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N 리뷰] ‘리지’, 서늘하고도 처연한 그 시간 속으로

[텐아시아=박미영 기자]

영화 ‘리지’ 포스터

1892년 여름. 매사추세츠주의 부호 보든가(家)의 저택에서 앤드류 보든(제이미 쉐리던)과 아내 애비(피오나 쇼우)가 싸늘한 주검으로 딸 리지(클로에 세비니)에게 발견된다. 리지는 하녀 브리짓(크리스틴 스튜어트)을 다급하게 부르며 경찰에 신고하라고 한다.

6개월 전. 애비는 새로 온 하녀 브리짓이 지낼 방으로 안내하면서 의붓딸 엠마(킴 딕켄스)와 리지가 있고, 앞으로 그녀의 이름이 아니라 ‘매기’로 부르겠노라고 한다. 리지에게는 극장만이 유일한 탈출구인데, 앤드류는 명문가의 자제답지 않다며 곱지 않은 말로 쏴붙인다. 간질을 앓고 있는 리지는 주치의가 아버지에게 자신을 시설로 보내라고 권하는 것도 알고 있다. 한편 앤드류에게 반드시 죗값을 치르리라는 협박 편지들이 이어지면서, 그는 유언장을 비롯한 상속 문제를 도와줄 존(데니스 오헤어)을 불러들인다. 리지는 아버지의 유산을 노리는 삼촌 존의 음흉한 속내를 알기에 마뜩찮다. 그리고 앤드류의 탐욕스러운 눈길이 하녀 브리짓을 향하기 시작한다.

영화 ‘리지’ 스틸컷

지난 10일 개봉한 ‘리지’(감독 크레이그 맥닐)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1800년대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친부와 계모를 도끼로 잔혹하게 살해한 ‘리지 보든 살인사건’. 이미 다양한 장르로, 숱한 작품들로 이 사건이 다뤄졌지만,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자극적으로 그려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살점이 움푹 패인 시체가 아니라, 도끼를 든 한 여자의 처연한 눈빛에 집중한다.

리지는 매양 고분고분한 언니 엠마와 달리 대차다. 소작농을 업신여기는 아버지에게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이 키우는 비둘기에게 ‘헨리’라는 이름도 짓고, 뭘 듣고 싶으냐고 물으며 책도 읽어주는, 깊은 감성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당돌하고 총명하기에 더 갑갑했던 그녀의 일상에 브리짓이 스며든다. 리지는 ‘매기’라는 생뚱한 이름으로 존재감을 없앤 가족들과 달리 ‘브리짓’으로 부르고, 그녀의 말에 귀기울인다. 그리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브리짓에게 글을 가르친다. 둘 사이에 차츰차츰 웃음이, 특별한 감정이 피어오른다.

클로에 세비니와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빚어낸 ‘리지’와 ‘브리짓’은 몹시 매혹적이다. 서늘하고도 처연한 그 시간 속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게끔 한다.

청소년 관람 불가.

박미영 기자 stratus@tenasia.co.kr