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도빈│진국이 이긴다

사람은 모두 누군가의 아들, 딸로 태어난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부모의 존재 자체가 인생을 지배하는 화두가 되기도 한다. MBC <선덕여왕>에서 왕보다 높은 권세를 지니고 수많은 남자들을 휘둘러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자 하는 미실(고현정)과 그의 정부 설원랑(전노민) 사이에서 태어난 보종(백도빈)에게 어머니는 넘을 수 없는 산인 동시에 제 손으로 풀 수 없는 덫이다. “그래서 보종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사람이죠” 나지막하면서도 풍부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자신이 맡은 배역에 대해 설명하는 배우 백도빈에게도 넘어야 하는 벽은 다름 아닌 아버지다. 한국 최고의 성격파 배우 가운데 한 사람인 백윤식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아마 그가 배우로 활동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꼬리표일 것이다.

백윤식의 아들이자 미실의 아들인 남자

그러나 영화 <범죄의 재구성>의 이름도 없는 ‘청년’ 역으로 데뷔해 적지 않은 작품의 조, 단역으로 활동하며 차근히 경력을 쌓은 지 6년, 그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삶의 일부인 것처럼 배우 생활의 일부이기도 하다. “어찌되었건 제가 짊어지고 가야 될 부분인데 부담감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지금은 많이 떨쳤지만 항상 뒤에서 누가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합니다. (웃음)” 타고나길 ‘애늙은이’ 같다는 성격 탓인지, 연기를 하기 전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려 했다는 이력 때문인지 백도빈의 태도나 말투는 서른하나라는 나이에 비해서도 훨씬 어른스럽다. “보종 역할을 준비하면서 <화랑세기>,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 읽어봤어요. 지금 극 중에서 강하게 표현되는 모습과 달리 보종은 원래 무도와는 별로 관계가 없이 벌레 한 마리 못 죽이고 피리 불고 그림 그리는 걸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별명이 ‘진성공자’ 였을 만큼 굉장히 청아하고 순양한 사람이었죠.” 역사책에서나 등장할 법한 고색창연한 어휘들을 일상어처럼 사용하는 모습에서는 요즘 세상에, 그리고 이 세계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선비의 기운마저 느껴진다.

“크던 작던 쓰임새가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대중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 달리는 기차 안에서 고니(조승우)의 배에 악착같이 칼을 박아 넣는 건달로 출연한 영화 <타짜>라는 사실은 그래서 지금 돌이켜보면 더욱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선덕여왕> 팬들로부터 ‘사슴 보종’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순한 눈망울과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위에 스치는 비열함은 <타짜> 개봉 후 ‘백윤식의 아들’ 이라는 후광 이상으로 백도빈의 가능성을 뚜렷하게 보여주었고, 지난 해 방송된 tvN <맞짱>에서 그는 낮에는 소심한 회사원이지만 밤에는 ‘지옥의 하이킥’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길거리 파이터의 이중생활을 연기하며 또 다른 양면성을 드러냈다. “보종은 낮은 신분을 뛰어넘기 어렵다는 절박함 때문에 매사에 예민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사람의 성격상 그 예민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표현해야 한다는 점이 어렵습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해서…”라고 덧붙이는 모습에서 불안감보다는 진중함이 느껴지는 것은 TV 화면을 넘어 그를 직접 만났을 때 갖게 되는 어떤 믿음 때문이다.

비록 아직은 ‘보종’보다 ‘미실의 아들’로 불리는 경우가 더 많지만 그동안 영화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그에게 시청률 30%를 넘나드는 드라마 <선덕여왕>은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뚜렷하게 어필할 수 있는 전환점일 것이다. 그러나 백도빈은 “사람이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흥망성쇠가 다 있는 법이니 꾸준히 사랑받는 것만큼 좋은 게 없습니다” 라며 또 ‘애늙은이’ 같은 소리를 한다. 하지만 “그냥, 제가 몸담고 있는 이 분야에서 크던 작던 쓰임새가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 라는 그의 성실하다 못해 지루할 법한 대답에는 묘하게 듣는 이를 수긍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생각해 보면 천하의 미실이 번거롭고 복잡한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았던 것도 다름 아닌 보종이었으니 말이다.

스타일리스트_장준희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