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N 인터뷰] 반백년 넘게 연기해온 이순재·정영숙이 말하는 ‘로망’

[텐아시아=김지원 기자]

영화 ‘로망’에서 치매에 걸린 노부부로 열연을 펼친 배우 정영숙(왼쪽)과 이순재. /메리크리스마스 제공

“남편한테는 아내, 아내한테는 남편밖에 없다는 것. 이처럼 묵직하게 변하지 않는 관계가 ‘로망’이 아닐까 싶어요. 영화 ‘로망’을 보면 서로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오는 3일 개봉하는 영화 ‘로망’은 치매에 걸린 노부부의 사랑과 삶의 애환, 치매 환자를 둔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원로배우 이순재와 정영숙이 남편 조남봉 역과 아내 이매자 역을 맡아 가슴 저릿한 로맨스 이야기를 선사한다. 극 중 조남봉은 고집이 세고 무뚝뚝하지만 한평생 가족을 위해 택시 운전사로 묵묵히 일해온 헌신적인 가장이다. 이매자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가족을 보살펴온 가정주부다. 조남봉과 이매자는 차례로 치매에 걸린다. 개봉을 앞두고 서울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이순재와 정영숙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얼마 전 치매 보험을 들었어요. 슬슬 걱정이 되더라고요. 벌써 치매인가 싶을 정도로, 말하려고 하면 단어가 잘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어요. 그럴 나이도 됐죠.” (정영숙)

“치매에 걸리면 큰일 나요. 이 일은 암기력이 기본인데 치매에 걸릴지도 모를 나이니까 걱정되죠. 그래서 암기력 테스트를 해봐요. 예전에 좋아했던 배우 이름을 떠올려보거나, 미국 역대 대통령 이름을 통째로 외운 뒤 다시 생각해보기도 하죠.” (이순재)

영화 ‘로망’ 스틸. /메리크리스마스 제공

이순재와 정영숙은 이전에도 치매를 소재로 한 작품들에 출연했다. 정영숙은 치매환자의 시각에서 치매라는 병을 다룬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아들에게 버림받은 샤넬할머니 역으로 시청자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이순재는 영화 ‘장수상회’에서 치매에 걸리는 까칠한 노신사를 연기했다. 두 사람은 치매에 걸린 아내로 인해 변화를 겪는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 ‘사랑해요 당신’에서 부부로 호흡을 맞추고 있기도 하다.

“치매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했는데, 이 영화에선 아내의 증상이 좀 더 심해요. 나는 정신이 없었다가 돌아왔다가 하는 경증이고요. 연극보다 영화에서는 더 섬세한 표정 연기가 필요하니까 쉽지 않죠. 치매 연기는 잘못하면 바보 연기가 되니까 주의해야 돼요.” (이순재)

정영숙은 “요양원에 계신 할머니들을 찾아가보기도 했다”고 밝혔다. 또한 자신과 단짝으로 지냈던 의사가 치매에 걸렸던 일, 아내가 치매에 걸려 강사인 남편이 아내를 데리고 강의에 나간 이야기 등 자신이 겪거나 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캐릭터를 만들어갔다고 했다.

“핵가족이 되면서 (나와 비슷한 나이의) 어머니들은 집에 혼자 있게 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렇게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말수가 적어지면서 우울증을 앓게 되고, 그게 치매로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해요. 치매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가족들과 자주 대화하고 혼자 계시는 부모님에게는 조금씩 시간을 내서 전화드리는 게 어떨까요. 저도 나이 들어 이제야 주변을 돌아보니 부모님께 제대로 효도하지 못한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정영숙)

정영숙은 “눈감고 들어가면 영원히 쉰다”며 연기 활동에 대한 열의를 드러냈다. /메리크리스마스 제공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아달라고 하자 정영숙은 곰곰이 생각하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 남편의 치매 증상을 마주하고 가슴이 철렁한다. 얼마나 기가 막힌가”라고 답했다. 또한 “치매 선고를 받고 나와 혼자 걸어가는 신이 있었는데 편집돼서 좀 아쉽다”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매자와 관객들이 함께 천천히 생각해볼 수 있는 장면”이라고 말했다. 병원에서 난동을 부리는 장면, 남편과의 추억이 있는 바다로 간 장면 등도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이순재는 1956년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가’로 데뷔해 63년째 연기를 해오고 있다. 87편의 공연, 92편의 방송, 123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지금도 무대, TV, 스크린을 가리지 않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꽃보다 할배’ ‘집사부일체’ 등 예능 프로그램으로도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있다. 정영숙은 1968년 TBC 6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다. 월급 5000원으로 시작했다는 정영숙은 그동안 시각장애인, 간질병 환자, 군인, 김좌진 부인, 김정일 부인, 전통적인 어머니 등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두 사람은 연예계의 든든한 거목이자 버팀목으로 후배들은 물론 대중들에게 존경받고 있다.

이순재는 최근 불법영상물 촬영 및 유포를 비롯해 사회적으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젋은 연예인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하기도 했다. 그는 “연예인은 행위 자체가 전파성, 영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공인이 아니라도 공인의 개념이 있다. 그렇기에 행동을 조심하고 절제해야 한다”고 책임의식을 강조했다.

이순재는 “역할을 위해서 자기를 버리는 배우, 자기를 내세우려는 배우가 있다”며 전자의 후배 배우로 김명민을 꼽았다. /메리크리스마스 제공

반백 년이 넘도록 연기를 해온 두 사람은 배우로서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결혼하면 관둬야지, 애 낳으면 관둬야지 했는데 계속 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대학 동창들을 만나면 다 나를 부러워해요. 지금 이 나이에도 일하고 있다고. 어떤 때는 어려운 역할을 만나기도 했지요. ‘이것도 못해내나’라면서 노력해서 해내면 쾌감이 있어요. 작품 속 캐릭터를 연기하면, 그 순간만은 그 인생을 살잖아요. 그렇게 많은 인생을 살아볼 수 있어서 감사해요. 건강하니까 앞으로도 더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영숙)

“끝날 때까지 건강히, 잘하는 겁니다. (최근 치매 연기를 계속했는데) 이제 또 새로운 작품을 해봐야겠다 싶어요. 우리 나이에 이제 할 수 있는 건 ‘셰익스피어’ ‘리어왕’ 정도인 거 같은데, 특히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 같은 역할을 한번 해보고 싶어요. ‘꽃보다 할배’는 상황이 되면 또 갈 수 있지 않겠어요? 리턴 편 시청률도 괜찮았으니까. 하하.” (이순재)

김지원 기자 bella@ten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