을 향한 복잡한 모성을 보여주는 낸시나, 종교 근본주의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마샬이나, 제리드를 반드시 제압하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내비치는 빅터, 그리고 잠시 출연해 깊은 인상을 남긴 헨리(조 알윈)도 여기 포함된다. 감독은 아마 등장인물들에 대한 연구를 오래 했을 것이다.

영화의 종교적 배경인 그리스도교에서 동성애란 매우 위험한 주제다. 보수와 진보 교단 사이의 갈등은 물론 같은 교단 내에서도 동성애 문제만 나오면 편이 갈라지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입장들을 살펴보면 우선 동성애를 죄로 여겨 교회와 사회에서 근절시키고 동성애자들을 악의 세력으로 간주해 싸워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있고, 정반대쪽에는 생물학적으로 성 정체성이 남녀로 정확히 구별되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에 있다는 주장이 발견된다.

미국은 흔히 자유로운 성문화와 엄격한 그리스도교 윤리가 공존하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이율배반적인 측면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지 윤리적으로 전력이 몹시 의심스러운 사람이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렇게 두 가지 모습을 당연시 한다고 하여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보수와 진보, 양 극단 사이에 수많은 의견들이 있어 각자의 견해를 피력하고, 그렇게 다양한 입장들을 듣고 있노라면 미리가 빙빙 돌 지경이다. 마샬은, 말하자면, 오른쪽 극단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들을 개조(?)하기 위해 시설을 선택했지만 결국 진실과 마주하고 만다.

영화 ‘보이 이레이즈드’ 스틸/사진제공=어나니머스 콘텐츠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마샬과 제리드의 대화는 정말 좋았다. 선택한 대사들은 물론 서로를 의식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경주하는데, 러셀 크로우와 루카스 해지스의 연기가 불꽃을 튈 정도다. 특히 루카스 해지스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2016)에서 탁월한 기량을 보여준 바 있어 더더욱 믿음직스러웠다. 앞으로 대성할 기미가 보이는 배우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잠시 흔들리며 망설이는 눈빛은 가히 일품이다.

이야기의 균형이 잘 살아있고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려는 자세도 발견했기에 좋은 영화로 꼽았다. 다만 미국 남부 그리스도인들의 보수적인 입장을 매도한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객관성을 유지해 마땅한 고발영화라 하기엔 아쉬운 점이었다. 사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일은 언제나 어려운 법이다. 무엇보다 제리드의 말을 들어야 하지만 아버지 마샬의 말도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이유다.

제리드는 평소 “달리는 차창 밖으로 손을 내민다고 해 전부 트럭에 치는 것은 아니에요”라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에겐 “나는 절대 변하지 않아요. 만일 나를 잃고 싶지 않다면 변해야하는 쪽은 아버지에요”라고도 단언한다. 이는 아버지가 다음처럼 속마음을 털어놓은 직후에 한 대답이다. “난 하느님께 물어보았다. 내가 너를 보낼 준비가 돼있는지.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구나.”

아무튼 자식이란 존재는 좀 잔인한 편이다.

박태식(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