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인칭 관찰자 시점] ‘라스트 미션’, 카메라의 앞과 뒤에서 지긋이

[텐아시아=박미영 작가]

영화 ‘라스트 미션’ 스틸컷.

*이 글에는 라스트 미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에게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영화는 ‘퍼펙트 월드’(1993)다. 그즈음 고3이었던 나의 영화를 고르는 기준은 배우였다. 그렇지만 케빈 코스트너 때문에 갔던 극장에서 카메라 앞의 배우가 아니라 카메라 뒤의 감독에 사로잡혔다. 듬직한 시선의 주체가 못내 궁금했다. 버치(케빈 코스트너)를 쫓던 노형사 레드 가넷 역의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바로 그 주체였다. 그날 이후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전작은 찾아서 보고, 신작은 챙겨서 보았다. 감독으로 마주해도 좋았지만, 감독과 더불어 배우로도 마주하면 더 자릿했다.

2005년 일리노이주 피오리아. 백합을 키우는 햇살 농장의 주인 얼 스톤(클린트 이스트우드)은 전국 백합 컨벤션으로 향한다. 그는 비슷한 연배의 원예가에게는 죽은 줄 알았노라고 짓궂은 농을 걸고, 중노년의 여인들에게는 넘치는 찬사를 바치고, 금메달을 수상하자 지루한 소감 대신 농담으로 분위기를 띄운다. 바에서 얼은 친구와도 같은 원예가들과 어울리며 모든 손님에게 호기로이 한 잔씩 쏜다. 같은 시각,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이리스(앨리슨 이스트우드)는 식장에 함께 들어갈 아버지 얼이 오지 않아서 울분을 터뜨린다. 어머니 메리(다이앤 위스트)는 상처받은 딸의 마음을 위무한다.

2017년. 농장은 압류 당하고 자신처럼 노쇠한 트럭 하나만 남은 얼은 손녀 지니(테이사 파미가)의 결혼 축하 모임에 간다. “남들이 뭐라 하건 할아버지 편”이라는 손녀와 달리 딸은 “이 작자랑은 같이 못 있는다”며 노골적으로 그를 멀리한다. 전처 메리는 얼이 친구들과 노닥거리느라 한 번도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한 적이 없다고 쏘아붙인다. 소침한 그에게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한 조직원이 특별한 일감을 권한다. 50개 주 중 41개 주를 다녔지만 딱지 한 번 뗀 적 없는, 안전운전을 하는 얼이야말로 자신들이 찾는 적임자라고.

80대 후반의 고령, 매끈한 운전 실력,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순발력을 갖춘 얼은 어마한 양의 마약을 옮기는 운반책이 된다. ‘타타’(할배)라는 닉네임으로 불리면서. 그렇게 번 돈으로 새 트럭을 사고, 농장의 압류를 풀고, 화재로 문을 닫았던 한국전 참전 용사회의 쉼터를 다시 열고, 미용학교에 다니는 손녀의 학비를 댄다. 그는 배달길에 마주치는 흑인 가족이나 레즈비언 오토바이족을 향해서도 아낌없이 손을 내민다.

마약을 운반하느라 트럭을 운전하는 얼에게 손녀 지니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메리가 위독하다고. 그가 일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하자, 오랜 세월 할아버지 편을 든 자신이 바보라며 손녀마저 등을 돌린다. 결국 얼은 핸들을 꺾고 메리의 곁을 지킨다. 메리가 재미있고 멋진 당신은 남들 차지였다고 하자, 얼은 진심을 담아 사죄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 메리도 꾹꾹 눌러왔던 속말을 꺼내 놓는다. “당신이 와줘서 기뻐. 고마워. 당신은 내 인생의 사랑이자 고통이었어. 지금 당신이 여기 있어서 너무 행복해.”

지난 14일 개봉한 ‘라스트 미션’의 원제는 ‘The Mule’로 노새라는 뜻과 속어로는 마약 운반책이라는 뜻이 담긴 단어다. ‘그랜 토리노’(2008)의 각본가 닉 솅크는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소개된 87세의 마약 운반책 레오 샤프의 실화를 바탕으로 느른하지만 묵직한 노인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물론 특유의 위트도 빼놓지 않고. ‘그랜 토리노’ 이후 10년 만에 카메라 앞에 배우로 선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육체적, 감정적으로 장애물이 많은 사람이 상황을 헤쳐 나간다는 아이디어가 좋았다고 했다. 극 중에서 얼과 가장 큰 장애, 즉 갈등을 빚는 메리를 다이앤 위스트는 표정 하나, 목소리의 한 톤으로도 섬미하게 그려냈다.

길 위의 차안에서 홀로 긴 시간을 견뎌야 하는 얼에게 평생의 벗은 음악이다. 이따금 낯 뜨거운 노래가 나오면 가사의 의미를 미처 모르는 소년처럼 참 밝게 흥얼거리기도 하면서.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조직원인 훌리오(이그나시오 서린치오)는 그의 차를 도청하다가 음악 취향에 고개를 내두른다. 시간이 점점 흐르고, 훌리오도 얼처럼 크게 노래를 따라 부르며 웃음을 자아낸다.

마약 운반책 타타, 즉 얼의 뒤를 쫓는 마약 단속국의 책임 특수요원(로렌스 피시번), 특수요원 베이츠(브래들리 쿠퍼)와 트레비노(마이클 페나)의 움직임은 참 느릿하다. 요원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성글게 느껴지는 수사인데, 그것이 또 묘하게 마약 운박책스럽지 않은 얼과 조화를 이룬다. 세 배우는 극 중 자신의 역할에 맞추어 조절한 무게감으로 영화를 지탱한다.

‘라스트 미션’의 주제에 닿아있는 대화는 쫓고 쫓기는 자인 베이츠와 얼의 대화를 통해 그려진다. 처음 만난 순간, 얼은 베이츠에게 ‘그쪽 세대’는 망할 핸드폰 없으면 죽기라도 할 세대라고 충고한다. 베이츠는 얼에게 ‘그쪽 분들’은 오래 사셔서 말조심 안 해도 되는 분들이라고 유쾌하게 응수한다. 그리고 얼은 베이츠에게 인생 설교를 한다. 1순위는 가족이어야 한다고, 마치 존재한 적 없는 사람처럼 12년 반이나 딸은 자신과 한마디도 안 한다고, 가족과 함께라면 다른 건 필요 없다고.

영화에서 얼을 지칭하는 호칭들은 참 많다. 재수탱이, 매력덩어리, 미스터 백합 나으리, 타타(할배)…. 집에서 엉망이라 밖에서 인정받는 게 중요했던 얼은 낯선 타인에게도 망설이지 않았던 호의를 가족을 위해서 꺼내지 않았다. 또한 하루 만개했다가 사라지는 꽃에도 공들인 시간을 가족을 위해서는 살갑게 쓰지 않았다.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하기 위해 마약 운반책의 길로 들어섰던 얼은 딸 아이리스에게 토로한다. 다른 건 다 사도 시간은 못 사겠더라.

현존하는 최고의 아프로큐반 재즈 트럼펫 연주가 아투로 산도발은 시종여일 음악으로 작품을 품었다. 그래서인지 영화가 끝나도 차마 객석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엔딩에서 연방 감옥에서 백합을 바라보는 얼의 미소를 마주하려니, 문득 영화의 첫머리도 백합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백합의 꽃주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주름진 얼굴이 겹쳐졌다. 1930년생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우리 나이로는 아흔이다. ‘퍼펙트 월드’에서도 이미 주름진 얼굴이었지만, 시간의 무게가 드리워져 그 주름은 더욱 그윽해졌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의 사진작가 로버트,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의 권투 트레이너 프랭키, ‘그랜 토리노’(2008)의 괴팍한 노인 월트처럼 카메라 앞의 배우로, 카메라 뒤의 감독으로 그의 지긋한 시선은 숨은 그림을 찾아냈다. 쉬이 식지 않는, 뭉근한 온기와 함께. ‘라스트 미션’ 메리의 대사에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향한 나의 속말을 얹어본다.

“지금 당신이 여기 있어서 너무 행복해.”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박미영 영화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한 작가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진위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