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인칭 관찰자 시점] ‘콜드 워’, 냉전이라는 씨실에 사랑이라는 날실이 엮이는 순간

[텐아시아=박미영 작가]

영화 ‘콜드 워’ 스틸컷.

*이 글에는 콜드 워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불혹이 되면, 트로트의 맛 혹은 멋을 알게 되지 않을까 했다. 한데 그 맛을 모르고 한 해 두 해를 넘기고 있다. 그래도 딱 한 곡만큼은 참 좋다. 바로 심수봉의 ‘백만송이 장미’다. 대학 시절, 약속 시간에 쫓겨서 발걸음이 절로 빨라지던 참이었다. 레코드점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백만송이 장미’에 홀려서 걸음을 되돌렸다. 마치 인어의 노래에 반한 뱃사람처럼, 약속도 잊은 채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나는 노래 속으로 자박자박 걸어 들어갔다. 라트비아 민요를 번안한 곡에 얹힌 서정적인 가사와 애잔하고 구슬픈 음색은 심금을 흔들었다. 지금도 글을 쓸 때 처연한 사랑을 읊어야 하는 순간에는 ‘백만송이 장미’를 들으며 감정을 한껏 끌어올리곤 한다. 그런데 ‘콜드 워’를 휘감는 곡 ‘심장’도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해야 할 듯싶다.

1949년 폴란드.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음악가 빅토르(토마즈 코트)와 이레나(아가타 쿠레샤)는 민속음악을 채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속음악을 업신여기는 카치마레크(보리스 스직)가 그들과 동행한다. 세 사람이 주축이 되어 마주르카 민속음악단이 창단되고, 빅토르와 이레나는 오디션을 보러 온 젊은이들과 마주한다. 줄라(요안나 쿨릭)는 노래를 부르는데 이레나가 중간에 끊으려고 하자 후렴이 남았다며 마저 부르고 나서야 오디션장을 나선다. 빅토르는 줄라가 영 마뜩잖은 이레나에게 말한다. 줄라에게는 무언가가 있다고, 에너지와 기백이 있고, 독특하다고. 이레나는 줄라가 산악지대 민요를 부르지만 도시 출신에 집행유예 중이라고 응수한다.

1951년 바르샤바. 민속음악단의 공연이 성공리에 치러지고, 당에서는 인민 문화의 보물이라 치하하며 공연에 토지 개혁이나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지도자에 대한 내용을 추가할 것을 명한다. 한편 연인이 된 빅토르와 줄라는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줄라는 보호관찰 중이라 입단 조건이었다며, 매주 카치마레크에게 정치적 사상이 의심되는 빅토르에 대한 보고를 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1952년 동베를린. 공연차 독일에 온 빅토르는 줄라와 함께 파리로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약속한 장소에서 빅토르는 초조하게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지만 줄라는 끝끝내 오지 않는다. 결국 그는 홀로 망명길에 오른다.

1954년 파리. 재즈클럽에서 피아니스트로 일하는 빅토르는 민속음악단의 공연으로 파리에 온 줄라와 해후한다. 줄라는 그날 왜 오지 않았느냐고 다그치는 빅토르에게 자신이라면 혼자 탈출하지 않았을 거라고 답한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온 빅토르는 함께 사는 시인 줄리에트(잔느 발리바)에게 말한다. 내 인생의 여자와 있었어.

1955년 유고슬라비아. 빅토르는 줄라를 보려고 민속음악단의 공연이 있는 극장으로 향한다. 그는 줄라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공연 중간에 연행되어 열차에 태워져서 추방된다. 무대에서 빈 객석을 바라보는 줄라의 눈빛이 얼얼하다.

1957년 파리. 영화에 음악을 입히는 작업 중이던 빅토르 앞에 줄라가 나타난다. 긴긴 시간 서로를 기다린 그들은 뜨겁게 사랑한다. 허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줄라의 음반을 준비하면서 날 선 말들이 서로를 향한다. 빅토르는 녹음을 하는 그녀에게 텅 비었다며 스스로를 믿으라고 하고, 줄라는 그가 폴란드에서와 달라졌다며 자신을 못 믿는 건 그라고 힐난한다. 그와 함께지만 더 외로운 줄라는 폴란드로 돌아간다. 홀로 남겨진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빅토르는 배신자로 낙인찍힌 그를 받아줄 리 없는 고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1959년 폴란드. 수용소의 빅토르는 깡마른 몰골에 손가락은 더 이상 건반을 누를 수 없게 되었다. 15년형을 선고 받은 그는 면회를 온 줄라에게 너의 모든 것을 받아줄, 평범한 남자를 찾으라고 권한다. 그녀는 세상에 그런 남자는 없다며 맹세한다. 여기서 나가게 해줄게.

1964년. 술에 절은 채로 멕시코 밴드와 공연을 하는 줄라는 남편 카치마레크와의 사이에 어린 아들도 하나 있다. 음악에 취해 있던 그녀는 이제 술에 취해야만 삶의 무게를 감내할 수 있다. 줄라는 자신의 곁으로 돌아온 빅토르에게 절절한 부탁을 한다. 여기서 나가게 해줘, 영원히. 폐허가 된 성당을 찾아간 빅토르와 줄라는 둘만의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일렬로 늘어놓은 알약을 삼키며 죽음으로 그들의 사랑을 완성하고자 한다.

지난 7일 개봉한 ‘콜드 워’의 말미에는 ‘부모님께 바칩니다’라는 자막이 새겨 있다. 파벨 파블리코브스키 감독이 40년에 걸친 부모의 사랑으로부터 받은 영감이 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파벨 파블리코브스키는 부모님의 이름과 뜨거운 감정은 그대로, 설정과 극적인 사건들은 새로이 추가하여 한 편의 서사로 완결했다. 제71회 칸영화제는 그의 작품에 감독상으로 답했다.

전작 ‘이다’처럼 흑백영화인데, 이번 작품은 냉전이라는 뜻의 콜드 워, 즉 시대의 공기를 머금으려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4:3 화면비로 담겨진 장면들 중 몇몇은 한 폭의 그림처럼 미려하게 파고든다. 시간 혹은 시공간으로 등장하는 자막은 소제목처럼 기능하지만 서사적으로 여백이 많다. 그렇지만 그 여백을 나름의 상상으로 채우는 즐거움이 크다. 특히 엔딩신의 여백은, 거기서 비롯된 여운은 굉장하다.

음악도 빼어난 작품이다. 극중에서 음악에 무지한 카치마레크는 민속음악을 조악하고, 원시적이고, 주정뱅이의 노래로 치부한다. 그러나 들판에서 태어나서 고통과 치욕, 눈물 어린 환희를 노래하는 민속음악은 매력적이다. 폴란드를 대표하는 민속음악단 ‘마조프셰’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특히 ‘심장’은 단순한 선율의 솔로곡으로, 앙상블과 함께한 전통 민요로, 재즈 버전으로 변주되면서 관객의 심장까지 달군다.

요안나 쿨릭과 토마즈 코트는 예열된 감정으로 무려 15년에 걸친 줄라와 빅토르의 사랑을 켜켜이 그려냈다. 돌연히 줄라가 떠난 후 빅토르가 눈물을 흘리며 피아노를 치는 장면에서는 피아노도 함께 흐느끼는 것으로 보일 만큼 그의 슬픔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줄라는 빅토르 뿐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까지 매료한다. 강에 불쑥 몸을 던지고는 물에 둥둥 떠 있는 채로 노래를 흥얼거리고, 클럽에서 ‘Rock Around The Clock’에 맞춰서 몸을 흔들고, 사랑에 노래에 심지어 술에 취해 있는 모습마저도 눈부시다.

‘콜드 워’는 냉전이라는 씨실에 사랑이라는 날실이 엮이는 순간을 애련하게 그려낸다. 이토록 진한 사랑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랑의 유효기간을 늘린 것은 그 시대여서일지도 모른다. 여느 영화에서 세상 끝까지 당신과 함께할 거라는 대사가 나왔다면 귀로도 흘렸을 법한데, 이 영화에서는 귀보다 심장이 먼저 반응을 했다. 끝나지 않는 그들의 사랑에 괜스레 가슴이 시큰해졌다.

뚝뚝 흘러내리는 사랑을 맛보고 싶다면 극장으로 가시기를.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박미영 영화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한 작가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진위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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