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인칭 관찰자 시점] ‘캡틴 마블’, 개구쟁이 히어로 로딩 중

[텐아시아=박미영 작가]

영화 ‘캡틴 마블’ 스틸컷.

*이 글에는 캡틴 마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3년 전,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를 보러 극장에 갔다. 마블의 히어로에 애정이 그득한 아들딸과 함께. 아홉 살이었던 딸은 또래 소녀들과 달리 마블 시리즈를 좋아했다. 세 살 터울의 오빠 영향이지 싶다. 딸은 ‘프리큐어’와 ‘파워레인저’, 프릴 의상과 쫄쫄이 의상 각각에 매력을 느꼈다. 소녀 감성과 소년 감성이 공존했다. 그날 밤, 딸이 일기를 쓴다며 영화 제목을 묻기에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불러 주었다. 캡. 틴. 아. 메. 리. 카. 시. 빌. 워.

‘영화 캡틴 아메리카 11워를 봤다.’ 딸의 일기장 첫 문장이었다. 나는 웃음을 꾹 누르고, 딸에게 우스갯말을 했다. 내년에는 12워, 그 다음에는 13워가 나온다고. 딸은 곧이곧대로 믿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껏 상기된 얼굴과 초롱한 눈빛으로. 극장을 나서는 순간 혹은 극장에 있는 순간에도 허구로 받아들이는 나와 달리 딸에게 마블의 세계는 진짜구나 싶었다. 아이들은 내내 그 세계에 머무르며 날아오르고 있었다.

수백만 년 째 이어진 크리와 스크럴의 전쟁. 크리 문명의 수도 ‘할라’ 행성에서 최강의 정예부대 스타포스 사령관 욘-로그(주드 로)는 기억을 잃은 부하 비어스(브리 라슨)를 훈련시키며 당부한다. 기억은 의심을 낳고, 의심은 스스로를 약하게 만들어서 감정에 휘둘리게 되므로 마음을 다스리라고. 크리 문명의 A. I. 리더 슈프림 인텔리전스(아네트 베닝)는 크리마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존재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기억을 잃은 비어스는 이 존재가 누구인지 모르기에 갑갑해하자 슈프림 인텔리전스는 너는 스크럴의 희생자 중 하나일 뿐이라고 못박는다.

크리의 변방 행성 토르파. 욘-로그의 지휘 아래 스타포스는 스크럴을 쫓아서 잠입한다. 그러나 DNA를 복제해서 어떤 형태로도 변환할 수 있는 스크럴의 리더 탈로스(벤 멘델슨)에게 속아서 비어스가 잡히고 만다. 탈로스는 비어스의 기억을 헤집으며 그 속에서 자신들이 찾고 있던 웬디 로슨 박사를 찾아낸다. 비어스에게는 늘 슈프림 인텔리전스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그녀를. 의식을 되찾은 비어스는 스크럴의 우주선에서 탈출한다.

크리에게 C-53 행성으로 지칭되는 지구. 비디오 대여점 ‘블록버스터’에 떨어진 비어스는 정보기관 쉴드의 요원 닉 퓨리(사무엘 L. 잭슨)를 만난다. 퓨리는 외계에서 왔다는 비어스의 말을 미심쩍어 한다. 쫄쫄이를 입은 우주 전사도, 외계 종족도 처음인 까닭이다. 그러나 비어스의 뒤를 쫓는, 도마뱀을 닮은 스크럴의 본모습을 보고 퓨리는 비어스의 말을 따르게 된다. 퓨리는 비어스가 입으로는 스크럴을 추격하는 것이 임무라고 하지만 한눈에 티가 나는 탈주병 같다며 진심을 묻는다. 비어스는 순간순간 보이는 장면들 속에서 기억의 퍼즐을 맞추려고 한다. ‘비어스’에서 ‘캐럴 댄버스’로 잃어버린 이름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그녀의 여정에 퓨리가 동행한다.

지난 6일 개봉한 ‘캡틴 마블’(감독 애너 보든, 라이언 플렉)은 고인이 된 스탠 리의 모습들로 채워진 마블 로고로 문이 열린다. ‘고마워요 스탠’이라는 뭉클한 자막과 함께. 이번에도 그는 카메오로 영화를 빛냈다. 스크린에서 그의 미소를 마주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관객이 비단 나 혼자만은 아닐 듯싶다.

‘캡틴 마블’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영화들 중에서 시간적 배경이 앞서 있다. 1995년의 쉴드는 아직 외계 종족의 위협이나 스페이스 스톤 ‘테서랙트’에 무지하다. 훗날 어벤져스 발의안을 만들기 위한 것, MCU의 다른 영화 속에서 대사로만 쓱 넘어간 것,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엔딩에 퓨리 국장이 캡틴 마블을 부르기 위해 사용한 호출기 등등의 조각들이 이야기의 타래로 풀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MCU 최초로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내달에 개봉할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마지막 희망의 불씨가 될 캡틴 마블의 탄생을 그린 솔로 무비로, 추억의 팝송까지 더해져서 레트로 감성이 넘실거린다. 1995년이라서 ‘로딩 중’으로 종종 등장하는 인터넷의 느린 속도처럼, 초반의 전개는 다소 늘어진다. 지구에서의 기억을 잃은 캐럴 댄버스가 쉴드 요원 닉 퓨리와 콤비 플레이를 하면서 이야기는 탄력을 받는다. 안대를 차지 않은 한창나이의 닉 퓨리는 웃음을 책임진다. ‘니콜라스 조셉 퓨리’라는 풀네임도, 사선으로 자른 토스트는 못 먹는 비밀까지도.

‘캡틴 마블’의 신스틸러는 단연코 얼룩무늬 고양이 구스다. 정확히는 고양이가 아니라 플러큰이지만. 여러 마리의 실제 고양이와 특수효과가 합쳐져서 완성된 캐릭터로, 반전미가 어마하다. 또한 아네트 베닝은 웬디 로슨 박사/ 슈프림 인텔리전스 역으로 부드럽게, 주드 로는 스타포스 사령관 역으로 허당스럽게 결이 다른 카리스마를 선보인다. ‘어벤져스’의 쉴드 요원 필 콜슨(클락 그레그),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악당 로난(리 페이스)과 코라스(디몬 하운수)처럼 낯익은 캐릭터의 재등장도 반갑다.

캡틴 마블은 극 중 대사처럼 한낱 인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명령이 아니라 직감을 따른다. 절친 마리아(라샤나 린치)의 표현처럼 똑똑하고 재미있고 못 말리는 꼴통이기도 하고. 그녀는 손에서 불을 뿜는 특별한 힘을 갖기 전부터 세상과 싸웠다. 포기를 권하는 편견에 찬 소리들과. 그래서 빛에 감싸인, 제대로 불맛 나는 히어로로 성장할 수 있었다.

산울림의 ‘개구쟁이’라는 동요에서 좋아하는 가사가 있는데 바로 ‘이마엔 땀방울 마음엔 꽃방울’이다. 개구쟁이라는 단어에 톡톡 맺히는 가사다. 주말에 극장에 갈 딸은 아마도 단숨에 캡틴 마블의 팬이 될 것이다. 땀방울도 꽃방울도 흘려본 열두 살 딸의 감상이 못내 궁금하다. 개구쟁이 히어로 ‘캡틴 마블’을 향한 한줄 평이.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박미영 영화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한 작가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진위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