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환│100도씨, 강지환이 끓는다

성장이란 지난한 과정이다. 간혹 그것은 성장기 중학생의 키처럼 시간에 비례해 가시적 성과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끓는 물처럼 100℃가 되기까진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눈으로 볼 때 40℃에서 50℃로, 50℃에서 60℃로 가열되는 과정은 별다른 차이가 없다. 오직 우리의 눈은 90℃ 즈음에서 기포가 올라오는 순간부터 폭발하듯 끓어오르는 100℃의 순간을 잡아낼 수 있을 뿐이다. <영화는 영화다>를 통해 주요 시상식의 모든 신인상을 휩쓸고 <7급 공무원>을 통해 2009년 상반기 최대 흥행배우가 된 강지환의 가시적 성공이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만약 강지환이 KBS <꽃보다 남자>의 이민호처럼 순식간에 국민적 스타로 부상했다면 오히려 그의 성장이 갑작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대중에게 그런 케이스는 결코 낯설지 않다. 하지만 5년 동안, 비록 꾸준히는 아니지만 가끔씩 눈길을 줄 때마다 별다른 변화가 없던, 아니 없어 보이던 배우가 어느 순간 끓어오를 때의 풍경은 낯설다. 사람들은 낙하산 요원은 납득해도 5년 동안 자기 자리만 지키던 7급 공무원이 4급으로 진급하는 건 받아들이지 못한다. 멜로의 극단에서 MBC <90일, 사랑할 시간>의 현지석을 연기하고, KBS <쾌도 홍길동>을 통해 상처를 과장된 유쾌함으로 가렸던 홍길동을 연기하며 스스로 “조금씩 배우로 성장하는 걸 느끼는” 과정에서도 많은 사람들은 그를 금순이 남편으로만 기억했다. <황진이>나 <뉴하트> 같은 상대편 드라마가 더블 스코어의 시청률로 국민 드라마로 주목 받을 때 변방의 장수처럼 우두커니 서있던 그는 자신의 스타성을 근본적으로 회의했다.

강교주의 은근하지만 강력한 포교 활동의 성과

물론 KBS <경성 스캔들>은 근대 한국이라는 시공간에 유쾌한 매력을 덧칠하면서도 시대의 무게를 잃지 않은 작품이었고, <쾌도 홍길동>은 승리하진 못하지만 언제나 살아남는 민중의 생명력을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통해 형상화했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한 드라마에 포커스가 몰릴 경우 남은 드라마는 망한 드라마 혹은 마니아 드라마로 기억”된다. 재밌는 건 강지환이 선택했던 작품들은 후자로 기억된다는 점이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비록 순식간에 대스타로 성장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해도 <경성 스캔들>을 기억하는 팬들은 <쾌도 홍길동>을 주목했고 <쾌도 홍길동>으로 강지환을 만난 팬들은 강교주의 포교 활동에 포섭됐다. 그는 대스타도 되지 못했고, 흥행에도 성공하지 못한 많은 배우들 중 하나이지만 졸작은 귀신 같이 피하고, 작품마다 베스트 캐스팅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흔치 않은 배우이기도 하다. 그는 좋은 작품을, 그 중에서도 자신과 어울리는 작품을 고를 줄 아는 좋은 눈을 가졌다. 선구안이 좋다면 홈런이 터질 확률은 언제나 잠재되어 있다.

2008년 초부터 영화 신인상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 않았던 그가 <영화는 영화다> 한 편으로 신인상을 휩쓴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소지섭과 함께 투톱을 맡은 이 작품에서 그는 무언가 달관한 듯한 표정인 강패(소지섭)의 카리스마를 흉내 내서 맞서기보다는 특유의 깐죽거림과 치기어릴 정도의 악다구니로 자신만의 영역만을 확보해 투톱의 균형감을 지켜냈다. 작품 선구안을 비롯해 그에게서 명민함이 느껴지는 건 이 지점이다. 그는 드라마에서도 대본에 없는 애드리브를 많이 활용하지만 그것들은 돌발적인 재치보다는 “미리 시나리오를 짜는” 사전 작업을 통한 것이다. 그의 연기가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나온 대사라서가 아니라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에 대한 연구를 통해 몇 개 소소한 디테일을 캐릭터에 새기기 때문이다. 싸구려 마초 느낌이 나던 <영화는 영화다>의 수타가 연인과의 헤어짐부터 작전수행까지 어설픈 <7급 공무원>의 재준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건 상사의 괴롭힘에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하게 테이블에 기대거나 긴장되는 순간마다 잼잼을 하는, 사소하지만 인물의 특성을 간결하게 드러내는 디테일 때문이다.

강지환이라는 이름을 되찾은 그의 선택

그래서 <영화는 영화다>와 <7급 공무원>의 성공은 비록 갑작스러워 보일지라도 강지환의 과거 필모그래피와 연기의 맥락 안에서 바라볼 때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싸가지 없는 수타에게 동정심을 느끼게 되고, 답답한 재준이 귀여울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과 결혼한 옛사랑에게 3달 동안 같이 살자고 요구하는 미친놈이지만 그저 안쓰러울 수밖에 없던 현지석과 시대적 양심 따위 없지만 미워할 수 없던 <경성 스캔들>의 선우완을 만든 것과 비슷한 방법론을 통해 가능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도쿄에서 5000명과의 팬미팅을 무사히 마치며 한류 2세대 스타의 흐름에 서게 된 과정도 마찬가지다. 그는 <겨울연가>나 <올인> 같은 히트작 대신 <굳세어라 금순아>부터 차근차근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일본 팬들에게 인식시키는 과정을 밟았고 이제 그의 팬들은 한국에 찾아와 <7급 공무원>을 세 번씩 보는 수준에 이르렀다.

한일 프로젝트 텔레시네마 중 <내 사랑 못난이>가 이미 제작되어 방영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 아직 확실한 다음 행보를 정하지 않은 그의 최근 활동이 팬미팅이라는 건 그래서 흥미롭다. 그는 디테일을 통해 극 중 캐릭터에게 현실 속 인물의 질감을 입히며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왔다. 즉 그는 배역으로 기억되는 배우였다. 하지만 팬미팅은 말 그대로 한 개인이자 스타로서의 강지환을 드러내는 자리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 바라던 스타 파워의 한 증명인 동시에 앞으로 그가 감당해야 할 무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어떤 작품에 캐스팅됐을 때 신뢰를 주는 배우와 자신의 이름값으로 작품에 무게를 싣는 배우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스타 파워를 얻는다는 건 작품보다 자신의 이름이 먼저 거론되는 압박감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구재희, 선우완, 홍길동, 장수타, 그리고 이재준을 지나 강지환이라는 이름을 되찾은 그가 어떤 작품의 캐스팅 뉴스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지 기대하게 되는 건 그래서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